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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경에는 몇 가지 종류의 믿음을 말하는가?
역사적믿음
역사적 믿음은 음성으로든 신탁으로든 이상으로든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계시의 방법을 통하여 신적으로 제시되고 계시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그의 선포에 근거하여 알고 믿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이라 부르는 것은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거나 혹은 지금 행하신다거나 혹은 장차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는 그것들에 대한 하나의 지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역사적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고전13:2)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모든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 이외의 다른 모든 종류의 믿음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시몬도 믿고"(행8:32)즉 베드로가 가르치는 교리가 참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은 그에게는 없없다.
일시적 믿음
일시적 믿음은 교회의 교리들에 동의하는 것으로, 고백과 기쁨이 수반되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헤의 대상이라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 같은 참된 영속적인 기쁨이 없으며,
뭔가 다른 원인들에서 나오는 믿음이어서 그저 일시적으로만 지속되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사그러져버리는 것이다. 혹은 일시적이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에 동의하고,
고백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아는데에서 일시적으로 기뻐하지만, 그 약속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지각하는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중 돌짝 밭에 뿌려진 것의 설명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마13:20-21)
모두 일시적인 기쁨이며 그것이 사라질때에 그 위에 세워진 믿음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이 일시적 믿음이 역사적 믿음과 다른 점은 거기에 기쁨이 수반된다는 것 뿐이다.
역사적 믿음은 그저 지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일시적 믿음에는 이러한 지식에 기쁨이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마귀들도 역사적 사실들을 믿고 떤다. 그러나 그런 지식에 기쁨은 없고
오히려 기쁨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리가 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맹렬히 대적하는 것이다. 교리가 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대적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거스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믿음
이적을 행하는 믿음은 뭔가 놀라운 일을 행하거나 신적인 계시를 통해서 특정한 사건을
미리 예언하는 특별한 은사다. 이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일반적인 말씀에서 이끌어내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 말씀과 관련하여 어떤 특별한 약속이나 계시가 있어야 한다. 사도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고전13:2)라고 했는데, 여기서 바로 이 종류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은 아니다. (내용 너무 길어서 생략..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
구원 얻는 믿음의 일반적인 본질은 지식과 확신 있는 신뢰에 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시행하기에 앞서서 먼저 믿어야 할 내용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카톨릭에서 가르치는 맹목적인 믿음(implicit faith)은 어리석은 것이다.
구원 얻는 믿음의 차이 혹은 형식적인 성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사함을 받는 사실을 신뢰하고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데 있다.
또한 구원 얻는 믿음의 속성 혹은 특유한 성격은 그리스도의 큰 은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뻐하는데에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의 동력인은 성령이시다.
그 수단은 복음이요, 거기에 성례의 시행도 포함된다.
이 믿음의 주체는 사람의 의지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은 다른 종류의 믿음과 다르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시키는 확신 있는 신뢰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전가되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확고히 믿을 때에 이 믿음이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는 의지와 마음의 작용 혹은 움짐익이요, 거기에는 뭔가 선한 것,
곧 안식과 기쁨이 뒤따르는 것이다.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belief)을 가리키고, 피스듀에인은 동사로 "믿다"라는 뜻인데,
둘다 "강하게 설득되다"는 뜻의 폐페이스마이에서 온것이다. 또한 피스듀에인은
세속의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신뢰를 증대시키다" 혹은 "뭔가에 의지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포실리데스에도 "사람을 믿지 말라, 대다수가 거짓되니라"라는 구절이 있고
데모스테네스에도 "네 자신을 신뢰하라"라는 구절이 나타난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은 역사적 내용을 언제나 포괄하지만, 역사적 믿음과는 다르다.
역사적 믿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나머지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은 또한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가 의를 얻고
성도들의 기업을 상속 받을 권리를 얻는다는 점에서 나머지
모든 종류의 믿음과 다르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정당한 믿음이라 부르며, 이 믿음이야말로
택한 자들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의 체험은...
1. 성경에 포함된 모든 내용이 참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는다.
2. 그 내용들을 확고히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된다.
그 내용들이 참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한다면, 그것들에 동의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3. 은혜의 약속, 혹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값없는 죄사함과 의와 영생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적용시킨다. (요3:36)
4. 이런 확신을 갖고서 그는 현재의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누리며 기뻐하며,
그리하여 미래의 선에 대해서도 신뢰를 한다.
5. 그런 은택들을 바라볼 때, 마음속에서 기쁨이 일어나며, 또한 모든 지각에 뛰어난
양심의 평안이 이어진다.
6. 그리고 그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순종하기를 진정으로 사모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무슨 일을 당하게 하시든지 기꺼이 인내로 견디기를 원하게 된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의 원동력들은 무엇인가?
