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김규식은 우익인사였지만 좌파인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만들어 활동했다.
1910년대 초부터 김규식은 항일무장 투쟁에 뛰어들었다.
김규식은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1914년 가을, 류동열, 이태준 등과 장래의 독립군 또는 게릴라부대를 양성할 초보적인 군사학교를 운영할 목적으로 외몽골의 우르가에 갔다.>
*프랑스 파리
*파리강화회의 (1919. 3)
파리 9구 샤토당가 38번지 건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초의 외교대표부 -파리위원부 사무실)
-주권도 정부의 실체도 없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끊임없이 문건을 만들고 모임을 만들어 조선의 현실을 알렸다.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필요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진명 / 리옹 3대학 한국학과 교수>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놓고 나서 김규식에게 공식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주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규식대표단이 파리에 온 것이 상해의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큰 계기가 된 것입니다.
<Coree Libre -당시문건제목>
일본은 김규식일행에 위협을 느꼈다.
때문에 프랑스경찰에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경찰조사 보고서 내용
그 사람들은 하루종일 아파트에 있으면서...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하루종일...
<이진명교수 / 프랑스 리옹 3대학 한국학과 교수>
하루종일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여러가지 외교문서를 계속 만들어서 프랑스 외무성에 보내고, 강화회의 의장이 프랑스 대통령 크레망스 였는데
강화회의 의장한테도 보내고 세계열강들 대표에게도 여러가지 문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의 문서들이죠,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문서를 작성해서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