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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정의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
개설
주로 솔나무·송목·적송·육송 등으로 부르며, 송유송(松油松)·여송(女松)·자송(雌松)·청송(靑松) 등으로도 부른다. 학명은 Pinus densiflora S. et Z.이다. 높고 굵게 크는 나무로서 우리나라의 나무 가운데 은행나무 다음으로 큰 몸집을 갖고 있다.
소나무의 형태
잎은 바늘모양으로 짧은 가지 끝에 2개씩 뭉쳐 나며, 밑부분은 엽초(葉鞘: 입깍지)에 싸여 있다가 이듬해 가을 엽초와 함께 떨어진다. 겨울눈은 적갈색으로 은백색을 띠는 해송과 구별된다. 나무껍질의 빛깔은 대체로 위쪽은 적갈색이고 아래는 흑갈색이나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꽃은 암수한그루로 5월에 피는데, 수꽃에 해당하는 소포자엽(小胞子葉)은 긴 타원형으로 새 가지의 아랫부분에 붙고, 암꽃에 해당하는 대포자엽은 계란 모양으로 새 가지의 끝에 붙는다. 꽃가루는 노랗고 공기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멀리까지 전파되며, 다음해 가을에 솔방울이 익고 인편(鱗片)이 벌어지면서 씨가 땅으로 떨어진다. 솔방울은 계란형으로 길이 4∼5㎝, 지름 3∼4㎝이나 나무의 나이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심하다. 씨에는 날개가 달려 있는데 얇은 막질이며, 그 빛깔과 모양은 한 개체 내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고 개체간에는 차이가 크다. 수분(受粉)은 첫해의 5월중에 이루어지기 시작하나 수정(受精)은 이듬해 5월중부터 이루어진다. 수분이 된 뒤에는 어린 솔방울의 인편이 유착되어서 전체적으로 밀폐된다. 일반적으로 40∼50년생이 되면 종자결실량이 크게 떨어진다.
소나무 분류상의 특성과 품종
소나무속은 잣나무·누운잣나무·섬잣나무·백송이 속하는 단유관아속(單維管亞屬)과 소나무·해송이 속하는 쌍유관아속(雙維管亞屬)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또 소나무는 종자의 날개가 길어서 피나스타절(Section Pinaster)에 속하며, 또 침엽이 한 다발에 2개, 봄에 자란 줄기나 가지가 단일절(單一節)이고, 솔방울은 개열성(開裂性)이라서 라리키오네스아절(Subsection Lariciones)에 속한다. 해송과 분류상의 위치는 같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소나무류로서 이와 비슷한 것에 만주흑송이 있다. 소나무는 해송과 자연잡종을 잘 만든다. 그 잡종송을 간흑송(間黑松)이라 하는데 대체로 줄기가 곧고 빠르게 자라며 형질이 우량하다. 소나무와 해송의 분포경계, 즉 해안 가까운 곳에 이러한 잡종송이 흔히 발견된다. 해안을 따라 분포해 있는 해송의 유전자는 이러한 잡종과정을 통해서 소나무가 자라는 내륙 쪽으로 전파되어 가는 유전자확산(遺傳子擴散) 현상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몇 가지 변종 및 품종이 인정되고 있는데, 크게 동북형·금강형·중남부평지형·안강형·중남부고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동북형은 함경남도 해안지방, 금강형은 강원도 일대, 중남부평지형은 서남부해안지방, 안강형은 경상북도 일대, 중남부고지형은 평안남도에서 전라남도에 걸친 내륙지방에 분포하는 것을 말한다. 동북형은 우산형[傘松型]이라 한다.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전체의 모양이 달걀 모양인 것을 반송(盤松) 또는 만지송(萬枝松)·다행송(多行松)이라 하는데 유전성으로 내림하는 형질이다.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것은 처진소나무라고 하며, 형질은 유전적인 것과 환경의 영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금강형은 금강송(金剛松)이라고 하는데 형질이 우량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역품종으로,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 발달하여 눈의 압력으로 인한 오랜 세월의 도태로 줄기가 곧게 되고 가지는 가늘고 짧게 변화하였다. 이 밖에 몇 가지 품종과 변종이 보고되고 있으나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된다.
지역품종을 수지도수(樹脂道數: 나무의 진이 통하는 세포의 빈틈 숫자)와 가도관(假導管:헛 물관) 길이 등 각종 형질로 구분할 때 소백산맥계와 태백산맥계의 예를 보면, 소백산맥계는 5.2∼5.9개의 수지도수를 보이고 있고 이에 대하여 태백산맥계는 6.6∼9.6개라는 더 높은 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두 산맥계의 소나무집단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가도관의 길이로 보면 소백산맥계는 태백산맥계에 비해서 길고 통계상 유의적 차이가 인정된다.