역사적이며 일시적인 믿음과 또한 이적을 행하는 믿음의 첫째가는 주요 동력인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일반적 영향과 역사를 통해 다른 종류의 믿음이 일어나게 하신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의 경우는 성령께서 특별하신 역사하심으로 생기게 하는 것이다. (엡2:8)
일반적으로 믿음을 일으키는 도구는 성경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고유한 도구는 복음선포이다. "롬1:16,17"
그러므로 성인의 경우 복음의 선포가 없이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의 형식적인 원인은 구원 얻는 믿음에만 고유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내용에 대한 특정한 지식과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확신 있는 신뢰다.
구원 얻는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요, 또한 은혜의 약속이다.
구원 얻는 믿음의 주체는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다.
구원 얻는 믿음의 목표 혹은 최정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다음 둘째가 우리의 구원이다.
믿음으로 인한 효과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 후에 이에 연관된 모든 은택들이 주어진다.
일시적인 믿음과 이적을 행하는 믿음은 가시적 교회의 일원들에게 주어진다.(마7:22).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다음 사실로 알 수 있다.
1.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택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참되고 흔들림 없는 열심을 통해서 믿는 자는 자신의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한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딤후1:12),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5:10)
2. 우리가 신실한 자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의심과 갈등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믿음의 효과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순전한 목적과 또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이다.
-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독일 종교개혁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2)의 작성자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제12조 성령의 신앙(믿음)에 관하여
우리의 이 신앙(믿음)과 신앙의 확신은 육과 혈, 즉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자연의 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 성령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성령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그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성령 없이는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원수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 그대로는 죽는 자이며 눈이 어두우며 강팍하기 때문에 만일 주 예수의 성령이 죽은 자를 되살리시며 우리 마음에서 암흑을 제거하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복종하도록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쳐부수지 않으시면 우리는 찔려도 느끼지 못하며 빛이 드러나도 보지 못하며 계시되어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 하시게 하셨다고 위는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성령이 우리의 중생 이전이든 이후이든 간에 우리에게서 나오는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성화 시키시고 중생 시켰음을 고백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창조와 속죄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처럼 중생과 성화를 위해서도 그 어떤 영광이나 영예도 쾌히 포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선량한 생각을 한 가지도 못하며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의 과분한 은혜의 영광과 찬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14장 구원적 믿음에 관하여
14-1. 믿음의 원천
선택된 자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믿어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영(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행하신 일이시며 일반적으로 말씀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것으로 그리고 성례들의 집행과 기도로 그것은 증가되고 강화된다.
14-2. 믿음의 내용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그것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 때문에 말씀 속에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다고 믿으며; 그것의 각 구절이 담고 있는 바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니, 명령들에는 순종하며 경고들에는 떨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위한 약속들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구원적 믿음의 주된 행위들은 은혜 언약에 의해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여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며 의지하는 것이다.
14-3. 믿음의 정도
이 믿음은 정도에 있어서 서로 달라 약하거나 혹은 강하고; 자주 그리고 여러 방식으로 공격을 당하며 약화될 수 있으나 승리를 얻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한 확신에 이르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완성자이시다.
양무리마을 바로미목사님 정리
믿음의 종류
누구나 사람들은 믿음과 더불어 살아간다.
삶은 어떤 믿음을 가깆고 살아가는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긍정적인 믿음
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마음
<플라시보 효과>
플라시보의 뜻은 ‘마음에 들도록 한다.’이다. 어떤 것이 아무런 영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좋다고 믿음으로써 그 믿음에 맞는 좋은 효과를 말한다.
부정적인 믿음
늘 나쁜 일이,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습관적인 마음
<노시보 효과>
노시보라는 말은 ‘나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아무런 영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쁘다고 믿음으로써 생기는 부정적인 효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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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에게도 그리스도의 언약에 대한 성실과 순종이 없는 단순히
지적 동의함으로만 받을 구원이란 없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에서 믿음을 단계적으로 구분하며 설명해도 결국 구약의 에무나와
전혀 다르지 않게 믿음을 통합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 전통 신학에서는 사도바울의 구원론을 언급하라면 “이신칭의”
교리를 말했다. 그럼 이신칭의 사상은 바울서신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할까? 실제로 “의”를 획득하는 수단이 오로지 “믿음”이라는
이신칭의 사상은 바울 서신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강한 대립을
보이는 상황에서 쓰여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이외 다른 서신에서는
거의 전무하다.
