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위안 여행7 - 걸어서 샤오치촌(효기마을) 마을 골목을 구경하며 장건과 실크로드를 떠올리다!
10월 24일 우위안 婺源(무원)의 리캉 李坑(이갱) 마을에서 숙소 사장의
차를 타고 출발해 왕구촌 (汪口村) 을 조망하고는... 장쩌민 주석의
선조들이 살았던 강씨 집성촌 마을 장완전 江弯镇(강만진)에 도착합니다.
장완전(강만진) 의 오래된 마을 골목과 향현원 정원 까지 구경하고는 차로 10분을
달려 샤오치 晓起 (효기) 에 도착하니 마을 입구에는 큰 패루 牌樓 가 보입니다.
패루 는 커기도 하려니와 문에 새겨진 조각이 섬세한걸 구경하고는 마을로
들어가서는 오래된 옛 저택인 禮耕堂(예경당) 을 구경하고 나옵니다.
샤오치촌(효기마을) 도 오래된 옛 동네라 골목이 좁은 탓에 짐을 운반하는 리어카도
매우나 작은데..... 골목 안에는 특히나 국화주 를 파는 가게들이 많이 보입니다.
긴 장랑(長廊) 으로 들어가 어느 가게에 진열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책을
보고는... 옛 북송의 수도 인 카이펑(개봉)의 번화한 저자 를 떠올려 봅니다.
BC 2세기 한나라 무제때 장건 이 서역 을 다녀오면서 호두, 배, 은행, 생강,
계피, 차, 백반, 설탕, 장뇌, 석류, 포도, 깨, 콩, 오이,
마늘, 녹두, 시금치, 당근, 무화과 와 파 가 중국에 들어온걸 떠올립니다.
그런데 서역 에서 들어온건 저런 채소와 과일 외에도 대원국의 말, 코뿔소, 사자,
코끼리, 타조, 흑소, 사냥개, 원숭이, 앵무새, 공작, 검은 담비에다
유리, 보석, 산호, 호박, 상아, 대모, 진주, 코뿔소 뿔에 향료 등이 있는데....
반면에 중국에서 서역으로 간 것은 비단, 도자기, 거울, 철기 제련술, 관개술,
종이 제지술에 나침반과 화약이니..... 실크로드 라 불리는 교역로 입니다!
이런 서역의 생물들이 중국에 들어온건 한나라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대월지와 동맹 을
맺고자 장건을 서역에 파견한데서 유래하는데.... 그 전에 한무제는 사랑하는
이부인의 오라버니 이광리 (李廣利) 를 중용하니 대완국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흉노 정벌 3만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임명하니 출진하지만 무능한지라 포위당합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부하 장군 이릉(李陵) 은 5천으로 3만 흉노군과 목숨을 걸고 싸워서는
군대의 퇴로를 열어주고 자신은 기진맥진해 포로가 되니 투항 하는데 이런 이릉 을
홀로 변호한 사마천 은 무제의 노여움 을 사게 되고 결국 궁형(宮刑) 을 받는데...
한무제로서도 패전의 책임을 "사랑하는 위부인의 오빠에게 물을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장건 은 흉노에사 탈출해 재차 서역으로 가서 오손국 을 찾으니“오손 (烏孫)” 왕 곤막은
한나라에 답례 사절을 보내 우호를 맺는데, 오손에서 바친 말에 반해 “天馬(천마)”라
이름 붙인 한무제 는 너무 기분이 좋아 왕소군 보다 72년이나 앞서 한나라 공주 세군
(細君) 을 시집보내는데, 이 정보를 접한 흉노는 흉노 여인을 오손국 왕에게 출가 시킵니다.
細君(세군) 의 부친은 황족인 江都王(강도왕, 항주) 유건 으로 부친상 중에도 부왕의
미녀들과 정을 통했다는 난봉꾼 으로 궁녀를 양이나 개와 교접하게 했다는 인물인데
너무 심심해서 말과 나귀를 교접 시켰더니 몇달후 암컷 나귀 가 四不像(사불상) 을
낳았으니 나귀 보다 더 크고 힘이 셌다는데 오늘날 다른 이름으로는...“노새”입니다!
유건 은 황제가 되려고 BC 121년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참수되고 부인과 자식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나라는 몰수당해 廣陵郡(광릉군) 이 설치되었는데... 당시
細君(세군) 은 너무 어린데다가 소녀니 숙조부인 한 문제 가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렀는데“물에 비친 고운 꽃,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버들” 같이 여렸다고 합니다.
높은 산맥과 사막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서역 오손에 도착한 한나라 공주 양주미인 세군 은
오손 왕에게는 이미 왕비 가 있으니 후처 로 들어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라 악기 비파 를
만든 여인 답게 悲愁歌(비수가), 일명 황곡가(또는 백조가) 라고 불리는 시를 지어 부릅니다.
우리집이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모서리요
멀리 다른 나라에 의탁하니 오손왕이로다.
궁려는 방이 되고, 전은 담이 되었으니,
고기는 음식이요 낙은 장이로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함이여 마음이 슬프니
黃鵠(황곡, 백조) 이 되기를 원함이여 고향으로 돌아감이로다.