소나무의 생태
소나무는 양성의 나무로 건조하거나 지력이 낮은 곳에서 견디는 힘이 강한데 어릴 때에는 일사량이 충분해야 한다. 이와 같이 소나무는 좋지 못한 환경에서는 낙엽활엽수종과의 생존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으나, 지력이 좋고 토양습도가 알맞은 곳에서는 그 자리를 낙엽활엽수종에게 양보하고 만다. 가령, 설악산의 소나무는 산의 능선을 따라 나타나고 산비탈과 계곡부에는 낙엽활엽수종이 무성해서 뚜렷한 분서현상(分棲現象)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다른 곳에서도 관찰된다. 이처럼 소나무는 자연상태에서는 극한환경지대로 쫓겨나는 추세에 있는데, 이것은 세계적인 소나무류의 일반 경향과 같다. 우리나라에서의 소나무 발생과정을 화분 분석을 통해서 추정해 보면, 지금부터 약 7000년에서 1만년 전에는 참나무류가 성하였고, 그 뒤 소나무속이 나타나서 참나무속·서나무속·느릅나무속·호도나무속 등과 함께 오래 살아왔고, 약 1400년 전부터 소나무가 갑자기 불어났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소나무의 등장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늦어 약 1000년 전쯤 해서 삼림의 파괴가 진행되자 소나무가 세력을 얻어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소나무 증가도 인구 증가와 농경에 의한 문명의 발달에 발맞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소나무 생육지는 생태계의 조화가 크게 깨지면서 솔나방의 유충, 솔잎혹파리·소나무좀 및 대기의 오염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소나무의 분포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일본 및 만주의 모란강(牧丹江) 동북쪽부터 중국의 요동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하고, 구미 각국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소나무는 우리 나라 수종 중 가장 넓은 분포면적을 가지고 그 개체수도 가장 많다. 남쪽은 제주도로부터 북쪽은 함경북도에 이르는데 함경남북도의 북반 부분에서는 부분적으로 소량 나타난다. 수직적 분포는 산악의 황폐 정도에 따라 위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또, 같은 산악에 있어서도 남북 방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지리산·팔공산·태백산·치악산 등은 해발 1,000∼1,100m까지 자라며, 백두산에서는 900m 높이까지 분포하고 있다. 바닷가를 따라 분포하는 해송과는 분포경계가 비교적 뚜렷하다. 울릉도와 홍도에는 소나무가 분포해 있었으나 해송은 원래 없었으며, 제주도에는 소나무와 해송이 함께 나타난다.
소나무의 재배 및 조림
우리나라 소나무는 잘 자라고 재질도 우량한 편이다. 이에 대비될 수 있는 외국산 소나무로서 유럽적송, 그리고 미국의 레지노사소나무가 있는데 생태적 특성에 있어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 소나무숲의 생산성은 지위지수(地位指數)로 나타내며, 강원도 일대에 자라는 금강송에 대한 지위지수는 [그림 2]와 같다. 이곳 지위지수는 25년생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그 숫자는 나무의 높이를 뜻하며, 임업에 있어서 임지(林地)의 생산성은 그곳에 자라는 나무의 높이로 말할 수 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림 2]를 볼 때 가령 35년생으로서 나무높이가 27m라면 임지의 지위지수는 20m(25년생 때의 나무높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좋은 소나무숲을 만들자면, ① 조림지에 가까운 우량집단에서 우량한 나무를 골라 장령(壯齡)의 소나무에서 종자를 얻어야 하고, ② 알맞은 시기에 채집해서 불량종자를 제거한 뒤 실내에 건조상태로 저장하며, ③ 초봄 해토가 되면 포지(圃地: 심어서 가꾸는 밭)에 흩어뿌리고 그 뒤 9㎜ 정도로 흙을 덮고 다시 짚을 얇게 덮어주고, ④ 발아휴면성(發芽休眠性)이 거의 없는 소나무종자는 곧 싹이 트는데 어린 묘목은 입고병(立枯病)에 약하므로 겉흙을 사전에 소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나무 어린 묘목은 곧은 뿌리를 발달시키므로 되도록이면 생육기간중 포지에서 뿌리자르기를 해서 곁뿌리의 발달을 촉진시켜 주어야 산지에 옮겨 심은 뒤의 활착률을 높이게 된다. 1년생묘목을 산지에 옮겨 심는 일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포지에서 한번 옮겨 심어서 1년 더 자라게 한 후 2년생묘목으로 산지에 아주심기를 하고 있다. 1년생묘목은 1㎡당 약 500∼600그루를 최후에 남기고 이듬해 포지에 이식 또는 상체(床替:묘판으로 옮김)할 때에는 1㎡에 100그루 정도를 심어준다. 소나무의 종자는 구과 100에 대해서 약 2.7%의 비율로 얻어지는데 1㎏당 알 수는 약 9만 9000개이며 1,000알의 무게는 약 10.2g이다. 1l당의 알 수는 약 5만 3000개이다. 해에 따라 나무마다 차이는 있으나 종자효율은 약 93%이다. 종자효율을 약 80%로 잡고 1㎡에 약 302g의 종자를 뿌린다. 육묘포지의 토질로서는 사질양토 또는 양토가 알맞고, 토양산도(pH)는 5.2∼6.0이 알맞으며 관수와 배수가 잘 되어야 한다.
