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부처와 깨닫지 못한 중생의 차이점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중생은 4 가지의 상(相)을 낸다." 라고
간명하게 요약하여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다.
첫째는 아상(我相)인데, 이것은 아만을 뜻하는 것으로서 내가 남보다 잘났다는 것을 뜻하지만,
불교공부에서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는 인상(人相)인데, 이것은 윤리적인 것으로서 자기 자신은 최소한 이런 정도의
인간으로서의 매너는 있다. 라고 자부하는 것을 뜻하지만,
불교공부에 있어서는 자신은 계율을 잘지킨다는 것을 자부하는 것을 뜻한다.
셋째는 중생상(衆生相)인데, 이것은 자비심에 대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은
유정물(有情物)의 목숨을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부하는 것을 뜻하지만,
불교공부에서는 모든 중생을 자비심으로 대할 수 잇다고 자부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는 수자상(壽者相)인데, 이것은 자신은 목숨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언제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것으로서,
불교공부에서는 영원불변하는 열반을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것을 뜻한다.
<금강경> '제3 대승정종분'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있는바 일체중생의 종류인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을 내가 다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그들을 다 멸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되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무비 역)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보살은 위의 4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고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은 부처는 위의 4상이 없다는 것이며, 깨닫지 못한 중생은 위의 4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상(相)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은 무엇인가 남 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아만심을 가지고 수행을 하거나 교화를 하거나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바른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불교의 이 같은 가르침과 비슷한 뜻을 가지는 내용이 기독교에 있는데,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사랑'을 설명한 제법 긴 문장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사랑은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오래 참으며 ...> 등등으로
길게 설명한 내용이 바로 그것인데, 이 또한 그것을 자신의 상(相)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을 알고있는 것이 아니며 참사랑의 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불교는 4상을 통하여 일깨우고 있다 하겠다...^^
출처: 참선과 영의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