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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월(23년)/새터민 신학생 과제 < 11월 과제 >
49.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이다
열왕기하 5:1-10.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다. 성경은 그가 왕하5:1"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다. 이 말은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권력의 실세에 앉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아만은 그냥 어떻게 운 좋게, 혹은 '빽'으로 높은 자리만 차고앉은 사람이 아니었다.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으로 자신의 주인인 아람 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이다. 나아만 이 하나님에 대해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와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풀 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성공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경우가 있다. 나아만은 처음엔 몰랐지만 하나님을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왕의 총애를 받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그 나아만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문둥병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의학용어로 '한센병' 이라고도 불리는 이 무서운 병에 걸리면 피부가 흉하게 일그러지고 감각을 잃기 시작 한다.
당시 의학으로 이 병은 치료가 불가능 했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기에 환자들은 짐승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로 생긴 병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권력자 나아만이 덜걱 그 병에 걸려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던 곳에서 구원의 길이 열렸다. 이스라엘과 전쟁하던 중에, 아람군이 포로로 잡아온 이스라엘 출신 여인종이 나아만의 아내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졸지에 타국으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으니, 이 여인종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딱한 처지였다. 아람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있었고, 아람군대의 총사령관인 니아만을 향해 속으로 칼을 갈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인인 나아만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그냥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자기가 모시는 나아만의 부인에게 한마디 했다. 이 계집종은 이스라엘에 있을 때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의 많은 이적들에 대해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주인의 병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아만의 구원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한 노예 소녀에게서 시작되었다. 사실 나아만은 “그깟 여종의 말을 가지고 하고” 흘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직 몰라도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그냥 넘길 말에도 심각하게 반응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게 선택받은 사람의 증거다. 야성의 부름처럼 이상하게 하나님과 관련된 얘길 들으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끌린다.
그러니까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하나님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여종처럼 지나가는 말로라도 항상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누군가가 어떤 타이밍에 그 말을 붙잡고 살아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아만이 아람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도움을 청하자, 왕은 기꺼이 나아만을 돕기 위해 나선다. 나라에 그토록 큰 공을 세운 능력 있는 신하를 살리기 위해선 못할 것이 없었다. 즉시로 은 10달란트와 금 6,000개와 의복 10 벌을 나아만에게 주어 이스라엘로 가게 했다. 아람 왕은 그야말로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나아만을 고쳐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왕은 또한 이스라엘 왕에게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 주소서” 라는 간곡한 편지도 보냈다.
하지만 협조를 구하는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크게 당황한다. 편지를 읽자마자 자기 옷을 찢으며 외쳤다. 당시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던 병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병을 고쳐 달라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 달라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나아만 같은 라이벌 국가의 중요한 신하의 문둥병을 못 고쳐 낼 때는 그 엄청난 책임을 어떻게 물것인가? 당장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불가능한 숙제를 자기에게 던짐으로써 전쟁할 핑계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엘리사를 생각했을 것이다. 당장 생각이 안 났다 해도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해 주셔서, “과연 우리 땅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고 나아만을 안내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 앞에 얼마나 권위와 위염이 섰겠는가? 하지만 영적으로 메마르면 위기 상황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되어 있다.이 일을 통해 제자들이 폭풍 속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말을 하였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믿음이 없으면 유령이 보인다. 믿음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면 주님이 보인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존재를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상대의 의도를 곡해하여, 트집 잡아서 전쟁하자는 것인 줄 알았다. 당신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당신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성령의 엄청난 능력을 결코 잊지 말라. 마침내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이 이런 못난 짓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혀를 찬 엘리사가 사람을 왕에게 보냈다. 못난 모습을 보인 이스라엘 왕과 비교할 때 이 얼마나 의젓하고 당당한 태도인가?
8절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평안하다. 당당하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 앞에 주눅 들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엘리사처럼 당당하게 그 문제를 내게로 보내라고 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는 거룩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결코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다. 엘리사는 이 위기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영적으로 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참 선지자의 존재는 참 하나님의 존재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우상으로 가득한 아람 사람들에게 그 어떤 존재도 인생의 위기 앞에서 무력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로 추정된다. 따라서 요단 강과는 어느정도 떨어진 곳 32 km 정도)이었다. 또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심을 이방인 나아만을 통해 알게 할 것입니다’ 혹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나아만을 구원하셔서 참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적용: 날마다 회개하며 주께 나아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안에서 회복되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신 우리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회개와 회복안에서 승리하며 나아갑니다.
