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지혜와 실천이 완벽한 분', 윗자짜라나삼빤노의 의미와 15가지 실천에 대해 알아보았다.
윗자는 부처님의 삽반뉴따냐나, 짜라나는 부처님의 마하까루나를 상징한다.
32. 세존이 영지를 구족하심은 일체지(sabbaññutā)를 원만히 하신 뒤 성취하셨으며, 실천을 구족하심은 크나큰 연민을 원만히 하신 뒤 성취하셨다. 그분은 일체지로 모든 중생들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아시고 크나큰 연민으로 해로운 것을 피하게 하고 이로운 것을 행하도록 권장하셨다. 마치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셨던 다른 [과거의 부처님들]처럼. 그래서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지 않은 [외도]들의 제자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 등을 하면서 [나쁜 도닦음을 가지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나쁜 도닦음을 가지지 않고 좋은 도닦음을 가지는 것이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490, 초기불전연구원(2004)
이제 부처님의 8가지 지혜에 대해서 알아보자.
3.
윗자는 3가지 지혜를 말하기도 하고, 8가지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Pubbenivāsa-anussati-ñāṇa, 宿命通智)
신성한 눈의 지혜(Dibba-cakkhu-ñāṇa, 天眼通智)
번뇌 소멸 지혜(Āsava-kkhaya-ñāṇa, 漏盡通智)
위빳사나 지혜(Vipassanā-ñāṇa)
마음으로 만든 신통 지혜(Mano-mayiddhi-ñāṇa)
신통 변화 지혜(Iddhi-vidha-ñāṇa, 神足通智)
신성한 귀의 지혜(Dibba-sota-ñāṇa, 天耳通智)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Ceto-pariya-ñāṇa, 他心通智)
3가지 지혜는 위에서 1~3번을 말한다.
세 가지 지혜를 간단하게 'pudiā(뿌디아)'라고 합니다. '뿌 · 디 · 아'라는 단어 세 가지만 기억하면 여러분들은 붓다의 세 가지 지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뿌 · 디 · 아', '뿌 · 디 · 아'...라고 죽을 때까지 독송해도 여러분들은 걱정이 없습니다. 그렇게 독송하면서 죽으면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갑니다. '뿌 · 디 · 아'라는 붓다의 지혜와 공덕의 힘으로 선처로 가는 것입니다.
²⁵⁹⁾ "여기서는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vipassanā-pādaka) 제4선의 마음'이라고 알아야 한다."(DA.i.224) 즉 앞의 마음으로 만든 몸과 다섯 가지 신통지는 모두 '신통의 기초가 되는 제4선의 마음'이지만 이 누진통은 위빳사나로 성취되기 때문에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제4선의 마음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1권 p.258, 초기불전연구원(2005)
그럼 8가지 윗자를 하나씩 알아보자.
①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Pubbenivāsa-anussati-ñāṇa
Pubbe(이전에, 과거에) + nivāsa(거처, 머무는 곳, 삶) + anu-(따라가며) + sati + ñāṇa → 과거 생을 기억하는 지혜
宿命通智(머물 숙, 목숨 명, 통할 통, 지혜 지) → 과거의 삶을 꿰뚫는 지혜
한두 생이 아니고, 이번 생부터 쭉 거슬러 올라가서 직전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 자기가 살아 왔던 전생들을 대충대충 아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본다.
원인과 결과에 따라 전생을 보니까 현재가 왜 이런지를 알게 된다. '내가 그 생에서 무슨 일을 하였고, 무슨 일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태어나고 이렇게 사는구나'라고 본인에 대해서 모두 다 안다.
부처님은 본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으면 한 순간에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알려고 하지 않으면 모르신다. 붓다께서는 필요성이 없으면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어떤 중생을 보고 그 중생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그의 전생을 수억 만 개까지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현재 보이는 것만 알지만 붓다께서는 보이지 않는 과거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윤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아신다.
"93. ...그는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 ,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뿌'는 '뿝베니와사누사띠(pubbenivāsanussati)'에서 따온 말입니다... 전생을 보는 지혜입니다. 뿝베(과거, 전생)... 니와사(살았던 것을), 아누사띠(따라서 계속 아는 것)입니다. 한두 생이 아니고, 이번 생부터 쭉 거슬러 올라가서 직전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 자기가 살아 왔던 전생들을, 대충대충 아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봅니다.