이신칭의 사상은 신구약에서 이 두 서신을 제외한다면 정말 드물게
나타난다(예를 들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 대한 비유). 그러나
“이신칭의” 교리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신실함과 순종(구약의 에무나)의 행위 없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의 믿음을 최종적인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갈라디아서에서 신실함과 순종(구약의 에무나)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구조는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a),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게
되면(5:16b-17),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없다(5:21b).
바울에게도 구원받을 믿음(피스티스)은 구약의 믿음(에무나, 신실함, 순종)과 결국 동일한 선상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라 “(갈 5:6). 여기서 우리말로 “역사 하는” 으로 번역된 “에네르구메네”는 행동하는, 혹은 작용하는 뜻이다. 즉 사랑으로 행위하는 믿음 (but faith working through love, ASV)이
아니고서는 구원이 약속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복음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Min Kyu Lee님-
영어로 되는 믿음의 종류는 ‘Belief’, ‘Fait’h, ‘Trust’ 로 나타나는데,
이는 신실, 신용, 성실, 충성 등으로 종교와 관련되어 해석이 됩니다.
이는 바울이 신약에서 허세적이며 과시적인 바리세인들의 거짓행위를
경고하기 위해 강조된 믿음의 일면도 있었지만 기실은 야고보서에서
강조한 구약의 신실한 순종을 전제로 한 모든 행위를 하도록 믿는
믿음에 대한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교회에서는 바리세인들이 내세우는 기만적인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야고보의 행위 없는 믿음과 분별하지 않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보다는 여전히 율법의 형식과 전통에
메여 목회자들의 잘못된 선동과 이에 추종하는 지도자와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의 타락이 가속화 된 점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처했던 그의 인생 여정을 살펴 보건데, 바울의 입장
에서는 이미 바리세인들의 행위적 믿음으로 인해 철저하게 실패
했던 경험(스데반의 순교)이 있었기에, 분명한 믿음의 진실을 주장
할 수 있는 거지요.
또 다른 측면으로, 신약의 믿음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대할
때 가질 수 진정성은 행위로 나타내면서 믿는 믿음이 아닌 순전한
믿음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신실하고 순종하는 마음의
표현은 모두가 행위가 아닌, 믿음을 믿는 결단의 행위만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대상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따르기로 결정하고 순종하는 행위
자체가 겉으로 나타나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믿음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설교하는
바울의 결연한 음성을 듣고 싶은 오늘 하루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신약에서의 믿음에 대한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이후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는 성령의 열매로써 결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성령의 열매라고 딱히 성경에서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적 노력이나 애씀이 아니라, 순전히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도 받은 공(功)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시는 우리들의 보혜사
(保惠師: Helper)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위를
이해시키고 인도하고 결정하게 하시는 우리들의 주(主)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종류
1. 하나님이 주신 기본믿음.
믿으면 믿었지 믿음의 종류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나는 믿음의 종류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기 판단을 믿는 것도 믿음이고 남의 말을 듣고 믿는 것도 믿음이고 자기가 체험한 것을 믿는 것도 믿음이 라는 결론을 얻어서 믿음의 종류를 생각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기본믿음이다. 은혜로 믿게 하셔 구원받은 것과 믿어지는 것은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선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한번 받은 선물은 사용하면 소모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 믿음만 가지고 계속 사용 하는 것은 기름 떨어진 자동차와 같다. 크게 은혜 받은 사람이 같은 내용을 수십 년 간증 하는 것은 은혜는 소모되고 말만 남는다.
우리는 같은 부흥사들의 설교를 몇 차례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화 하나 틀리지 않게 같은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은 못 들었기에 아멘 하지만 들은 사람은 은혜가 안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유통기간이 지나 믿음은 다 빠져 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야 그대로만 전하는 사람에게는 그때의 상황에서 믿어 진 것이요, 오늘에 상황과 전혀 다른 상황을 청중에게 말을 배달하기 때문에 영양가는 다 소모된 찬밥 데워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찬밥을 자주 데워 먹으면 맛도 영양도 없어진다.
간증 집회 다니는 사람들은 지금 잘 살면서 옛날에 먹을 것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 하든 이야기 하면 아멘 한다. 그때 받은 은혜를 밑천 삼아 거액의 사례비를 받고 말을 상품화 하는 것은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쇼맨십에 울고 웃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질 낮게 한 것은 남의 신앙 간증에 기초하게 한 부흥사들의 설교에 기초한 사람들 중에 그것이 신앙이 된 신자들이 많다. 신앙 간증이 불필요 한 것은 아니다. 자기가 수십 년 경험해야 할 것을 단시간에 경험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간증은 영의 양식이 아니라 소화제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의 상황에 맞는 설교나 성경 읽는 시간에 은혜 받아 믿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8:18) 주가 그리스도로 믿어지는 것이 반석이다.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영의 양식이다. 위장이 든든한 사람은 소화제가 필요 없다. 소화제 복용해야 소화 되는 신자는 영적 소화 불량자다. 우리는 믿음의 두께가 얇게 되지 않도록 기본 믿음을 든든하게 해야 한다.
