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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그막의 삶을 윤택하게 보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 모령인사(耄齡人事)> 고영화(高永和)
약 400년 前, 경북 인동(仁同, 구미시) 출신의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이 ‘늘그막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쓴 2편의 글이 있다. <모령 인사(耄齡人事)>와 <노인 사업(老人事業)>이 그것이다. 그는 늘그막의 삶을 윤택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면서, 작품 <모령인사(耄齡人事)>에서 모령(耄齡), 즉 70세 이후 노년에 해야 할 일 4가지를 기술하여, 후인(後人)들이 크게 징험(徵驗)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즉, ① 언어를 그칠 것(止言語),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간섭 하지도 말 것. ② 경영을 끊을 것(絶營爲), 세속의 잡된 일은 삼가고 심신을 피곤하게 하지 말 것. ③ 마음을 크게 비울 것(心太虛), 마음을 비워 잡념을 끊고 경(敬)과 성(誠)에 애쓸 것. ④ 사시(四時)에 맡길 것(任四時), 자신의 삶을 천지자연의 이치에 맡기라 하였다.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 시들기 마련이다. 『나이 든다는 것과 늙어 간다는 것』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니 이에 따르면 그만인 게다.
이에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 44장에서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험하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했듯이, 노년에 이르면 이제 좀 뒤돌아 볼 줄도 알고 명예나 이익을 한 켠에다 내려놓고 인생을 관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물론 노년기에 이르면 뒷방 늙은이로 바뀌면서 경제력도 약해지고 육체 또한 노쇠화 하면서 점점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처절한 고독과 단절의 상황에 놓이게 되고, 궁상과 자탄이 한숨처럼 배이게 된다. 그러나 석양처럼 붉고 우아해야 하는 노년은, 생의 최절정이어야 함이 마땅하니 우리 스스로 마음의 근육을 키워서, 인생이 눈부시도록 품위를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어나가야 한다. 그런고로 노년에 이르면 자연의 순리에 따르듯, 멈출 때를 알고 후인들에게 물러줄 건 물러주어야 거칠 게 없어진다. 그게 인간의 도(道)이자 참된 인생이다.
◉ 또한 호방(豪放)한 대현(大賢)이었던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께서 또 다른 잡저(雜著) <노인 사업(老人事業)>에서, 노인이 늙어가는 자연의 이치와 노인으로서 행하여야할 도(道)를 설명해 놓았다. 이에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우주 만물이 형체가 없는 무(無)에서 나와 형체가 있는 유(有)가 된 뒤에 비로소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만물이 있게 되었다.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의 이치가 무에서 유가 되고 유에서 무가 되게 하여, 무와 유가 무궁하게 순환하는 것을, 이른바 이(理)⋅기(氣)를 합하여 도(道)라 한다. 무가 유가 되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것이며, 유가 무로 돌아가는 것은 기운이 흩어지는 것이다. 기운이 모일 때면 점점 실(實)해지고 점점 견고해지고 점점 강해지고 점점 성해지고 점점 커지며, 기운이 흩어질 때에는 쇠하여 사라지고 쇠하여 부서지고 쇠하여 망가지고 쇠하여 축나고 쇠하여 축소된다.” 하였다. 그런고로 노년에 이르면 모발(毛髮)이 희어지고 듬성해지며 살갗이 쭈그러들고 골절이 튀어나오고 몸이 구부러진다. 또한 이빨이 빠지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하고 숨이 가쁘고 언어가 어눌해진다. 게다가 기억력이 감소하고 정신과 혼백이 흐려져 사려(思慮)가 얕아진다.