육종 또는 연구의 목적으로 접목묘를 생산하는 경우에는 소나무를 대목으로 하는 것이 좋고, 초봄 수액의 유동이 시작되기 직전에 할접(割接)에 적응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목을 온실에 넣어 휴면을 깨워주고 그 뒤 휴면상태에 있는 접순을 접하기도 한다. 접착률은 비교적 높다. 조림에 있어서 소나무종자의 산지를 중요시하는 것은 지역품종이 서로 다른 지역에 심었을 때 자라는 정도에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는 분포면적이 넓은 만큼 지역에 따라 눈으로 볼 수 없는 형질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포지에서 기른 2년생의 소나무묘목을 산지에 심을 때에는 보통 1㏊당 약 3,000그루를 심지만 조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자면 더 빽빽하게 심는 것이 좋다. 빽빽이 심으면 초기의 길이자람이 촉진되고 줄기가 곧게 되어 좋은 나무모양으로 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자를 채집하고 묘목을 길러 산지에 심어서 인공림을 만들 수 있으나, 우리 나라 소나무숲은 천연갱신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천연갱신이란 숲 땅에 서 있는 성숙한, 또는 이용단계에 있는 나무에서 종자가 숲 땅에 떨어져, 그 뒤 자연적으로 어린 나무가 자라나 후계림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후계림이 만들어지면 어린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큰 나무를 잘라 이용한다. 이때 성숙목과 후계림은 일시적으로 이단교림(二段喬林)의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소나무숲은 이러한 천연갱신의 과정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경우 전통적으로 건축재·관재 등 미래의 이용을 위해서 성숙목 중 생활력이 강하고 목재로서의 이용가치가 높은 것을 골라서 예비적으로 남겨두고 이용하는 방법을 흔히 채택하였다. 소나무숲은 단순림으로 만들면 병충해 예방과 지력의 보전상 알맞지 않으므로 되도록 활엽수종과 섞어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좋다. 초기밀도를 높게 하면 줄기가 곧고 겉가지는 가늘고 아랫가지는 저절로 죽어서 떨어지므로 바라는 모형으로 자라게 된다. 따라서 소나무숲은 밀도관리가 중요하고 나무가 커지면 가지치기 작업은 작은 가지에만 국한하면 된다. 작은 목재의 생산을 위해서는 30∼40년이 걸리고 대경재(大徑材)를 얻으려면 60∼80년의 시간이 걸린다. 소나무단순림에는 하부식생이 일반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소나무는 땅이 메마른 산지에 잘 나타나므로 이러한 곳에 하부식생(下部植生: 나뭇그늘 밑에 자라는 식물)이 왕성하게 자랄 수는 없다. 옛 문헌에도 “소나무 아래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松柏之下 其草不殖)”라고 하여 이러한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소나무단순림이 많으면 비바람으로 숲 땅이 침식을 받아 결국 국가의 융성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며, 생산적이고 건전한 소나무숲을 만든다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소나무의 이용
우리나라에서 소나무 목재처럼 오랜 세월을 통해서 다양하고도 폭넓게 이용된 나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명과 문화는 소나무 자원의 이용정도와 비례해서 발달해 왔다고까지 볼 수 있다. 소나무의 변재(邊材)는 담황색이고 심재(心材)는 적갈색을 띠며, 나이테의 경계가 뚜렷하고 두께는 생산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경상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태백산맥에서 나는 소나무는 특히 재질이 우량하여 춘양목(春陽木)이라 불리며 귀중재로 취급되어 왔다. 춘양목은 나무의 굵기가 굵은 반면 나이테의 너비가 좁고 고르며 결이 곱고 광택이 있어 이용가치가 높았다. 목재는 기둥·서까래·대들보·창틀·문짝 등에 쓰이는 건축재, 상자·옷장·뒤주·찬장·책장·도마·다듬이·빨래방망이·병풍틀·말·되·벼룻집 등의 가구재, 소반·주걱·목기·제상·떡판 등의 식생활용구, 지게·절구·절구공이·쟁기·풍구·가래·멍에·가마니틀·자리틀·물레·벌통·풀무·물방아공이·사다리 등의 농기구재, 그리고 관재(棺材)·장구(葬具)·나막신재 등 그 용도가 다방면에 이르렀다. 특히, 해안을 따라 자라는 큰 목재는 조선용(造船用)으로 중요시되어 보호되어 왔다. 왕실 또는 귀족들의 관재로 삼기 위해서 소나무숲이 보호된 바 있는데, 굵게 자라서 안쪽의 심재가 황적색을 띤 고급재로 유용한 것을 황장목(黃腸木)이라 하였다. 1420년 예조(禮曹)에서 “천자와 제후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들며, 황장이란 송심(松心)이며 그 황심(黃心)은 단단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아니합니다. 백변(白邊)은 수습에 견디지 못하고 속이 썩습니다.”라고 한 대목으로 보아 소나무의 심재가 관재로 높이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소나무재의 현대적 용도 또한 다양하여 완구·조각재·현대식 가구재·포장용 상자·성냥대·목모·펄프·합판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온돌을 사용해 왔고 따뜻한 음식 먹기를 좋아하였다.