그러면 전생을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생을 보니까 현재가 왜 이런지를 알게 됩니다. 붓다에게는 원인과 결과가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 생에서 무슨 일을 하였고, 무슨 일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태어나고 이렇게 사는구나'라고 본인에 대해서 모두 다 압니다. 부처님은 본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으면 한 순간에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려고 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전기 불처럼 항상 켜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붓다의 지혜가 매 순간 켜져 있으면서 온 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붓다께서는 필요성이 없으면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어떤 중생을 보고 그 중생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그의 전생을 수억 만 개까지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생이 과거에 그렇게 살아서 지금 이렇다고 압니다...나는 지금 현재 보이는 것만 알지만 붓다께서는 보이지 않는 과거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윤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압니다...
딥바짝쿠(천안통)은 죽음과 태어남을 보는 지혜다. 천안은 어떤 중생이 죽었다면 어디서 어떤 업으로 다시 태어날지를 아는 것이다.
이로써 업과 과보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다. 뿝베니와사누사띠와 딥바짝쿠 냐나를 통해 전생과 후생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없다. 윤회에 대한 의심이 하나도 없다.
95.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이들은 몸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입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어 사견업을 지었다. 이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비참한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몸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입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마음으로 좋은 일을 골고루 하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정견업을 지었다. 이들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라고.
'디'는 '딥바짝쿠(dibbacakkhu)'에서 따 온 말입니다. 딥바(천신), 짝쿠(눈), 딥바짝쿠는 천안, 천신들의 눈을 말합니다. 천신의 눈은 일반 사람들보다 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붓다께서는 그런 천신들보다 더 잘 봅니다.
딥바짝쿠(천안통)는 죽음과 태어남을 보는 지혜입니다. 천안은 어떤 중생이 죽었다면 어디서 어떤 업으로 다시 태어날지를 압니다... 그러면 그렇게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업과 과보에 대한 의심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붓다께서는 전생과 후생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윤회에 대한 의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²⁶⁰⁾...'흐르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원래는 종기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오랫동안 발효된 술 등을 뜻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DhsA.48) 이것이 우리 마음의 해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정착이 된 것이며... 이런 마음상태들을 아사와(āsava, 흘러나오는 것)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도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악취나는 술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간으로서는 최고로 높은 존재 즉 비상비비상처까지 흘러가고, 법(dhamma)으로는 고뜨라부...의 영역에까지 흘러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DhsA.48)" -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1권 p.259, 초기불전연구원(2005)
모든 중생들이 빠져서 살고 있는 아사와 번뇌에는 4가지가 있다.
까마사와Kāma-āsava(√kam 갈망하다 → 감각적 쾌락, 애욕): 오욕락에 빠져 있다.
바와사와Bhava-āsava(√bhū 존재하다, 되다 →존재, 되려는 욕망, 삶):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 생의 욕심에 빠져 있다.
딧티사와diṭṭhi-āsava(√dṛś 보다 → 견해, 관점): 상견이나 단견, 유신견 등의 사견에 빠져 있다.
아윗자사와avijjā-āsava: 어리석음에 빠져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고통을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아사와를 모두 소멸시킨 아사와카야, 누진통은 아라한의 도와 과이다. 이것은 선정에서 오는 신통지인 뿝베니와사누사띠, 딥바짝쿠와 달리 위빳사나 지혜와 도 지혜의 결과다.
사마타라는 선정 수행을 완성하고 그 선정의 힘으로 신통력이 생기니 숙명통과 천안통이 생긴다.
마지막 번뇌를 제압한 누진통은 위빳사나 수행의 힘으로 오는 도의 지혜다.
이 세가지가 완벽한 것이 '윗자삼빤노'다.
신통지는 부처님께서 선정을 닦아서 색계 5선까지 간 다음에 그 선정을 기술적으로 계속 반복하면서 다섯 가지 자유자재함을 얻은 후에 나오는 능력이다. 5가지 자유자재함pañcahi vasitāhi은
원할 때 언제든지 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 '입정'의 자유자재함
마음먹은 시간만큼 선정에 머무를 수 있는 '머묾'의 자유자재함
마음먹은 시간에 선정에서 나올 수 있는 '출정'의 자유자재함
선정에서 나온 후 선정의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전향'의 자유자재함
선정의 요소들을 되새겨 볼 수 있는 '반조'의 자유자재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성도하시기 전날 밤, '뿝베니와사아누사띠 → 딥바짝쿠 → 아사와카야' 순서대로 뿌 · 디 · 아 지혜를 성취하셨다.
