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전 나를 포함해 삼남매였을 적의 우리 집 가족사진. 아버지에게 안겨있는 내 바로 아래 남동생 영근과 어머니가 보듬고 있는 큰 여동생 영미. 저 이후로 여동생 둘이 더 생겨 지금의 2남3녀가 오남매가 됐다. 어제 대구 남동생이 보내온 것인데, 나로서는 이 사진을 생전 처음 본다.
사진 뒤에 아버지가 친필로 쓰신 글이 있다. ‘4291년 1월 가족일동기념.’ 4291년 1월이면, 저 무렵 어머니. 아버지는 두 동생과 함께 마산에 계셨고, 나는 대구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일즉 돌아가셔 안 계시니, 지금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알고 계실 것인데, 고령으로 옳게 보실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저 때 대구 외할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 가족과 떨어져 대구 외가에 있었을 것인데, 그러니 내가 사진 한 장 찍으러 마산까지 갔을리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마도 대구에서 찍은 게 아닌가 싶다.
4291년이면 1958년인데, 그 해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내 기억으로는 대구에서 입학했다가, 갑자기 부모님이 계신 마산으로 가는 바람에 거기 성호국민학교에 재입학했다. 저 사진은 그러니까 내가 갓 일곱 살, 국민학교 입학 두달 전의 사진인 것이다.
사진 뒤 아버지가 쓰신 글은 내 눈에 익다. 아버지는 글씨를 잘 쓰셨다. 제사 때마다 엎드려 아주 정성스럽게 쓰신 지방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나는 아버지가 글을 참 잘 쓰시는구나고 생각할 정도였다.
‘가족일동 기념’이라는 글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난다. 가족일동 기념이라니, 아마도 아버지는 ‘가족일동’이라 적어놓고 다음에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을 것인데 마땅한게 떠오르지 않으니 그냥 ‘기념’이라고 쓰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 글을 가만이 보면 ‘기념’이라는 말에 아버지의 보다 큰, 애환적인 의미가 담겨져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1950년대 말이면 6. 25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던 시절이다. 죽고 다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다, 생이별에 뿔뿔이 헤어진 가족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관점에서, 아버지는 그나마 가족들이 이렇게 ‘일동’으로 모여서 사진을 박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념’이 될 수 있을만한 사변으로 여길 수도 있었고 그래서 ‘기념’이라고 적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