온돌의 난방용으로는 소나무장작이 가장 뛰어났다. 이것이 삼림을 황폐화시키고 숲의 형질을 퇴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솔잎은 취사할 때 불의 힘을 조절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로서,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는 데에는 솔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솔갈비라고까지 치켜올려 부르게 되었다. 숯에는 백탄과 흑탄이 있는데, 흑탄이 일반적인 것이었고 소나무가 원료이다. 『경국대전』에 가을이 되면 중앙관서에서는 각 지방에서 장정들을 징집해서 숯을 구워 바치도록 한 기록이 있는데, 원료가 된 것은 주로 소나무였다. 조선시대에는 능의 전례제사에 쓰기 위해서 향탄산(香炭山)을 지정하고 그곳 주민으로 하여금 숯을 굽게 해서 상납시켰다. 수원의 광교산과 서울 홍릉, 그리고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일대의 숲이 향탄산이었는데, 경상도에서 숯을 구워 서울로 운반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현금으로 대납시켰다. 땔감은 백성들의 생활필수품인데도 산림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가 소유였으므로 그 소유와 이용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 백성들이 마을 주변에서 땔감을 채취하는 행동은 금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란 말을 낳게 한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즉, 산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었고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공해전시제(公廨田柴制)를 정해서 국가기관에 농토와 시지(柴地:땔나무를 심는 땅)를 나누어 주었고 조선시대에도 관용시장(官用柴場)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분급은 삼림을 황폐시키는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송지(松脂) 또는 송진(松津)은 소나무의 줄기에 상처를 내어 채집하는데 때로는 소나무목재를 건류해서 얻기도 한다. 채취법에 따라 성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송진을 정제해서 얻은 터펜틴(turpentine)은 각종 도료의 제조에 쓰이고, 용제(溶劑)·의약품 및 화학제품의 원료로서 요긴하게 이용된다. 간솔가지 및 소나무뿌리를 원료로 건류를 거쳐 송근유(松根油)·목초액·송근타르 등을 얻는데, 일제강점기 말엽 일제는 군수자원을 얻고자 우리나라 사람들을 혹사하면서 송근 채취와 건류에 혈안이 된 적이 있다. 소나무는 식품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나무의 백피(白皮), 즉 속껍질은 식량으로서 한몫을 하였다. 수액이 유동할 때는 이것을 생식할 수 있었고, 벗겨서 말려 보관해 두었다가 물에 담가 떫은 맛을 없앤 뒤 식용하기도 하고 찧어서 가루로 만들어 송기떡을 만들기도 하였다. 소나무껍질도 예로부터 구황식품으로 중요시되었다. 1434년 경상도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이 올린 “구황식품으로서 상수리가 가장 좋고 다음이 송피이옵니다. 기민(飢民)이 소나무껍질을 벗겨 식량으로 하도록 허가하여 주옵소서.”라는 대목으로 보아 소나무껍질이 굶주린 백성을 연명시키는 데 도움을 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나무줄기의 껍질뿐만 아니라 뿌리의 껍질도 식품으로 이용되었다. 『본초강목』에도 근백피(根白皮)는 목피(木皮) 또는 적룡피(赤龍皮)라고도 하는데, 독이 없으며 벽곡(辟穀: 곡식을 먹지 아니하는 대용식)으로 쓰인다는 기록이 있다.소나무의 꽃가루는 송황(松黃)·송화(松花) 등으로 불리는데 밀과(蜜果)의 재료가 되었고, 기(氣)를 보호해 주는 약성을 갖고 있다. 솔잎은 송모(松毛)라고도 하며 송죽(松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 어린 솔잎 한 말을 잎 끝쪽은 떼어버리고 잘게 썰어 오지항아리 속에 넣고 여기에 온탕 한 말을 넣어 보통 김치와 같이 담그는데, 그것이 점차로 서늘해지면 무·미나리 등을 썰어넣거나, 또는 파·부추·된장·소금 등으로 맛을 돋운다. 