부처가 되기 전날 저녁 6시~10시 사이에 '뿝베니와사아누사띠(전생을 보는 지혜)'가 생기셨다. 대략 네 시간 안에 본인과 중생들의 과거를 다 아신다. 보면서 업과 과보, 윤회를 다 알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생들을 많이 보셨다.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게 되는지, 왜 그런지를 다 알게 된다. 십이연기를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새벽 두 시부터는 위빳사나를 시작하신다. 새벽 두 시부터 위빳사나를 수행하여 새벽 동 트기 전에 깨닫게 되신다. 위빳사나를 수행해서 무상·고·무아를 보고 수다원의 도와 과, 사다함의 도와 과, 아나함의 도와 과, 아라한의 도와 과를 거쳐서 새벽에 부처가 되신다.
97.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²⁶¹⁾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²⁶¹⁾ "번뇌들의 소멸(āsavānaṃ khayo)이란 도와 과와 열반과 해체(bhaṅga)를 두고 한 말이다. '소멸에 대한 지혜, 일어나지 않음에 대한 지혜'라는 데서는 도가 번뇌들의 소멸이라고 설하셨다. '번뇌들을 소멸하기 때문에 사문이 된다.'(M.i.284)라는 데서는 과(phala)가 번뇌들의 소멸이라고 설하셨다. '남의 허물을 관찰하고 항상 [남의] 잘못을 인식하려 드는 자의 번뇌는 증가하나니 그런 자는 번뇌의 소멸로부터 저 멀리 있다.'(Dhp.253)라는 데서는 열반이 번뇌들의 소멸이라고 설하셨다. '번뇌들을 소멸하고 사라지게 하고 부수는 것은 무상함을 통한 사라짐이다.'라는 데서는 해체가 번뇌들의 소멸이라고 설하셨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아'를 '아사와카야냐나(āsavakkhayañāṇa)'에서 가지고 와서 '뿌 · 디 · 아'라고 말합니다. 아사와(번뇌), 카야(없어지는 것), 즉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지혜입니다. 아사와 번뇌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까마사와(오욕락에 빠져 있는 것), 바와사와(생의 욕심에 빠져 있는 것), 딧티사와(사견에 빠져 있는 것), 아위자사와(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아사와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오욕락에 젖어 있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의 욕심에 빠져 있고, 상견이나 단견,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등의 사견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에 빠져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고통을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에게는 그런 '아사와'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사와카야'는 아라한의 도와 과입니다... 앞에서 말한 뿝베니와사누사띠...와 딥바짝쿠...는 선정에서 오는 신통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아사와카야냐나...는 위빳사나 지혜와 도 지혜입니다. 이렇게 붓다에게는 사마타와 위빳사나 지혜가 다 있습니다. 사마타라는 선정 수행을 완성하고 그 선정의 힘으로 신통력이 생기니 숙명통과 천안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번뇌를 제압한 누진통은 위빳사나 수행의 힘으로 오는 도의 지혜입니다. 그 세가지가 완벽한 것이 '윗자삼빤노'입니다.
...이와 같은 신통지는 부처님께서 선정을 닦아서 색계 5선까지 간 다음에 그 선정을 엄청나게 기술적으로 계속 반복하면서 다섯 가지 자유자재함¹⁴⁾을 얻은 후에 나오는 능력입니다.