믿음을 선물하신 하나님은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요, 보관하라고 주시지 않으셨다. 범사에 사랑의 동기에서 사용하라고 주신 선물이기에 믿음으로 행치 않으면 죄라고 말씀 하셨다. 믿음은 생명과 유효에너지다.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다.
2. 공급받는 믿음.
성경에도 없는 용어를 사용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오랜 기도와 신앙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믿음이 떨어 졌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사용하는 말이다. 떨어졌다는 말은 있는 것 다 사용했다는 말이니 공급받아야 한다.
단순히 믿음이 떨어 졌다는 말이 이론이라고 생각 할 수 없다. 믿음이 떨어지면 불신자와 같다. 믿음을 다시 채우면 원상이 회복되지만 믿음의 저장 탱크가 비워 있으면 신앙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동차가 기름 떨어지면 연료를 보충 하는 것과 같다.
나는 내가 늘 기도 해주는 목사들 중에도 믿음 떨어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히 나가고 있다. 그런 목사들은 사방 다니며 보고들은 것이 많아서 설교하는 것이 폭이 넓어서 배울 것도 많고 흠잡을 것이 없다.
시사 면에 밝고 죄를 보는 눈이 예리하여 조리 있는 설교에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그것이 은혜인줄 착각하여 감정이 넘쳐 교회는 싸늘하고 부흥은 되지 않는다. 혹 여건이 좋아 사람이 몰려와도 은혜가 없어도 길이 잘 들어 교회는 조용하나 시한폭탄이다.
소금이 녹지 않고 너무 단단하여 먹는 사람의 이를 부러지게 한다. 소금은 녹아야 제 맛을 내는데 녹지 않고 있으니 잘난 교인들만 많아 반목만 일삼고 복음 전하는 일은 뒷전이다. 소금은 녹아야 맛을 내게 되는데 물기가 없으니 녹지 않는다.
이 소금을 녹이는 물기는 성도들이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이다. 먼저 목사의 눈에서 눈물이 나와야 되고 장로 권사 집사 순으로 눈물이 흘러 은혜의 바다를 이루지 않으면 소금이 녹지 않는다. 녹지 않는 소금은 길가에 버려져 공해 물질로 변한다.
소금이 녹아야 방부제도 되고 조미료도 되는 것이다. 자동차 연료 탱크는 텅 비워 있고 녹이 슬었다. 주유소에 가서 주유해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다. 영적 주유소를 평신도는 교회와 신앙생활에서 공급을 받고 목사는 서재와 밀실에서 공급받는다.
먼저 목사가 믿음이 충만해야 공급하는데 받은 게 없으면 줄 것이 없어 교회는 옳은 사람만 있고 죄인은 없으니 예수님이 필요 없는 교회가 된다. 기도 할 때는 죄인들인데 기도 하지 안할 때는 모두 의인으로 행세 하니 예수님이 필요 없이 된다.
믿음을 공급 바는 방법은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기본이고 믿음의 글들을 잘 골라 읽고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해야 믿음탱크를 채우는데 효과가 크다. 최근에 박종욱 장로님(무지개약속)과 예 종규 목사님(신앙의 건강검진)저자 증정본을 선물 받았다.
두 분 책에서 공통점을 본 것은 복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목사님은 폭포수와 같은 능력의 복음이라면 장로님은 잔잔한 호수 같은 복음을 담은 글이다. 많은 믿음을 공급받고 보답할 길이 없어 기도 중에 주여! 하며 악센트를 있지 않는다.
3. 저장하는 믿음이다.
저장하는 믿음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말이 이상하다. 70년대 후반에 상경하여 기독교 서점에 들려 안 이숙 선생저서 “죽으면 죽으리라” 의 책을 읽으며 크게 은혜를 받았다. 나이가든 한국교인이라면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그녀가 평양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을 때 성경을 아마100 장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많은 분량을 암송하고 찬송을 속으로 암송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함을 읽고 한없이 눈물이 나와 한참을 쉬어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분이 그런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에서 유전된 것으로 안다. 어머니는 성경을 읽을 때는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단정히 입고 무릎 끌고 앉아 읽는 다고 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파자마만 입고 앉아서도 읽고 누어서도 읽는다.
