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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신애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2008년은 작가 백신애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첫 여성으로 ‘꺼래이’ ‘적빈’ ‘아름다운 노을’ 등의 작품을 발표해 근대문학사에 뚜렷이 각인된 작가 백신애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본보에서는 백신애의 작품세계와 그 생애를 몇 차례로 나누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작가 백신애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근대문학의 선봉에 선 작가 백신애의 업적을 기리며 기념사업을 지속해 가는 것은 지역문학계에서 해야 할 필연적 과제이며 당연한 의무이다. 먼저 백신애 작가의 연보를 토대로 그녀의 생애를 되짚어 본다. 작가 백신애는 1908년 5월 20일 영천군 창구동 68번지에서 아버지 백내유(白乃酉, 27세)와 어머니 이내동(李內東)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5살 위의 오빠 기호(基浩)가 있었다. 아명은 무잠(武潛), 호적명은 무동(戊東)이다. 8-10세(1915년-1917년)때는 병약하여 이모부인 김씨를 독선생으로 두고 집에서 한문을 배웠다. 11세되던 1918년에는 백무잠이란 이름으로 영천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했다. 1919년 12세되던 해 영천보통학교 3년 중퇴하게 된다. 중퇴 사유는 대구신명학교 전학이었으나 사실은 그녀의 병약한 건강에 있었다. 12-15세(1919-1922년)때는 집에서 한문수학과 함께 일본의 중학 강의록으로 공부했다. 15세 되던 1922년 12월 술동(戌東)이란 이름에다 출생년도를 1906년으로 고쳐 영천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학한다. 출생년도 변경 사유는 17세 이상만 입학할 수 있도록 한 조건 때문이었다. 1923년 16세인 3월25일, 영천보통학교 4년을 졸업한다. 같은 해 4월 28일,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 강습과에 40명 중 홍일점으로 입학한다. 17세인 1924년 3월 25일, 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영천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한다. 경북에서 첫번째 여교사이다. 18세인 1925년 3월 31일, 경산군 자인보통학교로 전임한다. 이때 이력서 구성명(舊姓名)란에 백신애란 이름이 보인다.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성청년동맹에 가입한다. 19세인 1926년 1월 22일, 겨울방학 중 영천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영천지회를 조직한 것이 탄로나 권고사직을 받고 곧 이어 상경하여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성청년동맹 상임위원이 된다. 2월 25일 천도교회관에서 경성여성청년동맹 2주년 기념식에 단독으로 집회 허가를 받아내고 대회를 혼자서 치른다. 이후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된다. 19세인 1926년부터 전국 순회강연 등 여성운동을 전개한다. 김천강연회는 시인 백기만(白基萬)이 주선한다. 백기만의 ‘씨 뿌린 사람들’에는 경북 출신의 문인들 중 고월 이장희, 육사 이원록, 백신애 3명을 친일하지 않은 독립지사로 기록하고 있다. 4~6개월동안 시베리아 방랑시기를 거쳤다가 두만국경(豆滿國境)에서 왜경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21세인 1928년에 병원에서 퇴원, 영천으로 돌아와 문학수업 겸 여성운동을 전개한다. 22세때인 1929년 1월 1일 박계화(朴季華)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나의 어머니>가 당선 1석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23세때인 1930년 3월, 온 가족이 경산군 안심면 용계동의 과수원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 5월경 일본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여 문학과 연극을 공부하지만 아버지가 학비를 끊고 귀국을 종용한다. 1931년 24세때 아버지의 엄명으로 귀국하나 부모의 결혼 강요에 못이겨 다시 도일하게 된다. 1932년 25세되던 가을에 귀국하여 동래고보, 대판상고 출신인 은행원 이근채(李根采)와 약혼한다. 1933년 26세되던 이른 봄에 대구공회당에서 이근채와 결혼한다. 1934년 27세되던 해 1월, 단편 ‘꺼래이’를 발표한다. 3월, 안심면 송전 마을 사과밭의 신축가옥으로 남편과 이사하고 5월, 단편 ‘복선이’ 발표, 8월 중편 ‘정조원’ 연재 1회, 10월, 단편 ‘채색교’ 발표, 11월, 단편 ‘적신’ 발표, 12월, 단편 ‘낙오’를 발표한다. 1935년 28세 되던 해 1월 소년소설 ‘멀리 간 동무’를 발표, 7월 31일~ 8월 1일, 동아일보에 꽁트 ‘상금 삼원야’ 발표, 8월 장편 ‘의혹의 흑모’ 연재 1회 연재, 단편 ‘악부자’ 발표, 12월 단편 ‘정현수’를 발표한다. 그해 12월 아버지가 일본 규슈 제국대학 병원에서 사망한다. 1936년 29세되던 해 1월, 삼천리사 초청 여류작가 좌담회에 참석한다. 이날 사회는 김동환, 참석자로는 박화성, 이선희, 모윤숙, 장덕조, 최정희 등 이다. 같은 달 단편 ‘학사’를 발표하고 7월, 단편 ‘식인(食因)’ 발표(‘호도’로 개작, 여류단편걸작집에 수록). 9월, 단편 ‘어느 전원의 풍경’을 발표한다. 1937년 30세 되던 해 6월 꽁트 ‘가지말게’를 발표한다. 31세 되던 1938년 5월 경 남편과 별거, 용계동의 친정으로 돌아온다. 6월25일에서 7월7일, 단편 ‘광인수기’를 조선일보에 10회 연재하고 7월, 단편 ‘소독부’를 발표, 9월, 단편 ‘일여인’발표한다. 9월 25일, 병원에서 퇴원하고 5일 후 인천항에서 중국 칭따오(靑島)로 간다. 10월16일부터 약 40여일에 걸쳐 상해에 도착 후 오빠 백기호와 만난다. 11월15일 상해 체류 중 집사를 시켜 이혼 수속을 밟게 한다. 1939년 32세 되던 5월 단편 ‘혼명에서’를 발표.하고 5월 말경 위장병으로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한다. 6월 23일에 사망하며 화장한 유골을 칠곡군 동명의 가족묘지에 안장한다. 11월, 유작인 중편 ‘아름다운 노을’이 여성誌에 3회 분재된다. 한일뉴스 |
첫댓글 백신애 작가가 발표한 수많은 작품들.... 제가 읽어본건 하나도 없네요~~~ 부끄럽끄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