시일이 지난 뒤 한 번에 한 공기씩 먹고 수시로 그 물을 마시면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본초강목』에도 솔잎을 가늘게 썬 뒤 다시 이것을 갈아 날마다 밥 먹기 전에 술과 함께 먹거나 끓인 물로 죽을 만들어 먹으면 건강에 좋은데, 기년(飢年)에 쓰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솔잎을 써서 송편을 만드는데, 솔잎 내음이 가득 밴 송편은 우리 민족의 식품이 되어 왔으며, 중국에서도 구황식품으로 이용되었다. 소나무는 술을 만드는 데도 쓰여, 송순주(松筍酒)·송엽주(松葉酒)·송실주(松實酒)·송하주(松下酒) 등이 있다. 송하주란 동짓날 밤에 솔뿌리를 넣고 빚어서 소나무 밑을 파고 항아리를 잘 봉하여 두었다가 그 이듬해 낙엽이 질 무렵에 먹는 술이다. 솔방울술은 지금도 흔히 담그는 술인데 솔방울을 송자(松子)라고도 한다. 소나무옹이[松節]를 넣고 빚은 술을 송절주라 하는데, 송절은 소나무의 뼈로서 단단하고 강해서 몸에 좋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소나무의 각 부분은 식품인 동시에 약재로서도 효과가 있었다. 복령(茯靈)은 소나무뿌리에 외생균근이 공생해서 혹처럼 비대하게 된 것인데 신장병에 약효가 있다고 한다. 소나무뿌리가 정기를 가지고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뿌리 속에만 숨어 있을 수 없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 복령으로 되었다고 믿었다. 소나무뿌리의 정기가 뿌리로부터 떠나지 않고 끝까지 붙어 있다고 해서 복신(伏神) 또는 복령(伏靈)으로도 불렀다. 복령 가운데에서도 뿌리조직 부분을 특히 황송절(黃松節) 또는 신목(神木)이라 해서 약효를 으뜸으로 쳤는데 『본초강목』에 그 효과가 기록되어 있다.
소나무뿌리는 외생균근균과 공생하는데, 종류에 따라 송이(松栮)라는 포자체를 발생한다. 이것을 송심(松蕈)·송균(松菌)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 소나무숲은 송이가 자라는 데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에 송이가 많이 채취되고 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8년간에 걸쳐 약 6,000t의 생송이가 생산, 수출되었다. 송이는 식품가치가 대단히 높아 궁중진상품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송이는 인공배양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생산량을 인공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송진은 공업용으로 쓰이고, 다방면에 약효가 있어 한약재로도 쓰였으며 송고(松膏)·송방(松肪)·송교(松膠)·송향(松香) 등으로 불리었다. 송진이 땅 속으로 들어가 천년이 지나면 호박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호박은 장식재로서 가치가 높다. 기름진 간솔가지는 조명용으로 쓰여왔고 송명(松明)은 관솔불을 뜻한다.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을 송매(松媒) 또는 송연(松煙)이라 하는데, 좋은 먹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먹은 아교를 녹여 넣은 물에 그을음을 반죽하여 만드는데 그을음 중에서는 소나무를 태운 것을 으뜸으로 쳤으며, 우리 나라의 송연묵은 당나라에서 수입해 갔을 만큼 이름이 높았다. 소나무는 나무 자체로서도 우리 민족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나, 그 숲도 우리 민족에 좋은 환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임수(林藪: 숲)가 있는데 소나무를 주축으로 한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경주시에 있었던 천경림(天鏡林)과 경주시 내남면의 왕가수(王家藪)는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예천의 상금곡송림(上金谷松林),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의 봉화임수(奉化林藪),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의 봉송정임수(奉松亭林藪), 강원도 경포의 한송정임수(寒松亭林藪), 경상북도 울진군의 취운루임수(翠雲樓林藪), 강원도 양양군의 동해송임수(東海松林藪), 경기도 수원시 북문 밖에 있는 노송의 가로수 등은 풍치·방풍·방사 등으로 귀중한 가치를 발휘하였다. 소나무는 묘소 주변에 심어 묘를 보호하는 데도 이용되는데, 이것을 도래솔이라 부른다.