그런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란 그녀의 평상시에 많이 저장해둔 믿음이 6년간 옥고를 치르면서도 사형집행 앞두고 해방되어 석방됨에 따라 “실격된 순교자” 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그 책에서 읽고 크게 은혜 받고 교인들에게 돌려가며 읽게 한 기억이 생생하다.
뱀이나 개구리가 가을에 영양을 충분히 저장하고 겨울을 먹지 않고도 죽지 않듯 신자들도 믿음의 영양소를 충분히 저장해두면 신앙에 한파가 밀어 닥쳐도 영양분이 없어 죽지 않고 겨울을 무난히 지낼 수 있다. 비상시를 위하여 평상시에 저장 해 두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에 믿음을 저장하여 비상시에 사용한다고 하는 말은 잠 고대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몸에 병이 날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다른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듯이 많이 저장해 둘수록 좋다.
돈이야 젊었을 때도 버는 기술이 없고 돈 버는 직업도 아니었으니 저축을 못 했지만 신앙이야 환경 좋을 때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도 열심이 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여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많이 하여 쓰고도 남아 저장 해 두어야 한다.
믿음은 아꼈다 저장 하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고도 남는 것을 저장해야 한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 조그마한 시험을 감당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이 많다. 돈은 낭비 되지만 신앙은 낭비가 되지 않는다. 많이 사용 할수록 저축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사용 할수록 분량이 많아진다. 은혜 받는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신앙적 행동이 따라야 은혜를 계속 받는 것이다. 기도하고 전도 하고 성경 읽고 봉사해야 은혜가 충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저장이 된다. 차고 넘치는 것은 모두 저장되는 법이다.
나이가 들어 무위도식하고 살아보니 신앙이 바닥날 것 같아 신앙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모아서 아직은 저장창고에 채우며 산다. 목사 정년을 연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 하며 청중들에게서 오는 은혜가 그리워 그러는 심정만은 이해가 된다.
4.투자하여 생산하는 믿음.
믿음을 저장 하는 것은 투자하여 이를 남기기 위해 자본을 모으는 것과 같다. 믿음을 저장해 두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반듯이 생산성 있는 곳에 투자하여 많은 소득을 올려야 한다. 달란트비유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를 남겨야 한다.
물질이든 재질이든 지식이든 무엇이라 해도 성도들에게는 믿음과 관련 돼 있어야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복음을 믿고 사는 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은 인간은 불의하나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을 의롭다 인정하심이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 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고 또 그 믿음은 믿음을 재생산하여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바울은 심도 깊게 역설 하였다.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믿음은 믿음으로 행함이 표현된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 이라고도 한다. 믿음으로 행해야 믿음이 생산된다. 믿음 대신 돈을 투자하여 건물을 짓고 복음을 전하려는 것은 믿음이 생산되는 게 아니라 죄를 생산되는 것이다.
가진 게 있어야 줄 것이 있다는 말을 나는 자주 한다. 돈도 있어야 없는 사람 줄 수 있듯이 믿음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믿음을 주어 믿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저장 하고 믿음을 투자하여 재생산해야한다. 그래서 심은 대로 거둔다.”(갈6:7) 고했다.
사회를 구원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의 구현으로 사회를 구원 하려 한다. 나는 구원은 믿음을 심어 믿음을 거둬야한다고 믿는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된다. 90년대 이후로 생산 하는 신앙에서 소비하는 신앙으로 전향 됐다고 생각된다.
목사들과 이야기 해보면 큰 교회를 만들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대형교회는 최소한 2.000-3.000명은 모여야 한다. 2.000-3.000명을 모으려면 자기 평생모아도 수1.000명에 1명의 성공할 확률이 없는데 아무나 대형교회 만드는가?
단시일 내 2.000-3.000명을 모으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한다. 유동하는 교인이 몰려와야 하고 건물도 있어야하고 장소도 좋아야한다. 감투를 쓰려면 자기의 머리사이즈를 재보고 자기머리에 맞는 감투를 쓰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교회도 불행해진다.
일본에서 제일 많이 전도한 교회를 만든 김규동 선교사는 “가만히 있어도 세계선교사 모임에서 중진 취급 받는데, 모임이나 만들고 제도를 세워서 목회와 관련 없는 일들에 대하여 세월을 죽이며 살고 십지 않다.”고 했다. 그것이 투자하여 생산 하는 믿음이다.
믿음을 투자하지 않고 거액을 대출받아 건물에 투자하는 건물 술, 강신 술, 최면 술, 쇠뇌교육의 속임 수로 영혼장사(계18:13)에 혈안이 된 세상이다. 복음을 심어 믿음을 생산해야한다.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나듯 복음을 심어 믿음을 다수확 해야 한다./유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