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하신 약속의 말씀이 효력이 있느냐? 실행이 될 것이냐?
교회와 약속이 있다. 믿는다.
그러나 로마서 9,10,11장에서 이스라엘을 안 버리셨다.
(롬11:24 네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꺽여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 졌는데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본래의 올리브 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여 지겠느냐?)
예수님은 마태복음 24,25장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
(마태복음 24: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더라.)
이를 부인하기 위해 AD70에 맞추어 버린다.
이 사건이 AD70년 로마 티투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모두 과거사로 돌리고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이스라엘은 살아있고 회복된다 고 설명한다.
요한도 살아있고 회복된다. 그러나 심판이 있다. 계시록 5장부터 심판이 시작된다.
그런 후에 회복이 이루어진다.
"문자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세대주의 신앙이다."
대체신학은 AD70에 모두 성취되었다. 교회로 대체되었다. 카톨릭이 가장 대표적이다.
말로다 표현은 기다린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되면 본질적으로는 기다링 수 없다.
고백의 진정성은 재림의 고대이다.
체계적 지식이 없이는 볼 수 없다.
1. 성경에 예언된 대환란
예수님은 마태복음 24:21,22에서 예언하셨다.
예레미야는 30:4-7에서 야곱의 고난의 때라 했다.
에스겔 20:33-38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할 것”,
에스겔 22:19-22 “용광로 안으로 던지실 것”
이러한 구절들은 대환란이 이스라엘 민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정련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교회”는 주의 날인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휴거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세대주의를 공격하는 무리들은 계시록을 연대기적 기록으로 보고 6장 마지막 번개 우박을 반복이 끝나고 시작되고를 꼬투리로 잡는다.
아니다, 4복음서에 예수님이 4번 죽으신 것이 아니다. 4명의 기자가 각기 다른 시각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도 대환란를 아래 표처럼 4번 반복 설명이다.
구약의 효력은 요한의 때 까지이다. 믿음이 올 때까지이다.
개혁주의는 이것이 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십자가에 꿰어맞추면 계시록의 모든 것을 교회에 맞춘다.
7장의 144,000도 교회이고, 11장의 두 증인도 교회, 성도이다.
성경해석과 무관하게 바꾸어야 한다. 결국 영적해석으로 간다.
사도행전 2장은 침례구원의 교리이다. 천국복음이다. 3장도 그렇다. 그리 믿으면 다 지옥간다.
마귀의 주적은 이스라엘이다. 본래 자기 것인데 이스라엘에 빼앗겼다. 에덴도 자기 것이었는데 사람에게 빼앗겼다. 경륜이 시작되며 빼앗겼다. 이스라엘을 교회가 빼앗으면 되는 것이다. 보통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복음과 교회를 통해서 정복해 나간다는 것이 카톨릭의 신념의 근원이다.
흰 말 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모조품이다.
사탄은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좋아진다고 그래서 게속 가자 평화를 부르짖는다.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해결하신다.
2. 계시록 7장의 144,000은 누구인가?
"십사만 사천 명"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인 유대인들"도 아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선정된 십사만 사천 명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선정된 십사만 사천 명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믿는 성도들의 영적인 지파들"이 아닌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지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갈라디아서 3:28에 "유대인이나 헬라인도 없고 종이나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으니 이는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
그뿐만 아니라 "십사만 사천 명"은 "신천지"도 아니다. 이 가증한 이단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도 모자라서 "마태 지파", "야고보 지파", "요한 지파", "다대오 지파", "맛디아 지파" 등까지 날조해 냈다.
우리는 "십사만 사천 명"이 누구인지 우리 스스로 해석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종교적인 쓰레기들을 먹어 왔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을 읽어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선정된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말씀했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뜻을 의미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선정된 십사만 사천 명"을 의미한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그렇게 지났는데 어떻게 회복되? 그것은 인간적 관점이다.
문제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록된 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3. 대환란에 대한 두 번째 설명, 일곱 나팔
요한계시록 9장의 설명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수없이 상대하셔서 그들을 때리고 죽이고 불구자로 만든다해도, 그들이 온전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온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압력도 그들의 의지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완악한 것이다!
육신에 관련된 설명이다. 천년왕국이 완벽했다면 그렇게 덤빌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육신의 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작은 책"을 먹은 사도 요한에게 <네가 많은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 앞에서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 10장11절에서 주어진다. 성경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딤후2:2)
현 세상에서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뿐이다.
<예수의 증거가 예언의 영>이므로 (계시록 19:10) 성경을 통해서 <예수의 증거>를 깨달았다면 미래를 예언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거리에서 죄인들의 미래에 관하여 예언해야 하고(시편 9:17), 교회와 신학교에서 역사의 미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가르쳐야 한다.(계 1:7; 22:20)
4. 요한계시록 11장은 성경을 푸는 열쇠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은 요한계시록 자체를 여는 열쇠이고,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여는 열쇠이며, 구약은 신약을 여는 열쇠이다. 22장을 여는 것이다. 11,12,13장이 핵심이다. 7존재(persons)를 알아야 구약을 연다.
구약은 타임 elements가 없다. 왜? 초림오면 당연히 재림이다. 유대인은 재림만을 보았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죽였다. 예언이다.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행 2장~7장이 그 내용이다.
"메시아를 너희가 죽였다. 메시아를 받아들여라." 그 제안이 스테판까지 이어진다.
그것마져 거부한다.
개신교는 재림을 놓친다. 모든 것을 십자가에 구겨 넣는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해석체계로 놓쳐 버린다.
11장에 다 있다.
환란 후 휴거가 있다. 환란전 휴거는 4장에 있다.
144,000이 해당된다.
못 올라간 무리들이 셀라페트라로 가서 재림전까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