50. 여호와의 복병
역대하 20:20-23.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들에게 나아간다. 그때 여호사맛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20절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 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나님께 향하는 믿음을 갖고 전장에 나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여호사맛이 얼마나 라운 믿음의 소유자인 지확인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여호사맛은 백성틀과 의논한다. 그래서 택한 것이 무엇인가? 얼핏보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을 택한다. 그들은 21절에는 "노래하는 지들을 택 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 하도다 하게 한"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군대 앞에 정예 부대를 세우는 게 아니라 찬양대를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찬양대는 갑옷을 입은 게 아니라 거룩한 예복 즉 세마포를 입었다. 그리고 그들이 부 르는 찬송은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라"다. 결코 정 상 적인 전술이라할 수 없다. 패전을 자초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이런 모습을 보고 적들도 너무 어이 없고 기가막혀 혀를 꿀꿀쳤을 것이다. 그런데 결 과는 어떠한가? 패한 것은 유다가 아니고 적들이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한찬양대가 찬양을 시작하자마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들은 서로 죽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멸한다. 유다 백성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적군의 시체들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은 어이없게 끝난다. 유다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다시 찬양한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 즉 “축복”의 골짜기라고 한다. 그 참혹한 전쟁터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복스러운 장소로 변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의 대하여 혹자는 여기서 ‘복병’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또는 군대, 특히 은밀히 활동하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복병’(히브러어로: 메아레빔)은 잠복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하늘의 군대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유다군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유다 군대는 전혀 싸울 채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복병은 동맹군의 일부, 즉 세일 산의 거민들일 가능성이 크다. 세일 산 사람들은 매복하는 기술에 능란했다. 그들은 암몬과 모압을 치고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이를 먼저 알아 차리고 세일 거민을 먼저 진멸시킨 것 같다. 그리고 암몬과 모압도 동일한 이유로 의심을 갖고 서로 격전을 벌여 피차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서로 공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사사기 7:22에도 기록되어 있다.
적용: 날마다 회개하며 주께 나아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안에서 회복되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신 우리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회개와 회복안에서 승리하며 나아갑니다. 나의 복병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복병이 되시는 주님께서 앞서가시어 모든 것을 형통하고 평탄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51. 참 이스라엘 사람
요 1:47-51.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베드로 안드레와 한 동네에 살고있는 빌립은 예수의 제자가 된 뒤 나다나엘을 찾아가 여러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이 나사렛 예수임을 증거하였고, 빌립은 예수가 처음 두제자들에게 한 것처럼 "와 보라"는 말로 그를 초청한다.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께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것이 없도다" 라고 말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이 간사한 인물 이었던 것에 대하여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간사 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칭찬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칭찬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이에 예수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여 자신이 나다나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그 속미음을 알고 있는 것 이다. 빌립과 나다나엘 모두 메시아를 고대하던 사람이었음을 보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고대하면서 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모든 것을 다 따악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한마디에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 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가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임을 고백한다. 이렇게 자신을 메시아로 고백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는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더 큰일이란 예수가 앞으로 행할 표적을 말할 수도 있고 예수의 신적 본질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후자를 뭇한다면 다음 절 에 있는 예수의 자기 계시가 더 큰일이 될 것이다. 이제 예수가 단순히 다 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인물 차원을 넘어 제자들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랴"는 것이다. 먼저, 여기서 예수는 나다나엘과 밀하고 있지만 "보리라"는 동시는 2인 칭 복수를써 '너희가 보리라"고 한다. 이것은 이 말씀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2인칭 복수로 대별되는 신앙 공동체에 해당된다는 의 미다. 또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인재라고 소개하는데, 문자적인 뜻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지만 구약성경의 전통과 요한복음의 용례로 볼 때 여기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천사가 인자인 예수를 기점으로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꿈 을 문 다음 야곱은 그 계시의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했다. 이제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로 대체된 것이다.
예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 하는 유일한 사다리요 중보자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새 포도주요 새 성전이요, 새 이스라엘로 나타나 듯이 그는 새 야곱의 사닥다리인 것이다. 그리고 나다나엘의 거짓없는 믿음에 대하여 유사한 딤후 1:5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기원한다고 했다. 진실한 사람은 이 처럼 사람을 기쁘게 한다. 어떤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진실의 빛이 퇴색해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며 용기를 준다. 육체에 할례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람이 참 이스라엘인 것이다.