고로 “우리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고 만물의 가운데에 처하여, 또한 한 이치에 따라 유하고 무하다. 처음에 유치(幼稚)하고 중간에 장성(長成)해지는 것은 바로 무로부터 유가 되는 것이며, 장성함이 지극해져서 점점 노쇠함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유로부터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람이 노쇠해지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된다. 이에 도(道)를 보존하는데 애써야 한다. 이것을 바로 노인 사업(老人事業)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억지로 일을 보지 말고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말(言)을 줄이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옛날에 읽던 책을 다시 찾아보고 성정(性情)을 편안히 길러서 심기(心氣)를 보양(補養)하여야 한다. 이렇게 오래하다 보면 혼백이 다시 돌아오는 듯하고 정신이 다시 모이어 지난 기억이 되살아 날 것이다. 이른바 ‘도는 천지의 무형 밖까지 통하고 생각은 풍운의 변태(變態 탈바꿈, 변화) 속에 드는구나.(道通天地無形外 思入風雲變態中)’라는 경지를 이 때에 또한 징험하여 얻을 수 있다. 이로부터 무극과 태극의 묘리를 더욱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남은 여생(餘年)을 보낸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살아가면서 유로부터 무로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되는 바, 노인으로서 이러한 도(道)를 깨닫고 행하여야만 후일의 징험(徵驗)으로 삼을 수 있다.“ 하였다.
◉ 한편 우리 모두 인생황혼에 이르면 신체 어느 한군데도 아프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 쑤시고 탈이 나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러다보니 매일 약봉지를 안고 침침한 눈을 이끌고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병원과 약국 그리고 마을의 운동기구와 산책길을 벗 삼아 하루일과를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도(道)에 따라 사람은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숙명이다. 번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러한 과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시다시피 현대인의 삶은 만만치 않다. 현대사회가 인간들을 욕망으로 선동하고 교란하며 삶을 소용돌이치게 하면서 단순히 늙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젊은 날이 그리워지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소중한 경험을 통해서 연륜과 지혜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거기다가 우리는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삶 전체를 심사숙고하게 된다. 그 무엇을 후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의미를 제공하는지' 발견해 내기 위해서 말이다.
한편으론 인생의 늘그막이라고 해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허연 머리의 주름진 얼굴도 그에 못지않게 멋진 것이다. 주름진 얼굴, 관조하는 눈빛에는 지난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늘그막을 위해 육체적 건강과 경제적 여유로움뿐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로움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 사실 노인답다는 말은 편견일 뿐이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 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는 다 똑 같다. 단지 살아온 시대적 소명이 다르고 삶의 부침에 따른 나이테가 차이가 날뿐이다. ‘은퇴 후 30년 인생이 은퇴 전 30년 인생보다 나에게는 더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그런고로 노년은 일생동안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삶에 도전할 수 있는 딱 좋은 때이다. 목적 없는 자유로움과 현저한 시간을 활용해 어린아이처럼 나를 흥미롭게 하고 매혹시키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Carpe diem·오늘을 즐겨라)’은 노인들의 특권이다.
반면에 딱히 몰두할 만한 일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하지도 말자. 이 시기가 되면 젊었을 땐 절대 알 수 없었던, “그 어떤 즐거움도 동경하지 않는 즐거움”마저 누릴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건강하자!”
덧붙여 대구교육대 양선규 교수의 말씀처럼, “나이가 들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 자기가 가진 것 중 하나라도 세상에 보탤 것이 있으면 보태고 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이 또한 인간으로서 노년에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 다음은 조선중기의 주자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모령 인사(耄齡人事)> ‘늘그막에 해야 할 일’ 잡저(雜著)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모령(耄齡), 즉 노년은 70세 이후를 말한다. 누구나 노년에는 아무래도 의욕에 비해 체력이 못 따라 간다. 이 불일치를 무시하면 탈이 날 수도 있다. 우리나라도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이젠 평균 수명이 80대 중반인 시대이다. 그래서 90세까지 인생 계획을 설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늘그막의 삶을 윤택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육체적 건강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경제력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바로 정신적인 건강도 아주 중요하다. 젊은 시절의 마음가짐으로는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가 없다. 정신적인 수양이 되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찌든 삶을 산다면 남들로부터 존경은 커녕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건강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성찰하고 노력해야만 가질 수 있는 온전한 자신의 몫이다. 400년 前,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이 <늘그막에 해야 할 일(耄齡人事)>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수양에 관한 것들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말고, 잡스러운 일을 줄여 심신을 피곤하게 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 잡념을 끊고, 자신의 삶을 천지자연의 이치에 맡기라고 강설했다.