부처가 되기 전날... 한국 달력으로는 4월 보름날 밤, 저녁 무렵 6시와 10시 사이에 '뿝베니와사아누사띠(전생을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때는 아직 부처가 아니었습니다. 부처가 되기 직전부터 이 신통지가 생겼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들도 못 믿겠다면 열심히 수행해 보세요. 수행하다 보면 이번 생도 많이 기억납니다... 경전에는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하는 것도 있대요...사띠가 그렇게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은 머리 굴리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많고, 희미하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관찰해서 사띠가 좋아지면 과거가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위빳사나 지혜 4번째 단계(우다얍바야냐나udayabbayañāṇa생멸을 보는 지혜)가 시작할 때, 즉 위빳사나 지혜가 아주 강하게 성숙하려고 할 때 과거를 많이 기억합니다. 수행 중에 생각지도 못한 과거를 뚜렷하게 기억할 때는 수행이 좋아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수행력이 안 좋은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네 번째 단계의 위빳사나 지혜가 강력하게 일어나면 생멸을 아는 지혜가 시작되면서 그런 경험들이 많이 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깊이 계속 수행하면 이번 생에 태어나는 마음인 재생연결식까지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번 생에 태어나기 직전 전생에서 죽을 때의 마음까지 알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생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신통력이 있을 때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신통력이 없어도 위빳사나 수행으로도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띠'로 알아차림이 예리해지고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 도중에 '사띠'가 매우 좋아지면서 탁탁 기억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에게는 저녁 6시에서 10시쯤에 계속 과거 생들이 기억납니다... 보는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6시에서 10시면, 대략 네 시간 안에 본인과 중생들의 과거를 다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의 힘이 센지, 엄청나게 빠릅니다. 당신의 전생을 쭉 많이 보고, 여러 중생들의 과거도 많이 보게 됩니다. 보면서 무엇을 알았습니까? 업과 과보를 아는 것입니다. 윤회를 그렇게 다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생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게 되는지, 왜 그런지를 다 알게 됩니다. 십이연기를 다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뿌 · 디'라는 두 가지 지혜가 새벽 두 시까지 생기고, 새벽 두 시부터는 위빳사나를 시작하십니다. 새벽 두 시부터 위빳사나를 수행하여 새벽 동 트기 전에 깨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위빳사나를 수행해서 무상·고·무아를 보고 수다원의 도와 과, 사다함의 도와 과, 아나함의 도와 과, 아라한의 도와 과를 거쳐서 부처가 되니 새벽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요즘 시간 개념으로 보름 다음날 16일 새벽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살아 계실때는 하루의 시작이 동틀 때부터입니다. 부처님께서 동트기 직전에 깨달으시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간 개념으로는 보름날의 마지막 시간에 부처님이 깨닫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새벽에 부처가 되니 '뿌 · 디 · 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런 지혜가 생기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라는 사견이 모두 사라지고 모두가 오직 정신 · 물질뿐임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즉 인간이란 인식 과정이 있는 정신과 인식 과정이 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로, 모두가 똑같다고 보게 됩니다. 이렇게 너와 나로 구별하는 분별심이 없어지니까 이기심을 버리게 되고 자비가 일어나면서 세상을 한 가족처럼 보게 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69, (사)법승 담마야나(2017)
물질과 정신의 조건, 즉 원인과 결과(인과)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지혜다. 현재 결과에 대한 과거의 원인을 알고, 현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원인을 보며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이렇게 알아가면서 업과 과보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된다.
억울해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어진다. 남을 미워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다 원인 따라 나타난 결과임을 알고 받아들인다. 인과로만 보지 사람을 보지 않는다. 용서 못할 일이 없게 되고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내 마음에는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까운 원인을 아는데 갈수록 먼 과거 원인까지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인과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계속 수행하면서 업과 과보를 알고 다음에는 순간순간 십이연기가 어떻게 굴러 가는지를 알고 다음에는 이 윤회가 어떻게 굴러 가는지 까지 다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지혜가 생기면 십이연기를 배우지 않았어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수행 중 다 관찰했던 것이기 때문에 단어는 잘 몰라도 내용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0, (사)법승 담마야나(2017)
Sammasana-ñāṇa(철저한 이해의 지혜)
sammasati: 철저히 알다, 이해하다 → "철저히 살피고 숙고함"
이제 정신과 물질의 생멸을 보면서 무상·고·무아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한다.
"이때는 무상 · 고 · 무아를 세밀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두리뭉실하고 거칠게 알고 몇 박자 늦게 아는 것입니다. 고통도 괴고나 행고는 잘 모르고 고고만 확실하게 압니다... 여기서 관찰력을 많이 높여 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70~371, (사)법승 담마야나(2017)
Udaya-bbaya-ñāṇa(생멸의 지혜)
Udaya: 일어남 / vaya: 사라짐
물질과 정신의 무상 · 고 · 무아를 아주 세밀하게 보는 단계다. 이 단계의 집중 정도는 근접삼매에 가깝다.
