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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감악산-사리산 2014,07,14,구름 많음 산행거리;11.4km 산행시간;11;58-18;37 법륜사-범바위능선-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선일재-공룡바위-구름재-사리산-비룡사-양주시 남면사무소
갈때;1호선 전철로 양주역까지-역 건너편에서 25번,25-1번 버스로 환승하여 법륜사정류장에서 하차. 올때;남면 면소재지 정류장(서너 정류장이 있음)에서 25,25-1번 버스로 양주역 앞 하차 전철로 환승.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에 있는 절로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한다. 원래 감악산에는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범륜사는 1970년에 옛 운계사터에 재창건되었다. 중앙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머타전과 동양 최대의 백옥 11면 관세은보살상과 전면에는 9층 석탑과 자연석으로 세운 세계평화의 비가 있고, 절 입구에는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고 경내에는 하얀 불상이 우뚝 서 있으며, 절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는데 그 안에서 시원한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乾瀑이 된 운계폭포 감악산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가 산 중턱의 운계폭포이다. 예로부터 개성 송악산, 가평 화악산, 과천 관악산, 포천 운악산과 함께 경기 5악으로 꼽혀온 감악산은 휴전선과 약 4㎞ 밖에 안떨어져 있어 정상(675m)에 오르면 개성의 송악산까지 살펴볼 수 있다. 산세가 수려하고, 설마천을 끼고 있는 아기자기한 계곡, 높이 20m의 운계폭포(은계폭포, 비룡폭포라고도 함)가 이곳의 자랑거리이다.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운계폭포는 겨울 빙벽훈련에도 이용된다. 또한 임꺽정이 은거했다는 임꺽정굴이 있다. 인근 봉암저수지에서 바라본 감악산 정상의 암봉 또한 일품이다. 설마리쪽으로 내려오다보면 감악산입구에 있는 '영국군전투비'를 볼 수 있다. 이 전투비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설마리계곡에서 북한군과 교전중에 전사한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의 제1대대와 제170경 박격포대 장병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것이다. 주 등산로를 벗어나기 위해 법륜사를 지나자마자 부도가있는 우측으로 올라 범바위능선으로 붙는다 우측에 습지가 나타나고 세분이 작업을 하고있었는 데 우물터를 만든다고 한다
널널한 바위에서 물 한모금 마시며~~ 법륜사(1.6km)에서 올라 온 주등산로와 합류하고 얼굴바위
감악산의 높이는 675m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적성현에 속하였다. 경기 5악의 하나로, 정상에서는 임진강과 개성의 송악산 등이 조망된다. 석문 뒤엔 천길 낭떠러지 절벽
아기자기한 바위들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장군봉 정상(左) 뒤로 임꺽정봉이 보인다
감악산에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모신 감악사(紺嶽祠)가 있었으나 지금은 유지조차 찾을 수 없으며, 산 정상에 감악산비(紺嶽山碑, 일명 설인귀비)(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가 남아 있다. 이 비는 글자가 마모되어 없다고 하여 몰자비, 또는 빗돌대왕비, 설인귀사적비 등으로 불리는데, 비의 형태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와 흡사하여 진흥왕순수비로도 추정한다.
임꺽정굴 峰
임꺽정봉의 단면
임꺽정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그리고 장길산을 꼽을 정도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둑이다. 그를 의적으로 평가하면서 소설책과 영화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바위사이로 검은 빛과 푸른 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 하여 감악산(紺岳山),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렀다.
감악산은 한북정맥의 한강봉과 지맥을 이루고 있고 가평의 화악산, 개성의 송악산, 안양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지정되어 봄,가을로 국가에서 제를 지냈다. 산세가 험하고, 폭포, 계곡, 암벽 등이 발달한 파주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감악산의 서쪽 능선 아래의 파주시 적성면에 속하는 지역은 임진강 본류의 공격사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 거 기후 조건 아래에서 하천의 침식작용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사면이나 계곡 주변부에는 과거 주빙하 기후하에서 형성된 암괴류나 암괴원이 넓게 발달하여 있다. 동쪽 능선 아래의 연천군 전곡읍에 해당하는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고산지성의 산지가 남북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감악산의 동북 방향으로 정상부 바로 아래의 눌목동에는 고위평탄면과 유사한 지형이 나타나며 이곳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감악산 신라古碑 지금의 개석(蓋石)은 후대의 것이지만, 개석을 부착할 수 있도록 비신 윗부분에 凸모양의 축을 이루고 있어, 본래부터 개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현재 비문은 오랜 세월 동안 글자가 없어져 고증할 수 없는 이른바 몰자비(沒字碑)이다. 이 비를 신라고비로 추단하는 근거는, ① 비의 양식이 서울 북한산 정상에 세워져 있던 진흥왕순수비와 흡사하고, ② 『삼국사기』에 신라시대부터 고성(高城)의 상악(霜岳)·설악(雪岳), 북한산주(北漢山州)의 부아악(負兒岳)과 더불어 감악산이 매년 국가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던 명산으로 적혀 있는데, 여기에 세워진 비이기 때문이다. ③ 비가 세워진 일대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는 것도 방증이 된다. 감악산 고비로부터 북동으로 약 4.5㎞ 지점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다투던 삼국간의 혈투장이었고, 그 뒤 거란침입과 6·25남침 때 고랑포(高浪浦)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칠중성의 안산(案山 : 집터나 묘자리 맞은 편에 있는 산)인 감악산에 고려시대부터 여러 신을 모신 사당이 세워진 것은 군사적 요지이기 때문이며, 이 비를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의 사적에 부회(附會)시킨 속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감악산이 차지하는 전략적인 위치와 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역사상의 여러 사건, 비의 양식이나 크기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거의 같다 하여, 일부에서는 이 비를 또 하나의 진흥왕순수비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아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정상 갔다 되돌아 와서 구름재 방향으로 진행 임꺽정봉의 허리를 감고 돌아 구름재 방향으로 내려 선다
내려서다 뒤에서 본 임꺽정봉과 감악산 사리산마루금...독도에 어려움은 별로 없으나 중간에 삼거리가 나오는 데 좌측으로 틀고 멀리 보이는 58번 송전탑을 기준하여 진행하면 된다 두눈깔(콧구멍 같기도 하고)이 외계인 눈알 같다 ㅎㅎㅎ~~ 선일재
임도에 내려서면 양쪽에 설치된 이정목이 진행할 방향을 알려 준다 꽃길도~~룰루랄라~~ 구름재쉼터 사리산 정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