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더 좋은 편을 택하자”입니다.
경상도 출신 초등학교 교사가 서울로 발령을 받아 수업을 했습니다. 과학시간에 "연못 속의 작은 생물들"이란 단원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생물들의 그림을 보여주며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연못 속에 작은 생물들이 억수로 많제, 그쟈?"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며 "선생님! 억수로가 무슨 말입니까?”하고 물으니 선생님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것도 모르나? 쌔비따는 뜻 아이가?" 아이들이 또 눈을 깜빡거리며 되묻습니다. "선생님, 쌔비따는 말은 무슨 뜻인데요?"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선생님은 약간 화가 났습니다. "그것은 수두룩 빽빽! 하다는 뜻이야, 다시 말해서 항거석 있다는 말이다. 알건나.” 이해를 못한 아이들은 선생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수두룩 빽빽과 항거석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했는데도 아이들이 이해를 못하자 화가 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쪼맨한 연못 속에 작은 생물들이 천지 삐가리다 이 말 아이가! 이 문디 짜슥들아“
성경에 마리아란 이름의 여성이 억수로 많이 등장하는데 같은 여인이 아닙니다. 천지삐가리 정도는 아니지만 쌔빘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가버나움에 사는 마리아 등 대략 여섯 명의 마리아가 나옵니다. 영어로는 메리입니다. 동네 강아지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이 길 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갔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베다니라는 마을에 들린 것을 말합니다. 그곳에 사는 마르다라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요11장에 기록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동생들로 마르다는 오빠가 죽었다고 기별했을 때 예수님이 빨리 오지 않았다며 원망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그 일은 본문보다 뒤에 일어난 일로 예수님이 두 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이고 본문은 나사렛과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시다가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에게서 아주 대조할 만한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고 음식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그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들어간 것입니다. 적게 잡아도 장정만 13명 이상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 이렇게 바쁜가 보니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황당한 상황, 동생의 어이없는 행동에 대해 따끔하게 고쳐주시길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동생이 나 혼자 일하는 것을 돕도록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이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먼저 우선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은 대답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즉 손님 대접하느라 바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이 더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할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도 준비해야 하지만 영적인 일에, 영의 양식을 먹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해야 하지만 이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좋지만 이것이 더 좋습니다. 그것보다는 이것을 더 우선순위에 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분주하게 힘써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하나님을 섬겨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게 더 우선순위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 듣고 순종하며 기도하는 것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빠서 허둥대지 않게 하나님께서 일의 순서도 조절해주십니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부터 해야 다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채워집니다. 주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가 필요했고 그래서 언제나 기도를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그리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방법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일을 할 줄 아는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순서를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차를 정비할 줄 안다는 것은 고장 난 곳을 찾아내어 그것을 수리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조립공정 순서를 아는 것입니다. 만약 나사 하나라도 끼우는 순서가 틀리면 다시 분해해야 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면 다시 풀어야 하는 것처럼 두 번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방의 일도 물부터 먼저 끓일지, 야채부터 먼저 다듬을지 다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가 틀리면 일이 반복되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생겨 낭비하게 되고 그러면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열심히는 하는데 앞뒤 순서가 안 맞으면 같이 일을 해도 시원시원하지 않고 손발이 안 맞으면 답답합니다. 그렇다고 자꾸 말하기도 그렇고.
미국의 어느 대학교에 한 교수가 졸업을 앞둔 제자들에게 마지막 수업을 준비했습니다. 큰 유리 항아리와 돌과 자갈, 모래를 준비했습니다. 항아리에 먼저 모래를 부어넣었습니다. 다음에 돌과 자갈을 넣으려니 안 됩니다. 다시 비우고 이번에는 큰 돌을 먼저 채우고 틈새에 자갈을 넣고 그리고 모래를 붓습니다. 그러니 빈틈없이 가득 채워집니다. 교수가 말합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야 낭비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나 시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이 얼마나 가뭄이 심한지 강이 말라 바닥을 드러냅니다. 강바닥에 침몰되어 있던 군함도 드러나고 고대유물도 드러납니다. 프랑스는 물이 부족하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머리는 이틀에 한 번만 감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날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물은 한 통 뿐인데 할 일은 많으면 생각을 하고 써야 합니다. 발부터 씻고 얼굴 씻는 사람 없습니다. 얼굴 먼저 씻고 그리고 발 씻고 그물로 화장실 바닥을 씻거나 변기에 사용합니다. 부족할 때는 지혜를 짜서 우선순위를 정해서 부족함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만약에 생활비가 부족할 때는 어디부터 쓸 것인가를 정해서 중요한, 꼭 필요한 데부터 써야 합니다. 한 끼 잘 먹고 며칠 굶자고 하면 안 됩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급하다고 생각 없이 하면 안 되고 급할수록 일의 순서를 정해서 하면 일의 효율이 따릅니다. 급하고 중요한 것을 제일 먼저 해야 하고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다면 급한 것을 먼저 해야 하고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는 것이라면 시간여유가 있을 때 하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삶의 본을 보여준 것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은 우리가 우선순위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먼저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합니다. 전도서에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 사람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삶의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비록 많은 근심과 염려가 있어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더 사모하는 주의 자녀가 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르다가 한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비교의식입니다. 자신만 일한다는 우월감도 느껴집니다. 마치 자신은 대단한 일을 하고 동생은 그냥 놀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마치 혼자 일을 다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일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일을 하고 교만해진다면 아니하는 것만 못하게 되고 일을 하면서 타인과 비교한다면 기쁨과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이 나오게 됩니다. 단지 많은 일과 적은 일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대단한 일과 하찮은 일로 구분해서도 안 됩니다. 크고 작은 일로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각각 받은 달란트대로, 주신 능력과 힘에 따라 섬기면 됩니다. 서로의 달란트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일하면 됩니다. 그가 하는 일이 비록 내 눈에는 작게 보일지라도 주님은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인정하기 어려운데도 주님이 인정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도, 심지어 가족인데도 기질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릅니다. 이때 “나랑 안 맞아!”라고 할 것이 아니라 서로 개성을 인정하면 됩니다. 서로 취향을 존중해주고 역할을 인정해주면 됩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만이, 내 생각만이, 내가 아는 것만이 다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양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달란트가 좋아보여도 너무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달란트를 잘 활용하면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제각기 다른 재능과 직분,은사 등을 잘 활용하면 함께 아름답게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 되고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 됩니다. 여러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숲을 이루듯이 다양한 성도들이 모여 조화를 이룰 때 그 교회는 하나님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 롬12:4,5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고전12:20~23입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몸의 지체가 각각 역할이 다릅니다. 눈은 보고 입은 말하고 귀는 듣고 손은 잡고 발은 이동합니다. 눈이 손보다 못한 것이 아니고 입이 귀보다 잘난 것이 아닙니다. 각자 쓰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여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눈썹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눈썹 없으면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는 것보다 더 황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먼저 삶의 우선순위를 잘 배우고 따라간다면,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면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