적용: 날마다 회개하며 주께 나아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안에서 회복되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신 우리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회개와 회복안에서 승리하며 나아갑니다. 육체로 심는 것과 영적으로 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52.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마27:20-26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은 사형에 처하기로 가결하고 이를 성사 시키기 위해 그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27장 1절의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은 마태복음 26장 3절에 언급된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려는 의도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그들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그러나 27장 2절에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반드시 사형에 처하되 유월절 기간만은 피하고자 했던 의도가 빗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종교지도자들의 치밀한 음모는 빗나가고 오히려 그가 유월절 기간중에 십자가에 처형되기 위해 배반을 받을 것이라고 한 예수님의 예언이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이 재판을 언급하기 정레 유다의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함으로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을 무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밭을 예레미아의 예언 성취로 돌림으로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구원의 혜택을 예고한다.
본장에서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과 십자가 처형 판결할 때에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의 재판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확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은밀한 왕권 행사를 나타난다. 먼저 예수님의 무죄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주목해보자. 첫째, 빌라도 자신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애게 넘겨준 것은 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둘째,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많은 고소를 받았지만 전혀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그가 크게 놀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셋째,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다. 넷째, 그는 유월절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다. 다섯째,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 언도를 내리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다. 여섯째, 바라바를 석방시킬 것을 요구한 모든 백성은 에수의 피를 그들과 자기들의 후손이 책임질 것이라고 함으로 예수님의 무죄성을 시인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무죄성을 보여주는 요소가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그의 죄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고난이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예수님의 단 한마디 답변과 본문에서 두 번 사용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성격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은밀하게 역설적인 방법으로 그의 왕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유일하게 한 한마디의 말씀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네가 말하였도다”는 것이다. 이 답변은 빌라도가 친히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사실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산헤드린 법정에서 모든 고소에 대하여 완전 침묵을 지키다가 그의 메시 신분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그의 입을 연 것과 같이 빌라도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제시하는 수없이 많은 고소애 대하여 완전 침묵을 하는 것과는 큰 다조를 이룬다. 자신의 왕 적인 신분을 인정하는 단 한마디 말씀과 모든 고소에도 불구하고 완전 침묵하는 모습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신분과 자격으로 그의 역설적인 왕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빌라도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후에 그를 십자가에 처영하도록 내어주었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고난받고 범죄자를 대신하여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율법에 있어서 매질은 40대로 제한되어 있으나 로마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힘이 있는 대로 때리고 싶을 때까지 때렸다. 특히 매질에 사용되던 채찍은 유대인들처럼 막대기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된 동물의 가죽 끝에 뼈조각이나 납덩이를 붙여 만든 짧은 형태의 것이었다.
죄인은 옷이 벗겨진 후 기둥에 꽁꽁 묶여졌다. 매질이 가해지는 동안 죄인의 몸에서는 피가 분수 같이 뿜어 나오고, 뼈가 드러나 보일 뿐 아니라 내장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매질은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전에 힘을 빼는데 사용되곤 하였다. 예수는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채찍질을 당하셨다. 따라서 판결이 내려진 뒤에는 반복되지 않았다. 만일 채찍질이 반복되었다면 예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여하튼 빌라도는 몇 마디 더 심문한 뒤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이로써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 좀더 구체적으로 실현되게 되었다. 저자와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예수께서 멸시와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왕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만일 예수님이 무력을 통해 그의 왕권을 행사해야 참으로 왕이라고 했다면, 그는 결코 유대인의 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왕권은 고난을 통해서 은밀하게 행사되는 역설적인 왕권이기 때문에 그가 받은 멸시와 천대는 그가 참으로 고난을 통하여 왕의 능력을 나타냐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2번 사용된 27장 29, 31절의 동사인 “희롱하다”와 “십자가에 처형하다”는 단어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예언에 등장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예수께서 당하는 일이 전혀 예상밖의 일이 아니라 그가 친히 예언한 사건의 점진적인 성취임을 잘 알고 있다.
적용: 날마다 회개하며 주께 나아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안에서 회복되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신 우리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회개와 회복안에서 승리하며 나아갑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참여하는 마음으로 대림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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