1) 노령의 인사[耄齡人事] 늘그막에 해야 할 일. / 장현광(張顯光 1554~1637)
① 언어를 그칠 것[止言語]
마땅히 그칠 것은 외간(外間)의 일에 간섭함을 이르니, 만약 집안에서의 일상적인 말이라면 어찌 다 그칠 수 있겠는가.(所當止者 謂惹涉外間事者也 若家間恒說 何可盡止)
② 경영을 끊을 것[絶營爲]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세속에서의 잡된 일을 이르니, 덕을 높이고 업을 넓히는 공부야 어찌 끊을 수 있겠는가.(所當絶者 謂俗間冗務 若崇德廣業之功 何可已乎)
③ 마음을 크게 비울 것[心太虛]
간사한 생각과 잡념을 일으켜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니, 경(敬)을 주장하고 성(誠)을 생각하는 일을 모두 정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謂邪思雜念 不可作也 非謂主敬思誠之業 俱在所停也)
④ 사시(四時)에 맡길 것[任四時]
모름지기 방관하며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뜻을 둘 것이요, 또한 만나는 환경에 따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須存不可放過之意 亦有隨遇而安之道)
2) 노인(老人)의 사업[老人事業] / 장현광(張顯光 1554~1637)
하늘과 땅과 만물이 그 처음에는 모두 무(無)에서 나왔으며, 유(有)가 된 뒤에야 비로소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만물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무(無)란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며 유(有)란 것은 형체가 있는 것이니, 이(理)가 태극(太極 우주 만물이 생긴 근원이라고 보는 본체)과 무극(無極 태극의 처음 상태)이 되는 것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과 만물의 형체의 유무에 관계하지 않고 항상 있고 다하지 않아서 마침내 하늘과 땅과 만물로 하여금 그 가운데 무에서 유가 되고 유에서 무가 되게 하여 무와 유가 또한 무궁하게 한다. 그렇다면 무극과 태극의 이치가 하늘과 땅과 만물로 하여금 무에서 유가 되고 유에서 무가 되게 하여, 무와 유가 무궁하게 하는 것이 곧 이른바 이(理)ㆍ기(氣)를 합하여 도(道)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道)는 바로 사업(事業)이 나오는 곳이다. 이미 유가 되어서 하늘과 땅은 하늘과 땅의 사업을 다하고 만물은 또한 각기 만물의 사업을 다하여 유가 되는 도가 이르지 않음이 없으면 이에 반드시 모두 쇠하고 박(薄)한 데로 전향하여 끝에는 모두 다시 무로 돌아가니, 이것은 이치와 형세의 자연스러움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이 유를 뜻하여 유가 되고 무를 뜻하여 무가 되는 것이 아니며, 유는 이치가 유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요, 무는 이치가 무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니, 그 처음에는 비록 유가 되지 않으려 하나 유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끝에는 비록 무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나 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얻은 바의 이(理)와 기(氣)가 크고 작고 후(厚)하고 박(薄)한 차이가 있어 하는 사업이 크고 작고 경(輕)하고 중(重)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유가 될 적에 혹 귀하고 혹 천하며, 무로 돌아갈 적에 혹 오래고 혹 짧으나, 무로부터 유가 되고 유로부터 무가 되는 것은 크고 작고 귀하고 천한 것에 관계없이 모1두 똑같다.
