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면 금당실은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알려져 있고, 四槐堂고택, 추원재 및 사당,
금곡서원, 반송재고택, 양주대감 이유인 옛 집터 등이 있어 유교문화권 개발로 정
비되고 있다. 오미봉 아래 연화부수형이라 하여 연못을 상징하여 금당(金塘)이라고
한다.
금당실은 동수인 소나무숲인 쑤가 아름답다. 허리골에는 함양박씨 입향조인 박종
린의 묘를 수호하는 1600년대에 건립된 감로루가 있으며 이 감로루에는 청풍자
정윤목(약포 정탁 3子)의 현판이 있다.
십승지가 허리골이라는 설도 있다. 십승지는 兩白之間(태백산,소백산 사이)의
피병피란지로 풍기 금계촌과 용문 금당실이 있고 ,남사고가 말한 ‘금당맛질 반(半)
서울’이란 향언도 있다.
을미사변(1895년) 이후 낙향한 양주대감 이유인이 살면서부터 고관들이 자주 오
가서 그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예천군지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닭우리재(鷄鳴峴)가 앞에 있
고 개우리재(견폐현犬吠峴)이 오른쪽에 있어서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하여 금곡으로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다.(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p. 965)
금당실松林이 오미봉 아래에서 용문초등학교까지 400m에 걸쳐 하천을 따라 길게
방풍림으로 조성되어 보호되고 있고 풍수적으로 허한 곳을 보완하는 역할도 한다.
금당실에는 감천문씨 문억향(? 벽초는 억경이라 알고 있음)의 사위인 세칭 향오린
(鄕5鱗) 중 5째인 함양 박씨 박종린(1496-1553)이 함창에서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다.
퇴계 아버지인 이식의 처외사촌이며 外祖가 보백당 김계행이다. 함양박씨들은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하여 명문으로서 지위를 굳힌다. 금곡서원은 박충좌-
박눌-박손경을 배향하고 있다.
현손인 박정시(1601-1672)는 태안군수를 할 때 태랑금전설을 남기고 있다. 남야
박손경(1713-1782)은 이상정 최흥원과 함께 영남3로(老)로 불리는 대학자로 입재
정종로(1738-1816)에게 학맥을 전수한다.
역시 문억향(억경)의 사위인 원주변씨 변응령이 입향하여 5명의 대과급제자를 배
출하였다. 四槐亭터는 面사무소 자리이다. 상금곡리는 원주변씨와 함양박씨의
집성마을로서 사괴당고택은 첨주공파의 입향조인 귀계 변희리(1435~1505)의 증손
사괴당 웅녕(1518~1586)이 터를 잡았다 한다.
고택의 배치는 튼 口자형으로 정침과 양익사가 ㄷ자형을 이루면서 앞쪽에 일자형
문간채가 자리하고, 우익사 동편에 이층 대문채가 위치하고 있다. 평면구성은 정침
과 우익사에 걸쳐 세대별 구분이 명확하고 특히 수장공간의 구성이 이채로우며,
목구조의 접합기법과 창호결구수법에서 세련된 법식을 지니고 있다. 건물의 수법
으로 보아 건립년대는 18세기 전·후반으로 추정되나 조선후기 주택변천사를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이다.
하금곡 버들밭(柳田)은 400년 전 경주이씨들이 개척한 마을로 유지앵소(柳枝鶯巢)
형국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을 한 성오당 이개립의 정자가 터만
남아 있다. 약포 정탁의 태생지로 약포 외가인 경주이씨들과 예천권씨들이 세거하
고, 약포는 처가인 반씨 고평으로 이거한다.
참고로
벽초는 문억경의 맏딸이 박종린 선조의 처가 되었으며 차녀가 원주변씨 변응령의
처가 되었으니 박종린과 변응령은 동서지간이되는 것이다. 감천문씨 문억경(문억
향?)은 후사가 없어서 함양박씨와 원주변씨가 외손봉사를 하고 있다.
동지매기에 있는 문씨의 묘소는 함양박문에서 유천 수심에 있는 묘소는 원주변씨
가 맡아서 현재도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유지앵소(柳枝鶯巢)형국 : 풍수지리학에서 사용되는 지형상 모습의 특징을 말하
는 것으로 버드나무가지에 있는 꾀꼬리집 모양의 형국을 말함
★보백당 김계행은 누구인가?
경상북도 안동군 길안면 묵계리의 길안천 계곡에 자리 잡은 만휴정(晩休亭)은
김계행(1431-1521)이 조영한 정자건축이 있다.
김계행은 안동김씨로서 두 딸이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이 박눌(박종린 금당실 입향
선조의 부친) 선조님께 시집을 오셨으니 박눌의 장인이 되시는 분이고 다른 한 분
은 풍산류씨 자온(서애 류성룡 대감의 증조부)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기회에 김계행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벽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