육송정책
소나무조림의 역사는 신라의 화랑도에 의한 식송(植松)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소나무는 귀중한 임산자원으로 인정되어 보호되었고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392년에 전조(前朝)의 종묘 앞에 서 있는 소나무를 베지 말라는 명이 있었고, 1398년에는 종묘 북쪽산에 송충이 피해가 심해서 이것을 잡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송충발생과 그 구제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1406년 제릉(齊陵)의 송충구제를 위해서 장정 680명을 동원하고 사창미(社倉米:고을에서 봄에 꾸어 주었다 가을에 걷어들이는 還穀을 쌓아 둔 사창의 쌀)를 나누어 주었으며, 1417년에는 충재기제(蟲災祈祭)를 올리기도 하였다. 소나무를 심은 기록도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1411년에는 서울 남산에 소나무를 심기 위해서 장정 3,000명을 동원하였으며 20일간에 걸쳐 작업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1424년에는 봉상시(奉常寺:제사 등을 맡은 관청)의 일로 예조가 공문을 내려 모든 제단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도록 지시한 적도 있다. 『대전통편』 공전에는 개인적으로 소나무 1,000그루를 심어서 조림에 성공한 자는 해당 수령이 직접 심사하고 관찰사에 보고하여 상을 준다고 적고 있다. 이 때 소나무숲에 천연갱신의 가능성이 시인되어 『목민심서』에 “바람이 불면 솔씨가 떨어져 자연히 솔숲이 이루어지니 금양만 하면 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나무를 심을 것인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삼림정책으로 금산(禁山)·봉산(封山)·시장(柴場: 땔감용 나무를 심는 곳)·임수·향탄산·능원묘의 해자(垓字)·금송(禁松), 그리고 특수용도를 가지는 수종의 재식과 납세 등을 들 수 있다. 금산은 땔나무감의 채취·개간·화전 등을 금하는 숲을 말하는데, 이것은 몇 가지 특성의 삼림으로 나눌 수 있다. 가령, 서울 주변의 산에는 나무를 남겨 풍치를 조성해서 존엄성을 유지하고자 주민의 이용을 금하였으며, 도성사산(都城四山)을 도성 내외산이라 해서 금산제도에 묶었다. 1448년경의 서울 주변의 산은 무척 황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한 지리풍수가가 왕에게 “수도의 산천지세에 있어서 허한 곳, 그리고 광활한 곳에는 나무를 심어 비보(裨補: 도와서 보충함)를 해야 하며, 지금 서울 주변의 산은 황폐해 있으니 나무를 보호해서 산악의 정기를 배양하게 하옵소서.”라는 건의를 하였다. 금산에는 관방금산(關方禁山)과 연해금산(沿海禁山)이 있었다. 연해금산은 소나무가 주로 자라고 있는 바닷가, 또는 도서지대의 우거진 숲을 보호하고 장차 조선용재와 건축용재를 제공할 목적이었는데, 이것을 선재봉산(船材封山)이라고도 하였다. 1448년에 금산이 구체적으로 지정되고 있는데 약 200개 소를 넘은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 중 약 70%는 포(浦)·도(島)·곶(串)으로 된 지명인데, 이것은 위치상 조선에 편리하고 또 목재운반에 편리한 데 이유가 있었다. 가령, 전라남도 완도는 대표적인 곳의 하나이다. 국가수용에 충당하기 위하여 나무의 벌채를 금한 산을 봉산으로 정하였는데 금산과 별 차이가 없었다. 『속대전』에 “각 도의 황장목을 키우는 봉산에는 경차관(敬差官: 각 지방에 임시로 파견하는 관리)을 파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벌채하고 강원도에서는 5년에 한 번씩 벌채하여 재궁(梓宮)감을 골라낸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대상수종은 소나무였다. 그리고 1788년에 만들어진 『송금절목(松禁節目)』에도 “바다 연변의 30리에서는 비록 사양산(私養山)이라 하더라도 일체 벌채를 금지한다.”라고 하여 나무의 벌채를 금하고 있다.이를 위반하고 나무를 벤 자는 장 100대의 벌을 가하며, 만일 그 남편되는 사람이 관리이면 파직시키고 한산(閑散: 직책이 없는 사람)이면 외방으로 보내고 평민은 장 80에 징속(徵贖: 벌금을 징수함)을 하였다. 도성 내외사산은 한성부의 낭관(郎官: 5∼6품의 문관)이 수시로 검찰해서 매달 보고를 하고, 이러한 검찰을 게을리하면 해당 관리는 강등을 시키고 산지기는 장 100대로 징치한다는 등 금제규정이 엄격하였다. 그리고 1788년(정조 12)에 제정된 『제도송금사목(諸道松禁事目)』은 당시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 적용된 송정(松政)규정으로, 정리된 산림법 가운데 백미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깊은 뜻이 부여되고 있다.
『제도송금사목』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배경에는 사목(事目: 관청의 규정)들이 있는데, 처음의 격식은 1469년(예종 1)에 만들어진 『도성내외송목금벌사목(都城內外松木禁伐事目)』이고 이것이 발전해서 1684년(숙종 10)에 만들어진 소위 『갑자송금사목』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다시 『제도송금사목』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무신사목(戊申事目)』으로 부르기도 한다. 소나무를 보호하고 양성하는 데 대한 조선시대의 사목 또는 절목(節目) 반포의 시대적 경과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세종 6년(1424) 송목양성병선수호조건(松木養盛兵船守護條件). ② 세조 7년(1461) 금벌송목지법(禁伐松木之法). ③ 예종 1년(1469) 도성내외송목금벌사목. ④ 숙종 10년 11월(1684) 황해도연해금송절목(黃海道沿海禁松節目). ⑤ 숙종 17년(1691) 변산금송사목(邊山禁松事目). ⑥ 숙종 38년(1712) 금송작계절목(禁松作契節目). ⑦ 숙종 45년(1719) 탕춘대금송절목(蕩春臺禁松節目). ⑧ 정조 12년(1788) 제도송금사목. ⑨ 순조 31년(1831)에 완도송금사목절목(莞島松禁節目).