"우다얍바야냐나 단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이 단계가 진짜 위빠사나 지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지혜의 단계를 열 단계로 말할 때는 이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경전에서는 위빠사나 지혜의 단계를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다얍바야냐나가 일어나려면 근접삼매 정도의 집중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때는 오장애나 속말(inner speech)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속말이 무엇입니까? 생각이지요? 수행하다가 생각이 일어나면 집중이 깨어집니다. 이 단계에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착 가라 앉으면서 마음 토대에서 궁극적 실재의 생멸을 아주 뚜렷하게 능숙하게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바로 이 순간의 대상을 100%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생각으로 새어 나가는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궁극적 실재만 관찰하고 있으면 개념이 깨지기 때문에 현실 감각이 떨어져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시간이 몇 시인지 잘 모르게 되고, 마치 자신이 광활한 우주 속에 혼자 있는 듯합니다. 이때는 눈을 감거나 뜨거나 상관없이 마음이 개념에 덮어씌우지 않게 되고 궁극적 실재만 보게 됩니다. 개념을 보는 눈으로는 궁극적 실재를 볼 수 없어 무상 · 고 · 무아를 알 수 없고, 궁극적 실재를 보는 눈으로는 개념이 다 깨어져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띠가 궁극적 실재의 생멸을 따라 빠른 속도로 관찰하지 못하면, 즉 마음이 대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지치면, 대상을 개념화 시켜 고정시키고 그 대상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선정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하다가 사마타 선정 수행으로 가버리는 경우입니다. 위빠사나 수행하다가 대상이 변하지 않으면 자신의 수행이 사마타 수행으로 가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면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지혜가 생기는 것이 깨달음의 요소 하나입니다."
지혜가 예리해져 정신 · 물질의 생멸을 매우 빠르게 봄으로써 일어남은 보지 않고 무너짐만 보게 되는 단계
Bhaya-ñāṇa(공포 지혜)
bhaya: 공포, 두려움
앞서 정신 · 물질이 빠르게 무너지는 것을 본 뒤, 이 몸과 마음에 참된 안정이나 행복이 없으며(무상, 고, 무아) ‘두렵고 위험하며 의지할 수 없는 것’임을 통찰하는 지혜다.
Ādīnava-ñāṇa(위험 지혜)
Ādīnava: 위험, 폐해, 과실, 결점
'도무지 의지할 수 없는 불안정성'을 본 뒤 → 허망한 존재(정신·물질)가 지니는 폐해와 단점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는 단계
"그러면 윤회의 세계에서 의지할 만한 나라고 할 것이 진짜로 없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아디나와냐나... 입니다... 즉 '오온이라는 존재가 좋은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이 물질과 정신의 과정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며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3, (사)법승 담마야나(2017)
Nibbidā-ñāṇa(역겨움 지혜, 염오 지혜)
Nibbidā: nir-(~로부터 벗어남) + √vid(알다, to know) → “(무언가를 분명히 알게 되어) 더 이상 거기에 흥미나 애착을 두지 않음”, “싫증, 환멸, 무관심해짐”, “분명히 알고 나서 멀어짐, 싫어짐”
“이제 정말 진저리가 난다”는 혐오라기보다, 실체라 믿어온 대상이 덧없음을 명확히 봄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물러남(이탈), “이제 정말 붙잡을 것이 없다”는 체험적 깨달음으로 마음이 떠나게 되는 것, 대상이 무상·고·무아임을 꿰뚫어 보고, 더는 거기에 애착하지 않는 심적 전환
"그래서 빠띠상카냐나...가 생기면서 열반하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수행이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다시 노력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4, (사)법승 담마야나(2017)
Saṅkhāraupekkhā-ñāṇa(상카라에 대한 평정 지혜)
Saṅkhāra (행, 형성물): saṃ-(함께) + √kṛ(만들다, 행하다) → 조건 지어진 것, 형성된 것들
Upekkhā (평정, 고른 마음): upa-(가까이, 직접적인 접촉) + √īkṣ(보다)
가까이 봄, 바로 곁에서 또렷이 주시함, 가만히 들여다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상을 고르게 살펴봄, 개입하지 않고 그냥 두면서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봄
대상을 분명히 보되 심리적 반동(집착·혐오)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태도, 간섭하지 않고 알아차림
곁에 있으면서 바라볼 뿐 얽히지 않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수용하되 휘둘리지 않는 마음가짐
느슨한 방치가 아닌 또렷하고 균형 잡힌 주시, 간섭 없는 주시
상카루뻭카냐나는 조건 지어진 모든 현상(정신, 물질)에 대해서 중립을 지키는 평온한 마음이다.
