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좌우가 손을 잡다
(신간회와 근우회)
1920년대 중반 국내외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 사이에 갈등과 마찰을 빚고 있을 때 '적전 분열'을 우려하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이념과 신념을 초월하여 단일 민족운동 연합 전선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는 3,1운동 때 신분과 계급, 지역과 종파 장벽을 극복하고 전개된 '거족적 항일 독립운동'의 맥을 이으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사회주의 경향을 취하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들과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새로 결성될 조직의 지도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타종파 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어야 했는데 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역임한 원로 지도자 이상재가 거론되었다. 당시 이상재는 78세 고령으로 항일 투쟁을 추구하는 사회단체 전면에 나서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고 그래서 처음엔 사양하였으나 <조선일보>기차 신석우가 찾아와 "선생님이 안 나오시면 학생들이 뒤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회장 하시는 것이 그렇게 두렵습니까?"라고 하자 두말 않고 "그럼 나가지"하고 회장직을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신간회다. 1927년 2월 창설되었는데 모임 이름을 신간회로 한 것은 "뿌리나 가지는 여럿일 수 있지만 줄기는 하나'라는 의미로 그 동안 있었던 민족운동 단체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접고 하나로 뭉쳐 민족의 자주 독립을 추구하자는 취지였다. 그렇다고 아무 단체나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신간회는 좌표를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봉건주의' 민족운동으로 설정하였다. 여기에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좌파 세력(총독부 정책에 타협하는 개량주의적 우파 세려과 달리 이들은 총독부나 일제 정책에 비타협적 노선을 취하였다)이 참여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은 처음에 민족주의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1926년 1월 1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겪으면서 상당 부분 조직이 와해되어 합법적인 대외활동 조직이 필요했고, 1차 공산당 사건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화요회 계열의 정우회가 1926년 11월 계급주의 노선을 철회하고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할 수 있다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 신간회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민족운동가들도 민족주의 좌파 계열 몫으로 신간회에 대거 참여하였는데 회장으로 선출된 이상재를 비롯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출신인 조병옥이 적극 참여하였다. 이외에 3,1운동에 참여했던 박동완, 이갑성, 정춘수, 이동욱과 김활란, 김영섭 등이 중앙위원회 간사로 참여하였는데, 이갑성을 제외하곤 모두 감리교 출신인 것이 눈에 띈다. 이는 그만큼 당시 감리교회가 사회와 민족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기독교 측 핵심 지도자로 활약했던 조병옥은 미국 유학 시절 경제학이 전공이지만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기독교와 사회주의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때문에 선교사들의 눈 밖에 나서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밀려나 기독교청년회 청년부 간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후(1929년)에 진보적 기독교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기독신우회'를 창설하고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신간회의 자매 기구격인 근우회는 신간회보다 3개월 늦은 1927년 5월에 창솔되엇다. "무궁화 친구"라는 단체명에서 느낄 수 있듯 근우회 역시 민족운동을 지향하였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봉건주의 민족운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간회와 같지만 여기에 '여성 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다르다. 근우회는 선언문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여자는 벌써(이미) 약자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해방 하는 날, 세계가 해방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에서 여성 차별 법령 철폐, 조혼 금지와 결혼의 자유, 여성 노동장 임금 차별 철폐, 농촌 여성 경제생활 개선 등 적극적인 의미의 여성 권익 향상운동을 추진하였다.
근우회도 사회주의 계열인 여성 동우회와 기독교 여자 청년회를 중심한 기독교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선을 비롯하여 차사백, 방신영, 유각영, 황신덕, 김영순, 김활란, 이현경, 홍에스더 등이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차미리사, 양매륜, 손메례, 최활란, 이효덕, 신알벨토, 김영순 등이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숫자로 보면 여성동우회 즉 인사보다 기독교 인사들이 배 이상 많았으며 그중에 감리교 여성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기독교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애국부인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인사들과 3,1운동 후 조직된 기독교여자청년회, 기독교여자절제회 등 초교파 여성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단일 민족운동전선' 신간회나 근우회에 참여한 단체나 개인은 물론이고 이를 보는 일반 사회도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두 단체의 운명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우선 일제 경찰 당국은 단일 민족저항운동 세력의 확산을 경계하였다. 1927년 신간회와 근우회가 창설될 때는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경찰 당국은 1928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일으켜 재차 국내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는데 조사 결과 공산당원의 40%가 신간회 혹은 근우회 회원인 것을 알고 이후 두 단체의 집회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리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을 계기로 신간회와 근우회 회원들이 전국적인 민중 시위를 계획하고 있음을 알고 두 단체 지휘부를 검거하였다. 이 일로 인해 신간회와 근우회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들어갔다.
여기에다 신간회나 근우회에 참여하였던 사회주의 계열의 입장 변화도 두 단체 와해를 촉진하였다. 신간회나 근우회는 1927년 처음 출발할 때 민족주의자 혹은 기독교인들이 전면에 나서 운동을 이끌었으나 1년 만에 주도권이 사회주의 쪽으로 넘어갔다. 신간회는 창립 1개월 만에 회장으로 추대되었던 이상재가 별세하였고, 그 후임으로 사회주의 계열인 허헌이 회장이 되면서 운동 노선과 방법론이 보다 폭력적인 내용으로 바뀌었고 그때문에 기독교측 인사들이 대거 신간회를 떠났다. 근우회 역시 처음엔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지만 1928년 지방 조직화 과정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대거 참여함으로 밀리기 시작하다가 1927년 7월 전국대회에서 허헌의 딸인 허정숙이 집행위원장이 되면서 사회주의 노선을 적극 취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측 인사들은 대부분 근우회를 떠났다.
결국 신간회나 근우회는 창설 2년 만에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좌파' 성향으로 바뀌면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대거 이탈하였고 게다가 2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광주학생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주의 지도부가 투옥되자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지휘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은 신간회나 근우회를 '소부르주아적 정치운동 집단'으로 그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신간회를 해소 하고 지하운동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체되었고, 근우회는 이보다 앞선 1930년 말ㅇ에 해체되었다.
비록 4년 단명으로 끝났지만 신간회와 근우회는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3,1운동 직후 일제의 간교한 민족 내분 정책에 의해 민족운동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이념과 종파를 초월하여 사회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 세력들이 단일 민족운동 전선을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07년의 신민회 운동이나 3,1운동에서 확인되었던 바,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파나 이념을 초월하여 연대한다"는 민족의식이 신간회와 근우회를 통해 재확인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사에서 신간회와 근우회는 민족의 자주 독립을 '시대적 명제'로 인식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념이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였던 '공동 투쟁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회주의와는 갈등과 증오, 반목과 대결 구도 속에 80년 세월을 지내온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가 우호적인 관계에서 손을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간회와 근우회 '4년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존재 이상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