이 중 『제도송금사목』이 가장 잘 정리된 것으로서 전문(前文)과 29개의 사목으로 되어 있다. 전문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책 중 소나무에 관한 정사(政事)가 그 하나라고 했다. 소나무를 금양(禁養: 못하게 함)하는 이유는 국가의 비상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니 전함을 만들고 위로는 궁궐을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생활물자를 충당하는 것으로 그 쓰임새가 지대한 바 있어 소나무의 금양이 지엄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소나무 보호는 정부시책 수행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간교한 세력층에 의하여 잘 지켜지지 못하였고, 그래서 엄한 죄목들이 이 사목에 나열된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도 소나무의 쓰임새가 크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으며, 삼남(三南)·동·북·해서(海西) 등 여섯 도에 봉산 282개 처, 황장 60개 처 그리고 송전(松田) 293개 처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소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소나무를 금양할 것이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숲을 보호하고자 한 노력은 있었으나 정치 및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어 그 규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규정이 엄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었는데, 가령 정약용이 지은 「승발송행(僧拔松行)」이라는 시는 나무를 심어 좋은 소나무숲을 사양한 중이 수영소교(水營小校: 수군의 장교)로부터 무례한 행패를 당하고 그가 심은 어린 소나무를 모조리 뽑아서 앞날의 우환을 미리 막는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점을 잘 나타내준다.
『송금사목』을 반포한 정조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궁가와 세도가가 좋은 숲을 점거하게 되자 서민의 삼림이용이 극단적으로 제한받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 점거되지 않은 숲을 공동의 힘으로 금양하고 세력가에 대항해 나갔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그 때 발달되었던 계(契)의 형식을 통한 단체적 자치기능이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정조 때를 전후해서 각지에 마을공유림이 확보되고 공동이용이 꾀하여졌다. 이러한 조직체가 송계 또는 금송계였다. 송계가 발달한 지방에 있어서는 삼림의 황폐가 방지되고 좋은 임상의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가치 있는 나무로 취급되어 삼림정책의 핵심적인 대상이 되었다. 소나무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 사는 나무로 우리는 장수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삼았다. 거대하게 자란 노목은 장엄한 모습을 보이고, 줄기·가지·잎은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며, 눈서리를 이겨서 항상 푸른 기상은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되었다. 애국가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하고 노래하는 것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강인한 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나무로서 온 국민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의 산수는 매우 수려한데, 여기에 소나무가 아름답게 수를 놓은 정경이 우리나라 자연미의 정형처럼 인식되어 왔다. 기암창송(奇岩蒼松)도 백사청송(白砂靑松)도 우리 민족의 기상과 정서를 길러온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사명당은 「청송사(靑松辭)」에서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松兮靑兮, 草木之君子, 霜雪兮不腐, 雨露兮不榮, 不腐不榮兮, 古冬夏靑靑, 靑兮松兮, 月到兮節金, 風來兮鳴琴)”라고 예찬하고 있다.
창송(蒼松)은 군자의 절개를, 녹죽(綠竹)은 열사의 지조를 나타낸다는 시조의 한 구절, 또는 “낙락장송들아 너희들은 어찌 홀로 서 바람 비 눈서리에 푸른가. 우리도 창천처럼 변하지 않겠다.” 하는 시조나 “백설이 건곤에 가득할 때 홀로 푸르리라”라든가, “설한 풍이 있은 뒤에 송백의 절개를 알겠노라.”하는 논어의 한 귀절은 소나무의 불변의 의지를 읊은 것이라 하겠다. 소나무는 물론 전체적으로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줄기 자체가 많은 주목을 받는다. 붉은 비늘로 몸을 단장하고 예술적으로 굽어올라간 줄기는 조각미술의 정취요,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솟아오른 푸른 용이 하늘에 뜬 구름을 안고 있다(地聳蒼龍勢抱雲)”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소나무의 줄기는 하늘을 오르는 용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때로는, 적룡(赤龍)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송피(松皮)는 일명 적룡피라고도 하였다. 소나무는 깨끗하고 귀한 것으로 하늘의 신들이 땅으로 내려올 때에는 높이 솟은 소나무 줄기를 택한다고 믿어졌다. 소나무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교통의 수단이 되어서 선(仙)의 분위기에 알맞았다. 솔잎을 씹으며 배를 채운다는 벽곡의 뜻도 이에 통하는 것이다. 『산림경제』에도 집 주변에 송죽을 심으면 생기가 돌고 속기(俗氣)를 물리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에 들어서자 한 그루의 푸른 소나무를 보고 방에 들어서자 장수의 약을 끓이는 숯불을 보노라(入門唯見一番松 藥爐有火舟應伏)”라는 시도 속된 경지를 크게 벗어나고 있다.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선생님은 약 캐러 산속에 가셨고, 지금 이 산속에 계시지만 구름이 깊어서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는 것도 역시 선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소나무는 불구(不垢)의 심정을 기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말을 소나무 그늘 아래에 매어놓고 시냇물소리를 듣는다(歇馬松陰聽水聲)”라는 것도 소나무숲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태도라 하겠다.
