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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천산(왕자봉) ; 583m 강천산은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알려진 명산이며, 1981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583.7m의 강천산은 계절별로 봄에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폭포와 계곡, 가을에는 애기단풍, 겨울에는 잔설로 덮인 현수교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또한 강천사, 광덕정, 흥화정이라는 정자와 순창 삼인대(淳昌三印臺)[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 깎아지른 계곡에 만들어진 길이 76m의 호남 제일의 구름다리인 현수교등이 볼거리다. 2003년에 인공으로 조성된 병풍 폭포는 높이 40m의 자연 형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미와 웅장함이 살아 있다. 2005년에 2.5㎞의 웰빙 산책로[맨발 산책로]가 조성되었으며, 2009년에는 삼림욕장이 조성되었다. 산줄기는 백두 대간인 장수군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다 금남 호남 정맥인 진안군과 완주군의 경계에 있는 주화산에서 두 갈래를 친다. 주화산에서 북으로 금남 정맥을 보낸 호남 정맥이 남진하며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백암산, 용추봉, 추월산을 거쳐 강천산을 형성하였다. 강천산의 물줄기는 남쪽은 담양호를 통하여 영산강으로 흐르고, 동쪽은 구림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흐른다. 강천산(剛泉山)은 원래 광덕산(光德山) 이었으나,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강천사(剛泉寺)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어 강천산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나 문집 등에는 강천산보다는 광덕산이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다. 또한 풍수지리상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서 용천산(龍天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참고】 ◆ 내장단풍 : 잎이 9개로 갈라지고 잎 뒷면 맥액에 갈색 털이 있으며 시과가 수평으로 벌어진다. 백색털이 밀생하며 열매의 날개가 거꿀달걀모양이다. . 털이 있고 열매가 좁은단풍의 1/2정도로 크다. (강천산 아기단풍 절정시기는 보통 11월초 입니다) ◆금성산성 (사적 제353호) 담양 금성산성은 산성산 위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산은 최고 해발 603m의 높이로 깎아지른 바위 벼랑이 이어진 산이며,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게다가 부근에는 이보다 높은 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널찍한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 이곳에 성을 쌓아 두면 나는 새가 아닌 이상 바깥에서는 결코 성안을 볼 수 없는 지형으로 된 천혜 요새지이다. 또한 성안에는 샘이 풍부하여 충분한 식량만 쌓아 놓는다면 매우 오랜 시간동안 성을 지키며 적군을 붙잡아 둘 수 있는 훌륭한 조건까지 갖추었다. 과거 조선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평지에는 읍성, 배후 산에는 산성을 동시에 축조했으며, 평시에는 읍성에서 관리와 백성들이 생활을 하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산성으로 옮겨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단단히 지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담양에는 읍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금성산성은 평시 읍성의 역할도 상당부분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현재 금성산성에는 관아와 민가터가 많이 남아있어 옛날 이곳에 많은 병사들이 주둔하여 주변을 경계했다. 최초의 축조 시기는 길게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고려 우왕 6년(1380년) 에 왜구에 대비하며 개축했는데 '금성(金城)'이라 했다 한다. 비록 성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 이전인 고려 고종 43년(1256년)에는 몽고의 차라대군이 담양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성산성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태종 때로 1410년 전라, 경상도의 12개 산성이 수축된 기록에 나온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추월산에 석벽이 사방을 둘러 둘레가 9,018척, 13천(샘)이 있고, 연동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가까워 오자 조선은 국가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입보농성의 최적지인 산성의 보수를 서두르게 된다. 이때 금성산성 역시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했으며 계속적인 보강이 이루어져 이때부터 금성산성은 장성 입암산성, 무주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게 된다. 금성산성은 그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전화를 겪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에 맞서는 항몽의 전적지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의 거점으로 노령을 넘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의 전투는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격전으로 전투가 끝난 후 외남문인 보국문 오른편 깊은 골짜기로 전사자를 치우고 보니 시신이 무려 2,000여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골짜기의 이름을 이천골(二千骨)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군이 이 곳을 거점으로 삼아 진압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전봉준이 잡혀 죽음을 당한 이후 이곳 금성산성도 결국 관군에게 점령되어 성 내의 전각과 모든 시설들이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겪게 된다. 금성산성은 돌로 쌓여진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길이는 7,345m로 외성이 6,486m, 내성이 859m이며, 연면적은 1,197,478㎡(362,237평), 내성의 면적은 54,474㎡(16,478평)이다. 성의 전체 크기를 판가름하는 외성은 연대봉과 철마봉, 시루봉 등의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구간이 아찔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방어력을 한껏 높이는 한국의 산성답게 가끔씩 바위 벼랑을 그대로 자연성벽으로 이용한 곳들도 있다. 바위 능선이 매우 험준한 곳이 많아 지정된 문이 아닌 곳으로는 통행이 어려우며, 심지어 병사 한명 없이도 능히 지켜지는 구간이 전체 외성의 약 30%에 이른다고 하니 방어요새로서 산성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특히, 산 아래 담양댐이 건설되며 서쪽 성벽의 바위벼랑 아래로는 인공 호수(담양호)의 깊고 푸른 물결마저 넘실거리게 되어서 풍경의 아스라함을 한껏 더한다. 1991년 사적 제35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지금의 모습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 종주팀은 시간지체 우려로 산행 최상급자로 구성하여 실시함 ◆ 금성산성코스 산행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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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조제영님이 신청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정명교 한희자 산행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상필님. 홍명숙님. 산행신청합니다
알겠습니다
김병남 불참합니다
알겠습니다
대굴령님 못가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일이바빠 이번산행. 불참합니다
죄송함니다
알겠습니다
산행 신청합니다
곽영주
감사합니다
김동혁 신청합니다
이미 접수되셨습니다
백운옥 갑니다.
감사합니다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선자 산행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