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1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시편 37:37-38
로마서 14:17-19
너의 생명이 나의 생명
그러고 보니 오늘 9월 11일은 21년 전인 2001년 9월 11일 미국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이슬람 과격단체의 테러로 무너져 내린 비극적인 날입니다. 4기의 여객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은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항공기를 충돌시켜 두 건물이 모두 폭파되어 무너져 내리게 했고, 다른 한 대는 버지니아 주의 펜타곤 건물에 충돌하였습니다, 나머지 한 대는 승객들이 조종간을 되찾으려고 투쟁하는 바람에 목표물에 접근하지 못하고 추락하였습니다. 이 테러로 2977명이 사망하고 25,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소방관만도 340명이 순직하였고, 현장을 수습하던 공무원도 72명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테러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제 갈등으로 인한 테러도 많지만, 인종차별로 인한 테러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자주 일어납니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총격으로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전 세계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기후가 과거와 달리 크게 변하고 있는 것도 모두 환경파괴의 결과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태풍과 허리케인이 더 강력해지고, 갑작스런 집중폭우로 산사태와 홍수가 일어나 재산과 목숨을 잃고, 또 지진도 빈번하게 발생하여 대규모의 피해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가난한 지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유럽에서는 전쟁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고, 사상자의 수가 엄청난 것은 물론이고, 수개월째 전쟁 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고, 러시아는 에너지를 무기로 서방세계를 압박하고 있어서, 이번 겨울은 유럽에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911테러 21년이 지난 2022년 오늘의 현실이 이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 것 같습니까? 구약성서인 시편은 단언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류가 이대로 넋 놓고 살다가는 인류의 미래는 완전히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 8월 31일부터 추석연휴 직전까지 9일 동안 독일 칼스루에(Karlsruhe) 라는 도시에서 세계 기독교 교회협의회(WCC) 제 11차 총회가 열렸습니다. 엊그제 8일에 폐막식을 하였는데, 11차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계를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 였습니다. 9년 전 2013년 10차 총회가 부산에서 열렸는데, 그 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였고, 그 로고가 우리 설교단의 제단보와 같습니다.
총회의 논제들은 당연히 전쟁과 환경파괴 등등을 다루었습니다. 마지막 날 <기후정의 성명서>를 채택하고 전 세계 350개 회원교단 5억 8천만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여 “창조세계의 보존과 회복”을 위해 탄소절감을 실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종전과 평화구축에 관한 회의록>도 채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진행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정교회 대표들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WCC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해달라고 요구하였지만, 러시아 정교회 대표부의 강력한 반발로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대만 기독교 대표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는 워크샵을 열었고, 이에 대응하는 중국 기독교 대표부는 “하나의 중국원칙”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위크샵 공식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UN총회라고 불리는 WCC 총회 역시 UN처럼 양극단이 공존하고 있어서, 대립 상황 속에서는 어떤 일치된 결론을 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 분명합니다.
이애 대하여 좋게 말하는 분들은, 그래서 WCC는 다양성을 드러내는 장이고, 서로 다른 문제를 놓고 대화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는 곳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계점 아니냐는 비판도 거셉니다.
현실이 이렇다면, 전 세계가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전쟁과 테러를 그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막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대화의 길을 먼저 만들었더라면 혹시 이렇게 참혹하고 오래가는 전쟁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기독교 신앙의 역할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평화가 실현되지 못하는 상태를 부르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평화문맹”입니다. 평화에 무관심하거나, 자기중심적 평화개념에 사로잡혀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평화란 무엇인지 정의할 때에도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평화가 아닌 것을 정의하는 부정법(Negation)을 쓰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폭력의 시대고, 전쟁이 그치면 평화의 시대가 오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수식이 만들어집니다. P=X/Y입니다.
P는 <평화>이고 분자 X는 <공평과 조화>, 분모 Y는 <상처와 갈등>입니다. 분수의 분자에 해당하는 공평과 조화가 커지면 평화지수가 높아지고, 분모에 해당하는 상처와 갈등이 커지면 평화지수가 줄어듭니다. 그것이 폭력지수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평화가 아니라, 거기에 근접하는 평화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의 길을 가려면 “감(减)폭력”, 즉 “폭력을 줄이는” 과정을 오래 연습해야 합니다. 그때 필요한 도구가 바로 <공감>입니다.
옆에 보이는 그림은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작가인 안상수 교수의 작품입니다. 제목은 <생명평화무늬>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신의 그물”이라는 의미로 <인드라망>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래에 사람과 왼편에 조류어류, 오른 편에 포유류, 위편에 식물, 그리고 해와 달이 합쳐진 그림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의 생명은 나의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런 곳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생명이 나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14:17)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문제로 서로 다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를 두고 서로 옳다고 다투고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과 동물과 자연을 대할 때에, 모두가 “너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라는 정신으로 대한다면 거기에서 정의와 평화가 나올 가능성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평화는 그 사람의 내면의 평화가 가장 우선적입니다. “우선적”이라는 말은 가장 민감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의 평화는 영원히 독립적이 될 수 없습니다. 관계와 사회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변이 시끄러운데 나 홀로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함께 평화”입니다.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세계 최대 곡물생산을 하는 우크라이나가 생산한 곡물을 팔지 못하는 지경에 처했습니다. 뉴스에 보니 그 곡물이 아프리카 최대의 40년만의 가뭄을 겪고 있는 이디오피아 지역, 그중에서도 분쟁지역인 티그라이에 전달되었습니다. 23,000톤의 밀인데, 150만 명이 한 달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오데사 항에서 한 번 더 3만 톤의 밀이 출발했지만, 이것을 합쳐도 양동이에 겨우 물 한 방울 떨군 정도의 효과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전투지역을 피해 흑해에서 출발한 곡물운반선이 지중해로 나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홍해로 들어서는 동안 수많은 분쟁지역에서 설치한 기뢰를 피해서 운항하느라고 고생스러운 운항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런 노력이 미래의 평화를 위한 수고가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비교적 평화로운 인생을 누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남들보다 평화롭지 못한 고통을 겪으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겪는 고난이라면 그 사람의 내면이 평화로운가, 아니면 혼란스러운가에 따라 평화가 결정되겠지만, 어느 누구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폭력과 재난이 닥쳐오면, 사람마다 다른 내면의 평화는 그 순간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인류는 공동으로 평화를 연습해야합니다. 감폭력을 실천하고, 개인은 개인과 대화로 서로 공감해야하고, 국가는 국가를 상대로, 인간은 동물을 상대로, 그리고 자연을 상대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는 것이 바로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롬14:19)
WCC 11차 총회는 2040년이 될 때까지 <탄소제로>를 목표로 전 세계교회가 노력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전쟁과 테러가 인간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다면, 자연재해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불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같은 면적의 지구 위에 점점 늘어나는 인간과 인간의 소비는, 이대로 두면 언젠가 지구의 포용한계를 넘어서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우리의 미래를 살리는 생명운동입니다.
오늘 이 시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시편의 말씀과 “너의 생명이 나의 생명”임을 다시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