오손 왕은 부인 세군을 자기 손주인 岑陬(잠추) 에게 재가 시키는데 세군이 유교 도덕으로
고민하자 한무제 는 친히 편지를 보내“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나라 습속을 따르라”니
결혼하고 새 남편은 오손왕위에 오르니 그녀는 허약한 체질 이라 少夫 (소부) 라는 딸을
낳고 죽자 잠추 왕은 다시 요청해 한나라 초왕 유무의 손녀 解憂(해우) 공주 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오손왕 잠추가 흉노 공주 곤미도 부인으로 맞아 泥靡(니미) 라는 아들을 낳으니 딸
뿐인 해우 공주 는 어려움을 겪는데 왕이 죽고 니미 왕자는 어린지라 왕족 옹귀미 가
왕위를 잇고는 부왕의 두 비를 아내로 물려받으니 해우는 세명의 왕자와 2명의 딸을
낳는데 아들 원귀미가 태자 가 되니 흉노의 공격 을 한나라가 원군을 보내주어 물리칩니다.
아들이 왕이 되어 아버지의 여자들을 물려받는걸 오랑캐 풍습 이라고 할수도 있으나 부인인
젊은 여자를 죽여서 무덤에 묻는 순장 이나, 부인의 머리를 깍아 절에 보내 감시 를
받으며 평생 억지로 비구니 노릇을 하게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 이니 늙은 오손왕
곤막이 후처가 된 한나라 공주 세군을 젊은 후계자에게 시집을 보낸 배려 가 인상적 입니다.
그런데 옹귀미가 죽자 오손인들은 태자 원귀미 를 제치고 흉노 공주 아들인 泥靡(니미) 를
왕으로 세우자... 해우 공주 는 살기위해 새 왕 니미에게 3번째로 재가해 아들 저미를
낳는데 흉노 부인 곤미의 냉대로 굴욕을 참지 못해 반란을 도모 하다가 왕에게 부상만
입힌지라... 해우는 한의 사신과 함께 적곡성에서 포위되어 처절한 전투를 감내하게 됩니다.
이에 한나라 서역도호 정길조 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포위를 풀고는 화의 를 모색하니
다친 왕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한의 사신을 참수하는 선에서 수습하는데.... 이후
흉노 공주의 아들 오취도 가 부친을 죽이고 왕에 오르니, 한나라는 파강장군의 군대를
보내는데 해우의 시녀로 오손국 우대장과 결혼한 馮嫽(풍료) 가 나서 타협을 주선 합니다.
오손(烏孫) 을 2개의 나라로 나누어 한나라 해우가 낳은 아들 원귀미는 6만호 대곤미 를
맡고, 흉노 곤미의 아들 오취도는 4만호 소곤미 를 맡는 대타협으로 평화 를 이루게
되는데... 이후 원귀미가 죽고 손주 성미가 잇자 해우 공주는 BC 51년 70세로 장안 으로
귀향 하는데 오손은 이후 유연에 패해 서쪽으로 이동해 “카자흐”로 부족 이름을 바꿉니다.
샤오치 晓起 (효기)촌 집들도 검은 기와에 흰 벽인 휘주 건축양식 인데 어느 집에 공산당
자료들이 보이기로 떠오르는게 있으니 개헌으로 장기집권하려는 시주석을 시황제 로
부른다는데 중국은 공산당 대표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건 중국은 공산당이 먼저 생기고
이 공산당이 군대를 조직했으며, 군대가 국민당을 격파해 나라를 세운 역사에서 기원합니다.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19차 회의가 몇년전에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되었는데...
각 지방 당원 중에서 추천-심사-선출 과정을 거쳐 2280명의 당대표 를 선출한후
당 대회를 열어 당 중앙위원회 위원 205명 을 뽑았는데,‘차액선거’라는 방식으로
중앙위원을 뽑았으니 222명의 후보가 제시된후 이 가운데 17명(8%) 을 탈락시킨 것입니다?
당중앙위원회 는 중국의 권력 기관을 이끌 정치국 위원 25명을 선출하는데
시 총서기를 포함한 최고지도부, 즉 상무위원 7명 이 포함되니.....
앞서 중앙위원 선거는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은 비밀투표 형식을 갖췄지만
정치국 위원 선거는 공개석상에서 중앙위원들이 손을 드는
공개투표로 중국 공산당원은 8,876만명 이니 13억 인구 중에 7% 정도 입니다.
당대표로 뽑힌 2,280명은 0.00017% 에 해당하는데 마오쩌둥(毛澤東) 은 민주집중제 에
대해 소수가 다수에게 복종하고, 개인은 집단에 복종하고, 하부는 상부에 복종하고,
전(全) 당은 중앙에 복종 해야 한다고 했으니 내가 뽑지 않았더라도 총서기
에게 복종해야 하고 총서기는 그 권력으로 인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라는 것 입니다.
그러고는 골목을 걸어 마을을 빠져 나오는데 골목을 다 나와 큰 길에서 보자니
산에서 내려오는 관광객 들이 있으니..... 그럼 좀 전에 성황당 비슷한
곳에서 산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이 빙 둘러서 이쪽으로 내려오는 모양 입니다?
이제 효기촌 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는데 어느 가게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가 덩리쥔
(등려군) 의 목소리이지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손효림씨가 D 일보 신문에
쓴 기사 “달빛 처럼 세상을 껴안은 등려군의 목소리” 라는 글이 새삼 떠오릅니다.
노래소리를 듣고 등려군 생각을 하며 서성이다 보니 오늘 하루 너무 빡세게 돌아다닌지라
몸이 피곤하니 처음 생각했던 무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江岭(강령) 마을은 단념 합니다.
하지만 전원 마을이라는 上晓起村 (상효기촌) 만은 보러 가자고 해야 하는데
피곤하기도 해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만 대기중인
우리 호텔 사장이 모는 차를 타고는 남쪽으로 달려 왕구촌 (汪口村) 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