소나무의 꽃은 보잘것이 없다. 다만, 높은 자리에 서게 된 소나무인지라 그 꽃가루[松黃, 松花]마저 아름다움으로 눈에 비유되곤 하였다. 재매곡(財買谷)의 「송화유취(松花幽趣)」라든가, “봄은 저무는데 솔꽃가루 마구 술잔에 날아들고 속세를 멀리해서 거문고에 마음을 붙인다.”의 시에서는 솔꽃가루도 그저 둘 수 없는 지경이 표현되어 있다. “절은 흰구름 가운데 있고 중은 구름을 쓸지 않고 있다. 객이 와서 비로소 문을 여니 골짝마다 솔꽃가루가 한창이다(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라는 시는 골을 메운 노랑색의 황홀한 구름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이 소나무를 바라보는 눈은 비슷하였다. 솔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를 송뢰(松籟)·송운(松韻)·송도(松濤)·송풍(松風) 등으로 표현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상하였고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명약으로 생각하였다. “솔바람 산골물이 속된 생각을 씻어준다(松風澗水洗塵襟)”라든가 “솔바람 소리 멀리 들려오고 바람비 소리에 학의 꿈이 깨인다(萬籟銷沈 聽遠音 風雨五更驚鶴夢).” 또는 “시냇물 굽이굽이 돌아서 흐르고 솔바람 소리 끊임없이 들려온다(溪回松風長).” 등은 솔바람 소리에 매료된 청정의 지경이다. 신라의 화랑들이 한송정에 솔을 심고 깊은 산 속에서 심신을 단련한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리 3,000명이 각각 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지금은 울울창창해서 소나무의 끝이 하늘을 나는 구름에 이어지고 고선(古仙)은 멀리 가버렸지만 소나무만 남아 울울창창하다”고 읊었던 것이다. “소나무[蒼官] 숲은 푸르게 우거지고 솔숲에 노도소리가 깨어진다”라든가, 황희(黃喜)의 “강릉 달밤에 높고 높은 소나무가 푸른 연기 속에 솟아났다(落落寒松銷碧烟).”라는 시, “솔바람 맑게 나부끼니 옥고리가 흔들린다(松聲淸風搖環魂)”라는 시는 흰 모래밭에 이어 길게 숲을 이룬 소나무의 풍치를 연상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즉 “달밝은 한송정의 밤에 파도는 잔잔하고 경포의 가을은 깊어간다(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하는 송림과 달빛 바다의 미의 조화는 우리의 마음을 서늘하게까지 해준다.
『식송론(植松論)』은 소나무의 유형·무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묘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1428년에 왕이 건원릉에 행차하여 동지제를 지내고 말하기를 “능침(陵寢)에는 예로부터 송백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쓸데없는 나무를 뽑아버리고 송백을 심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소나무와 잣나무는 능원묘에 가장 어울리는 나무로 취급되어 이 능원묘의 주변에 심어진 해자림(垓字林)은 보호되었고, 민간인의 무덤 주변에 심어진 도래솔도 잘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묶여 있었다. 소나무는 시조에서 수없이 읊어졌는데, 한결같이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굳센 절개와 눈바람·서리를 이겨내는 지조와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정경이 소재로 되어 있다. 소나무는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쓰였는데, 신라 진흥왕 때 솔거(率居)의 황룡사 「노송도(老松圖)」는 신화(神畫)로까지 알려졌다. 김홍도(金弘道)의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이인문(李寅文)의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소나무를 소재로 한 유명한 그림이다. 그 밖에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소나무와 호랑이」·「소나무와 꿩」 등의 명화가 있다. 민화 가운데에서도 작호도(鵲虎圖)·해치도(海豸圖) 등은 오래된 소나무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솔 심어 정자라.’, ‘못된 소나무 솔방울 많다.’는 속담에서는 다른 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소나무에서 나고 소나무 속에서 살고 소나무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나무 중에서 소나무처럼 우리 생활에 물질적·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도 없으므로, 우리 민족은 소나무문화권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럽이 자작나무문화, 일본이 조엽수림문화(照葉樹林文化)를 내세우듯이 우리는 소나무문화라는 측면을 시인하고 있다. 소나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 때나 고요할 때나 항상 우리의 자연과 어울리는 특질을 가지고 있고 긴 세월을 두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데, 이것은 다른 나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소나무는 정중하며 엄숙하고 과묵하며 고결하며 기교가 없고, 고요하며 항상 변하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잘 어울리는 까닭에 우리 민족의 심성을 사로잡아 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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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10-29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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