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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례문화재지킴이 원문보기 글쓴이: goodman
거창신씨묘역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78호 (송파구)
명 칭 신선경 묘역(慎先庚 墓域)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 1,695㎡
지 정 일 1991.12.24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오금동 51
소 유 자 거창신씨 종친회
관 리 자 거창신씨 종친회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화체육과 02-410-3412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선경의 묘를 비롯한 거창 신씨들의 묘역이다.
신선경은 세조 1년(1456) 사헌부 장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거창 신씨는 원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 출신인 신수(愼修)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에 왔다가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내에 있는데, 이 가운데 신선경의 묘는 약 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정부인 한씨와의 쌍분이다. 2개의 봉분 가운데에는 묘비·상석이 있는데 묘비 윗부분이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묘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 시조 : 신 수[愼 修]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거창은 경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거열군인데 경덕왕이 거창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 때 거제현과 합하여 제창현이 되었다. 후에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1895년에 거창군이 되었다.
신씨는 중국 천수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우리나라 신씨는 1068년 개봉부 출신인 신수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수는 고려조에서 좌복야를 지내고 참지정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7세손 집평(執平)이 서해의 외딴섬인 죽도에서 몽고군에 대항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했고, 집평의 외아들 성(成)은 아버지가 죽자 정든 개경을 떠나 남쪽지방인 거창으로 내려가 살며서 거창 신씨의 시원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초에 판이주현사를 지낸 이충(以衷)이 숭록대부로 의정부 우찬성에 증직되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거창신씨의 백파(제1파), 중파(제2파), 계파(제3파)의 파조가 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이충의 아들중 장남 기(畿)는 충청도사와 이조정랑, 성주목사를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로 호조참판 겸 보문각제학에 추증되었고, 차남 언(言)은 서령을 지냈다. 한편 세째 아들 전(詮)은 예문관 직제학, 호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순충보조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거창부원군에 추봉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세종의 네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딸과 혼인한 승선(承善)은 거창신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익대삼등공신으로 거창군에 봉해졌으며, 성종 때 좌리삼등공신에 올라 동지돈령부사와 공조 판서를 지내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에 책봉되면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사위인 연산군의 폭정을 개탄하여 병을 핑계로 여러 번 관직을 사퇴하였고, 크고 작은 모든 기밀의 정무는 동료 재상들에게 일임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로 정국에 임하여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능하다고 희롱하였다.
영의정 승선의 아들 수근(守勤), 수영(守英), 수겸(守謙) 3형제는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의 정치일선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중종반정 주역들의 보복으로 모두 피살되는 불운을 맞았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수근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수근의 아우 수영(守英)도 형조판서에 이르러 중종반정에 화를 입었고, 막내 수겸(守謙)은 당시 개성 유수로 있다가 박원종이 심복을 보내 거사할 것을 권유했으나 "우리 형제의 마음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내형에게 물어보라" 하였다가 반정 후에 박원종이 보낸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예조참의 후갑(後甲)의 아들 자건(自健)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교하로 내려가 서예에 전심하여 필명을 떨쳤으며, 특히 왕희지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였고, 창덕궁의 <요금문> 3자를 썼다.
회의 현손 천익(天翊)과 해익(海翊)은 쌍둥이 형제로 유명했는데, 그의 어머니 이씨의 태몽에 학 한 쌍이 날아와 팔에 안겼다가 한 마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날아갔다고 하여 쌍둥이의 이름을 천익(天翊)과 해익(海翊)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중 천익은 효종때 부제학과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한성부윤으로 치사했으며, 해익은 광해군 때 알성시에 장원한 후 예조좌랑을 역임하여[상보민편]을 저술하고 학행이 뛰어났던 후손 무(懋)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 신씨는 남한에 총 9,616 가구, 40,013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릉리,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전북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경남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4. 주요 유적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공원 내 시조 묘역(서울유형문화재 제78호).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19 조선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의 온릉(사적 제210호).
5. 폐비 신씨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정비로 1472년(성종3년 )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신승선, 오라버니는 신수근, 조카가 조선 제11대왕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이다.
왕비의 본명은 역사에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연산군보다 4세 위였던 신씨가 세자빈에 책봉된 나이는 10~ 11세 정도였다.
연산군은 1506년(연산군 12년) 9월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훈구세력이 주도하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폐왕이 되어 국왕 즉위 이전 왕자의 신분인 연산군으로 격하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로 귀양 갔다가 역질에 걸려 그해 11월 6일 31세로 병사하고 말았다.
연산군은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5남 1녀를 낳았고 후궁 소생으로 2남 1녀가 있었다. 그들 중 휘신공주는 능양위 구문경에게 출가했고 서녀는 신거홍의 후취로 들어갔으며 나머지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가 1512년(중종 7년) 12월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줄 것을 상언하여 이듬해 2월20일 오늘날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번지인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로 이장했다. 이때 중종은 이장을 윤허하면서 왕자 군의 예에 따라 개장하라는 어명과 함께 이장 경비로 쌀과 콩 100섬, 면포 150필, 정포 100필, 꿀 2섬, 참기름 2섬, 밀가루 4섬, 황랍 28근을 하사했다.
연산군의 묘역은 능성 구씨인 사위의 선영으로 연산군의 딸과 사위도 이곳에 묻혀 있으며 폐비 신씨도 1537년(중종 32년) 연산군 옆에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다.