"이때는 놀람과 기쁨으로 잘 반응하지 않습니다. 또 수행하는 자가 따로 없고 수행이 저절로 됩니다. 성숙한 위빳사나로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수행이 됩니다. 즉 법이 수행하는 거지요. 그리고 번뇌가 많이 약해져 있어서 깨달음의 직전입니다.
여기까지가 '위빳사나냐나'입니다. 이 단계에서 멈추고 범부로 윤회하면서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빠라미를 계속할 수도 있고, 바로 깨달아 수다원 도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상카루뻭캬냐나에서 깨달음으로 올라간다면, 상카루뻭카냐나에서 빠리깜마냐나(parikammañāṇa준비)로, 그 다음 우빠짜라냐나(upacārañāṇa근접)로, 그 다음 아눌로마냐나(anulomañāṇa수순)로, 그 다음 고뜨라부냐나(gotrabhūñāṇa종성)로, 그 다음 소따빳띠막가냐나(sotāpattimaggañāṇa수다원 도)로 곧바로 직진합니다. 이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마음 과정 하나입니다. 빠리깜마냐나, 우빠짜라냐나, 아눌로마냐나, 고뜨라부냐나는 깨달음 직전에 한 번씩만 일어나는 자와나(속행) 마음들입니다. 상카루뻭카냐나에서 도 지혜로 곧장 넘어가는 일련의 마음 과정이므로 상카루뻭카냐나를 보다 세분화시킨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만약 도 지혜로 넘어가지 않으면 이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범부의 ‘혈통(계보)’에서 성자의 ‘혈통(계보)’으로 옮겨 가는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는 지혜
"고뜨라부냐나...는 범부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아주 특이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닙바나(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수행 대상이 오온이 아니고 닙바나(열반)입니다. 무상 · 고 · 무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열반을 아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사성제를 덮는 오염원들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성인이 아니고 범부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5, (사)법승 담마야나(2017)
Magga-ñāṇa(길 지혜)
√mṛg(찾다, 추적하다, 쫓아가다) → 산스크리트 mārga → magga: 길, 방법
"그 다음 도 지혜가 오면서 성인이 됩니다. 소따빳띠막가냐나(sotāpattimagga ñāṇa수다원 도 지혜)는 조건 지어진 모든 행업과 과보가 소멸에 머물고 있음을 보고 의심과 사견이 완전히 사라지는 단계입니다. 수다원은 오계를 절대로 어기지 않고 만약 수다원으로 죽는다면 다음 생에서도 수다원으로 태어나 오계를 기본적으로 지키게 됩니다. 즉 오계가 천성이 되는 거지요. 수다원 도의 마음은 윤회에서 딱 한 번 일어납니다. 수다원이 되면 더 이상 사악처로는 가지 않고 욕계 선처도 일곱 번만 윤회하고 아라한이 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5, (사)법승 담마야나(2017)
Phala-ñāṇa(열매를 맺는 지혜)
√phal(열매 맺다, 생기게 하다) → phala(열매, 결과, 성과)
"그런 도 마음 다음에 바로 과 마음이 두세 번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다원 도 다음에 소따빳띠팔라냐나(sotāpatti phala ñāṇa수다원 과의 지혜)가 두세 번 일어나는데 지혜가 예리한 사람은 세 번, 보통 지혜인 사람은 두 번 일어납니다. 이 때 수행 대상은 닙바나(열반)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6, (사)법승 담마야나(2017)
"이것은 되돌아보는 반조의 지혜입니다. 도, 과, 열반, 제거된 번뇌, 남은 번뇌를 반조하는 욕계 지혜 있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반조의 지혜 다음 수다원은 욕계 마음으로 살다가 다시 수행해서 상카루뻭카냐나를 얻은 후 수다원 과 선정으로 들어갑니다. 선정에 들어있는 동안의 수다원 과 마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76, (사)법승 담마야나(2017)
마노마야잇디는 마음으로 나와 똑같은 다른 몸을 하나 더 만드는 신통지다. 만들어진 몸에 감각기능(오근) 역시 갖추어져 있다.