그러나 무에서 유가 될 때에 반드시 점차적으로 되고 유에서 무로 돌아갈 때에 또한 반드시 점차적으로 되니, 무가 유가 되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것이며, 유가 무로 돌아가는 것은 기운이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운이 모일 때에 처음에는 허(虛)하다가 점점 실(實)해지고 처음에는 연(軟)하다가 점점 견고해지고 처음에는 약하다가 점점 강해지고 처음에는 미미하다가 점점 성해지고 처음에는 작다가 점점 커지며, 기운이 흩어질 때에는 실한 것이 쇠하여 사라지고 견고한 것이 쇠하여 부서지고 강한 것이 쇠하여 망가지고 성한 것이 쇠하여 축나고 큰 것이 쇠하여 축소된다. 모일 적에는 날마다 불어나서 이룸에 나아가니, 이것은 무로부터 유가 되는 것이며, 흩어질 때에 미쳐서는 날마다 소모되어 다함으로 향하니, 이것은 유로부터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고 만물의 가운데에 처하여 또한 한 이치를 따라 유하고 무하다. 처음에 유치(幼稚)하고 중간에 장성해지는 것은 바로 무로부터 유가 되는 것이며, 장성함이 지극해져서 점점 노쇠함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유로부터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노쇠해지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이다.
사람은 동물이니, 또한 혈기(血氣)가 있는 종류이다. 형(形)과 질(質)이 성하고 쇠하는 것은 모두 혈기의 성하고 쇠함에 달려 있으므로 혈기가 성할 때를 당해서는 안으로 육부(六腑)가 충실하고 완전하며 오장(五臟)이 바르고 견고하며 밖으로 힘줄과 뼈가 굳고 단단하며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가 건실(健實)하고 주리(腠理 살갗)가 유통하며 영위(榮衛 혈기)가 살지고 윤택하다. 이 때문에 호흡이 순조롭고 맥(脈)의 운행이 평순(平順)하며 혼백(魂魄)이 안정되고 정신이 청명(淸明)하며 성정(性情)이 중화(中和)하고 사려(思慮)가 전일(專一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만 씀)하며 이목(耳目)이 총명하고 사기(辭氣 말과 얼굴빛)가 민첩하며 걸음이 재빠르고 동정(動靜 운동과 정지)이 적절하니, 이와 같다면 크고 작은 사업에 있어 공부하고 힘쓰는 것이 모두 뜻대로 되는 것이 당연하다.
혈기가 이미 쇠함에 이르면 검던 것이 희어지고 길던 것이 짧아지고 빽빽하던 것이 듬성해지는 것은 모발(毛髮)의 변화이며, 살이 빠져 가죽이 쭈그러들고 피부가 언 배의 빛이 되어 때가 떠있는 듯하고 골절이 툭 튀어나오며 몸이 구부러지는 것은 형모(形貌 생긴 모양)의 변화이다. 입술과 혀와 어금니와 이빨과 목구멍의 다섯 소리가 갖추어진 뒤에야 음운(音韻)이 구비되어 언어(言語)가 이루어지는데 어금니가 빠지고 이빨이 빠짐에 이르면 다섯 소리 가운데에 두 소리를 이미 잃게 된다. 그리하여 단지 입술과 혀와 목구멍의 세 소리를 쓰는데 이 또한 모두 가늘고 느리며 민첩하지 못하니, 언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음성의 변화이다. 그리고 마치 연기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마주 대한 사람의 안면을 살피지 못하고 담장과 벽이 막혀있는 것과 같아서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은 이목(耳目)의 변화이며, 당(堂)과 뜰을 오르내림에 숨이 가쁘고 응접하여 절하고 읍(揖)함에 넘어지는 것은 기력의 변화이다. 옛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여 새로 알기를 바랄 수가 없으며 지구(知舊 오랜 벗)의 성명(姓名)을 모두 잊고 옛날 외던 문자를 모르니, 이는 정신과 혼백의 변화이다.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하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단단한 뿌리와 마디를 만나도 무뎌지지 않는 재기(才氣 훌륭한 정신능력)로서 우리 도를 짊어지고 당세를 경륜하며 우주를 담당하고 천지를 잡겠다는 마음과 담력을 떨치고 뽐낼 수가 없으니, 이는 지기(志氣 뜻과 기백)와 역량(力量 능력)의 변화이다.