6. 중종반정
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 박원종이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 ·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중종반정의 결과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제도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488년(성종 19년) 3월 5일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중종의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중종은 7세 때인 1494년(성종 25년)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2세 때인 1499년(연산군 5년) 좌의정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신씨는 중종보다 1살이 많은 나이였다.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의 아들로서 연산군의 정비 거창 신씨의 오빠였으므로 연산군의 처남이 된다. 그러므로 연산군의 정비 신씨와 중종의 정비 신씨는 친정에서는 고모와 조카 사이이고 시가에서는 동서간이 된 셈이다.
7. 단경왕후 - 7일 만에 뒤바뀐 운명, 왕비 신씨의 폐위
“신수근은 반정을 반대한 자로서 폐세자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사오니 그는 역적이로소이다. 그는 비록 죽었으나 그런 역적의 딸을 중궁으로 처하시게 함은 실로 도리에 어긋난 일이오니 즉시 폐위하시와 나라의 혈통을 바르게 하시옵소서.”
당시 기세가 등등하던 공신들의 말을 중종과 대비로서는 무마할 힘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고 아끼는 며느리를 억지로 폐출해야 했다.
중종의 왕비 신씨는 반정 때 피살된 전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요, 중종의 장인으로서 반정에 가담치 않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 공신들은 중종이 등극하자 곧 왕비 신씨의 폐출을 주장하였다. 그 아비는 죽이고 그 딸은 중궁으로 섬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경왕후는 왕비에 책봉된 지 7일 만인 9월 9일 폐출되어 궁 밖으로 나갔다. 폐비 신씨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서 잠깐 머물다가 별궁 죽동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씨는 13세에 한 살 아래인 진성대군과 혼인했으며,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이 되자 왕비에 올랐다가 7일 만에 폐비될 때는 20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비록 7년만의 짧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이들 부부는 유달리 금실이 좋았다고 한다.
반정하던 날, 반정 세력은 왕으로 추대할 진성대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먼저 군사를 보내어 진성대군의 사저를 에워쌌다. 그런 줄을 모르고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자 진성대군이 놀라서 자결하려고 하자 부부인 신씨가 진성대군의 옷소매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군사의 말머리가 이 집을 향하고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하오나, 만일 말꼬리가 집을 향하고 머리가 밖을 향해 서 있다면 반드시 대군을 호위하는 뜻이오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내보내어 살피고 오게 했더니 말머리가 과연 밖을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공신들이 상의하기를, “이미 부인의 아버지를 죽였거늘 딸을 왕비로 놓아두면 우리에게 무슨 보복이 올는지도 모른다.”하고 마침내 폐비하기를 청하니 중종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폐비 신씨를 별궁에 두고 모화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는 꼭 말을 모화관에서 멀지 않은 그 별궁으로 보내어 먹이게 했고, 폐비 신씨는 흰죽을 쑤어 손수 말을 먹여 보냈다고 한다.
중종은 신하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사저로 폐출하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정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때나 조석을 들 때나 매양 신씨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고, 폐출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마다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리도 솟아오르는 그리움이 더욱더 짙어만 갔다. 마침내 신씨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던 젊은 중종은 그녀가 나가 있는 집이라도 바라보리라는 일념으로, 자주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다고 한다. 인왕산 밑에 죽동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신씨는 집 뒤쪽에 있는 큰 바위에 자신이 궁중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눈에 띄게 덮어놓았다고 한다. “전하, 신첩이 여기 있사옵니다! 신첩은 아직도 전하를 잊지 못하옵니다!”라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중종은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전설로 전하는 치마바위는 신씨의 치마를 둘러놓던 바위라고 한다.
왕비 신씨가 폐출된 후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을 간택하여 숙의로 삼았다가 곧 왕후로 책봉하니 그가 바로 장경왕후이다. 그녀는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은 후 25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경왕후가 하게하자 왕비 자리는 다시 비게 되었다. 그때에 숙의 박씨에게는 자신의 소생인 복성군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가 원자보다 위였고 숙의 박씨 또한 후궁에서 가장 총애를 받았으므로 엉뚱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자 같은 해 8월에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 상의하기를. “원자는 강보 속에 있는데 박숙의가 후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고, 게다가 아들이 있다. 만약 성종 때 비를 폐하고 자순대비가 후궁으로서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전례를 따라 박숙의를 정비로 책봉한다면 원자의 처지가 곤란하게 될 것이니, 신씨를 복위시켜 무고하게 쫓겨난 것을 설원하고 동시에 첩을 아내로 삼을 수 없는 의리를 밝힘으로써 은혜를 온전히 하고 후궁이 노리는 것을 막는 것이 낫겠다.” 하며 폐비된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왕이 재야에 국정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구언교지가 내려지자 바로 상소하여 폐비된 신씨의 복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논의는 오히려 공신들의 모함을 받아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고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 새 왕비가 되었다. 그녀가 문정왕후인데, 그녀의 자태는 비록 아름다웠으나 성질이 매우 앙칼스러워 그로 말미암아 전비 소생인 인종의 수명까지 단축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폐비 신씨는 불우한 한평생을 사저에서 보내다가 72세로 하세하였다. 신씨의 복위 문제는 이후 사림세력들 내에서 그 부당함이 계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현종 대에 이르러서는 이단하의 상소를 계기로 신씨의 신주를 신씨 본손의 집으로 옮기고 제수를 내려주며 묘지기 7호를 두게 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복위문제는 계속 거론되다가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