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 4,18)
7월의 첫 번째 주일, 연중 제 14 주일인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가 겪게 되는 시련과 고통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의 시작이 바로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은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의 영을 통해 새롭게 일어서게 된 예언자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분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전하는데, 예언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그 순간을 에제키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에제 2,2-3ㄱ)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부르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하느님의 영이 자신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고 말합니다. ‘일으켜 세우다’라는 그 표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전적인 하느님의 뜻으로, 어찌 보면 거부하고픈 그분의 뜻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그 분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같은 반강제적 그의 예언직분은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는데 하느님이 예언자에게 하시는 말씀 안에 그 사실이 고스란히 묻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하고 말하여라.”(에제 2,3ㄴ-4)
하느님을 거역하는 반역의 민족,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해 이제껏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들이 과연 하느님의 사람 예언자가 왔다고 하여 돌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올 리 만무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처지는 어쩌면 불 보듯 뻔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앞길이 험난하고 지난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은 틀리지 않고 우리의 예상 그대로 예언자를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지난한 예언자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은 오늘 복음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구세주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수행해가는 가운데 겪게 되는 현실의 고난을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고향마을 방문이야기로서 예수님은 다시 찾은 고향마을에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는데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깜짝 놀라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ㄴ)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또 그분이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그 같은 능력의 비범함에 감탄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반응이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 완전 다른 방향으로 변화되기에 이르는데 그들이 하는 말에 그 변화가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처음의 놀라움에 이어 이렇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는 가르침을,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던 그들은 갑작스레, 돌연히 방향을 선회하여 예수님이 사실 그 출신성분이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어 그분의 모든 것을 깎아 내리고 심지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이 같은 변화가 놀라울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급변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이 본래 갈대와 같은 존재라 자신의 입장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 당연지사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급변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정말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에 회의감마저 갖도록 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던지 그들의 반응에 이렇게 응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결국 예수님은 고향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쫓겨나듯 고향마을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향해 가십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 예수님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하고 쓸쓸하며 처연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아 그리스도가 고향마을에서 냉대와 배척을 받아 쓸쓸히 퇴장하는 그 모습,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 같은 모습은 오늘 제 1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의 모습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예언자로서의 삶,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혹독하고 시련 가득한 삶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 말씀 역시 시련 가득한 예언자로서의 삶,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바오로는 그 같은 혹독한 삶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삶,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 가득한 삶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탄원하듯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했습니다.”(2코린 17,7ㄴ-8)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는 삶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너무나 혹독하여 그것을 없애주십사 하느님께 무려 세 번이나 청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청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의 뜻과는 정반대의 하느님의 뜻을 듣게 됩니다. 그 뜻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드러난다.”(2코린 17,9)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힘,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바오로는 순종하고 그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7,9ㄴ-10)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하느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나며,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온전히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한다는 그의 고백, 그러기에 나의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기며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은총으로 여기는 그의 믿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내가 약할 때, 좌절하고 실망하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강하심이 온전히 드러나기에 그 약함을 자랑하는 바오로의 믿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희망이며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오늘 영성체송의 시편을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약할 때에도 모욕을 받으며 재난과 박해를 겪는다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좋으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특별한 은총을 맛보고 깨닫게 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는 이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오늘 영성체송의 시편 말씀 그대로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의 삶을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함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