85.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냅니다."
-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1권 p.249, 초기불전연구원(2005)
⑤ 마노마야잇디(의소성신변)
마노마야잇디(manomayāiddhi)는... 나와 똑같은 몸과 마음을 하나 더 만드는 신통지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모습의 자신을 여럿 만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만든 또 하나의 부처님을 '니밋따 붓다(표상 부처님)'라고 합니다. 똑같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 법문이 어려워 질문하는 사람이 없으면 부처님께서 또 한 분의 부처님을 만들어서 한 부처님이 질문하고 진짜 부처님이 대답하는 그런 경우가 경전들에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비담마를 천신들의 세상에서 설하실 때에도 '니밋따붓다'를 만들었습니다. '니밋따붓다'는 신들의 세상에서 계속 설법하고 있고, 진짜 부처님은 인간 세계로 내려가서 탁발하시고 또 사리불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부처님께서 계속 앉아서 법문하시는 줄 알아요. 신들의 한 시간은 인간 세상에서는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됩니다. 신들은 잠깐 법문을 듣는데 신들은 오래 살기 때문에 잠깐이고, 부처님은 인간이기 때문에 지상으로 내려와 탁발을 하셔야 합니다. 내려올 때마다 니밋따붓다를 만드시는데 그런 신통지를 '마노마야잇디'라고 합니다. 그것도 지혜의 힘입니다.
Iddhi(신통력, 초인적 능력) + vi-(따로) + √dhā(놓다) → 신통의 여러가지 형태, 신통의 다양한 양상, 여러 가지 초인적 능력들
마치 숙련된 기술자가 원하는대로 제품을 만들어내고 빚어내듯이,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신통으로 자기 마음대로 온갖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신통 지혜이다.
87.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신통변화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합니다.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하기를 물속에서처럼 합니다.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땅 위에서처럼 합니다.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 달린 새처럼 합니다.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합니다."
-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1권 p.250, 초기불전연구원(2005)
⑥ 잇디위다(신통변화)
그 다음에 '잇디위다(iddhividhā신통변화)'입니다. 위다(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잇디(만들 수 있다, 신통지). 부처님께서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면 마음을 한 번만 먹으면 비행기가 나타나고, 사자를 만들고 싶다면 그런 사자가 바로 나타나고, 코끼리를 만들고 싶으면 코끼리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잇디위다'입니다.
이것을 'abhiññā아빈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냐나(지혜), 아빈냐(아주 특별한 지혜), 신통지를 말합니다. 신통지의 '지'가 지혜이지요. 신통이 '아비', 그래서 아주 특별한 지혜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잇디위다'를 보여 주셨습니다... 절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 부처님께서 신통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불선업을 짓지 않게끔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 오른쪽 눈썹에서는 불을, 왼쪽 눈썹에서는 물을 뿜으며, 이렇게 왼쪽, 오른쪽에서 번갈아 계속 물과 불이 나오게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물과 불을 동시에 보여 주시는 쌍신변 신통지입니다. 그때는 엄청나게 빠른 마음입니다. 계속해서 신통지로 들어가서 물을 만들고 불을 만들고, 물을 만들 때는 불이 없고, 불을 만들 때는 물이 없습니다. 계속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계속해서 왼쪽에서 물이 나오고 오른쪽에서는 불이 나오는 줄 압니다. 온 몸에서 계속 나오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동시에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처님의 온 몸에서 물과 불이 계속 돌고 있는 것입니다. 석가 족은 그것을 보고 놀라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소리를 듣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으실 수 있다. 천상이나 인간의 소리 둘 다를 멀든 가깝든 간에 다 들으신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소리를 듣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먼 곳에서 이야기해도, 천신들이 하는 말이나 우주의 저쪽 끝에서 하는 말까지도, 뭐든지 부처님께서 원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24시간 내내 듣고 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들으려고 신통력을 만들면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딥바소따(dibbasota)'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와 신통력을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시니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부족한 것은 우리가 부족한 것이다. 부처님을 만난다고 다 깨닫는 것이 아니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은 부처님을 만나도 깨닫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살펴본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도와주신다. 내가 열심히 준비해서 준비가 다 될 때 부처님을 만나면 깨닫는다. 내가 완벽하게 준비되면 부처님을 직접 안 만나고 부처님의 가르침만 만나도 깨달을 수 있다.