사람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마땅히 무슨 일을 하겠는가. 정신은 의리의 정미(精微 정밀하고 자세함)함을 연구할 수 없고 사려(思慮)는 변화의 묘함을 다할 수 없으며, 역량(力量)은 원대(遠大)한 사업을 이룰 수 없고 시력(視力)과 청력(聽力)은 소리와 색깔을 살필 수 없으며, 언어는 정(情)과 의사를 펼 수 없으니, 이 때에 어찌 다시 인간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 늙으면 쇠하지만 도를 보존하는 것은 마음이 늙더라도 또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쇠한 것은 진실로 다시 성해질 수 없으나 떠날 수 없는 것은 마땅히 그대로 있다. 그러므로 다만 한 방에 고요히 앉아서 일체 사무를 정지하고 경영을 그치며 출입을 끊고 왕래를 끊으며 응접을 적게 하여야 할 것이니, 억지로 사려를 쓰고 억지로 시력과 청력을 쓰고 억지로 언어를 쓰고 억지로 동작을 쓰지 말아서 앉고 눕기를 때에 따라 하고 음식을 적절히 하여야 한다.
그러나 폐할 수 없는 것은 옛날에 읽고 외던 책을 다시 찾고 생각하여 의리를 보고 기뻐하며 성정(性情)을 편안히 길러서 심기(心氣)를 보양(補養)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기를 오래하고 오래하면 혼미하던 혼백이 다시 돌아오는 듯하고 흩어졌던 정신이 다시 모이는 듯하여 옛날에 잊었던 것이 혹 기억되고 옛날에 통하여 알지 못하던 것이 혹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지극히 하고 이것을 이끌어 멀리하면 그 쌓임이 천지의 조화와 더불어 유통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도는 천지의 무형 밖까지 통하고 생각은 풍운의 변태(變態 탈바꿈, 변화) 속에 드는구나.[道通天地無形外 思入風雲變態中]’는 경지를 이 때에 또한 징험하여 얻을 수 있어서 무극과 태극의 묘리를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남은 여생(餘年)을 보낸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이로써 말하면 사람이 처음 태어남은 무에서 유가 되는 것이며, 태어나서 자라고 자라서 성숙하는 것은 무에서 유가 됨이 극에 달한 것이니, 크고 작은 사람의 사업이 모두 이 때에 있는 것이다.
성함이 지극하면 쇠해지고 쇠하면 늙어지는 것은 유로부터 무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는 아직 완전히 무가 된 것은 아니며, 기운이 다하여 죽으면 이는 완전히 무인 것이다. 그러하니 완전히 무가 되기 전에 잘 기르고 편안히 휴식하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는 것이 노인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일이 없는 가운데의 일이요, 업이 없는 가운데의 업인 것이다.
내 이제 다함에 이르러 무로 돌아가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성함이 지극할 때에 우리 인간의 원대한 사업을 하지 못하여 한 가지라도 옛사람이 세운 것과 같이 하지 못하였으니, 쇠함이 지극한 지금 혹시라도 노인의 사업을 다할 수 있겠는가. 우선 이 뜻을 기술하여 후일의 징험(徵驗)으로 삼으려 하는 바이다.
글쓴이 "고영화"는 거제 지세포 출신의 고교동기
첫댓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인가?
하~공부좀 해야긋네~
회장님!!!
쪼~옴 😠
오호 친구 똑똑햐~~~
@가온 오호~감사^^😘
가온.연수님은 이란성쌍둥이 같아요..
나이도 같고 생김새.사이즈도 비슷하고..
특히, 머리도 좋은 똑디 남매 같아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