준비하라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당연히 윗자와 짜라나를 준비해야 한다.
윗자(지혜)와 짜라나(실천)를 부처님 만큼 삼빤노(완벽하게 갖춘)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 2가지를 갖추는 것이 '준비'다.
실천은 ① 보시, ② 계, ③ 사마타이다. 덕이 쌓일 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날 수 있다.
지혜는 ① 학습, ② 법문 듣기, ③ 위빳사나 수행이다. 지혜가 예리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났을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혜와 실천을 갖추는 것에 따라 어떻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는가?
보시와 계 등의 실천행만 구족하고 지혜를 계발하지 않는다면 다음 부처님과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여 깨닫기 어렵다.
지혜만 갖추고 보시와 지계 등의 실천행을 갖추지 못했다면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보시와 계 등의 실천행이 부족해 부처님과 만날 수 없는 악처나 부처님이 없는 시기에 태어나서 안타깝게도 깨달음의 기회를 놓친다.
이번 생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지혜와 실천 수행 두 가지 모두를 갖추어야 다음 생에서, 혹은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지혜와 실천, 두 가지 측면 모두를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야 한다.
102. ..."비구들이여, 왕은 [자신을] 해쳤구나. 비구들이여, 왕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했구나. 비구들이여, 만일 왕이 정의로운 분이요 법다운 왕이었던 아버지를 시해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이 자리에서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겼을 것이다."²⁷²⁾
²⁷²⁾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이 생겼을 것이다.'라는 것은 예류도(sotā-patti-magga)를 뜻한다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Ibid) 아자따삿뚜는 그의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만일 왕이 이런 중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부처님 말씀을 듣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예류자가 되었을 것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왕은 아버지를 시해한 뒤 하루도 편하게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이 설법을 들은 뒤로는 편히 잠을 이루고 삼보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졌다고 한다.(DA.i.238)
-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1권 p.264, 초기불전연구원(2005)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와 신통력을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니 하나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은 우리가 부족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만난다고 다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은 부처님을 만나도 깨닫지 못 합니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깨닫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르칠 때는 신통력을 사용합니다. 그 사람의 성향을 알고 필요하다면 신통력을 사용하여 가르칩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은 부처님을 만나도, 부처님과 같이 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열심히 준비해서 내가 준비가 다 될 때 부처님을 만나면 깨닫습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부처님이 아무리 잘 말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완벽하게 준비되면 부처님을 직접 안 만나고 부처님의 가르침만 만나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명행족의 덕목은 불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시사해 줍니다. 즉 부처님만큼 완벽하게 실천행과 명지를 구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두 가지 모두를 어느 정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보시와 계, 삼매는 실천행에 해당합니다. 지혜는 명지에 해당합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실천행은 팔다리와 같고 명지는 눈과 같습니다. 보시나 계, 삼매 등의 실천행을 구족하고도 지혜라는 명지가 없는 이는 팔다리는 갖추었지만 양 눈이 없는 이와 같습니다. 명지는 구족했지만 실천행이 없는 이는 눈은 갖추었지만 팔다리가 없는 이와 같습니다. 명지와 실천행, 두 가지 모두 구족한 이는 팔다리와 눈, 모두를 구족한 이와 같습니다. 두 가지 모두 없는 이는 팔다리와 양 눈이 모두 없어 '살아 있다'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이번 생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명지와 실천행, 두 가지 모두를 구족한 이라야 다음 생에서, 혹은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시와 계 등의 실천행만 구족하고 지혜를 계발하지 않는다면 다음 부처님과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다 하더라도 쉽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명지, 즉 지혜의 측면만 구족하고 보시와 지계 등의 실천행을 갖추지 못했다면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만 한다면 명지를 갖추었기 때문에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시와 계 등의 실천행이 부족해 부처님과 만날 수 없는 악처나 부처님이 없는 시기에 태어나서 안타깝게도 깨달음이라는 큰 보배를 놓쳐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좋지만 혹시 그렇지 못해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대하며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라면 보시, 계, 사마타 수행이라는 실천행을 갖추어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명지, 즉 지혜의 측면으로 교학을 배우고 법문을 듣고 더 나아가 위빳사나 수행도 하여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났을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혜와 실천, 두 가지 측면 모두를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