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일요일 작은누나가 갖다 준 찐옥수수. 어린 시절 누나들과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재잘거리며 노래 부르런 추억이 그립다. 그때 부르던 동요들이 지금도 아이들에게 많이 사랑받는 이유는 노랫말이 예쁘고 아이들이 노랫말을 상상하며 마음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옥수수는 강원도 산간에서 생산되는 찰옥수수가 쫄깃하고 맛있다. 오늘 낮 정비를 마치고 잠시 시운전 겸 야외로 드라이브하다 서면 서상리 들녘에서. 사진의 옥수수 수염으로 보아 아직 좀 이르다. 저 상태에서 1주일 정도 더 여물면 딱 맛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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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수수 연가(戀歌)*
어린 시절 산골에서 자란 나는 옥수수에 얽힌 인연이 눈물겹도록 살갑다. 이즈음 어른 키보다 훌쩍 자란 옥수수는 한낮의 열기에 노곤한 잎을 드리운 채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운명공동체'라며 아래 대궁에는 마디마다 뿌리를 땅속으로 길게 내리뻗어 지친 몸을 지탱하고 윗 대궁에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옥수수와 갓 고갱이만 생긴 옥수수가 마치 첫돌이 지난 아이를 등에 업고 둘째 아이를 밴 어미처럼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우리 집 여덟 식구의 끼니를 책임지는 수호신이었다.
해거름 산 그림자 내리면 엄닌 집 뒤 수리봉 자락 아래 자리한 옥수수밭을 향하여 비탈길을 오른다. 옥수수가 여물어가는 여름날이면 엄닌 온종일 농사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옥수수밭을 찾았다. 그때마다 나와 우리 집 흑구도 꼭 따라나섰다. 엄닌 허리에 *다래끼를 차고 옥수수가 꽉 들어찬 밭이랑을 따라다니며 알맞게 여문 옥수수만을 골랐다. 풋수염(꽃술)이 달린 옥수수는 연하고 달콤하지만, 아직 알갱이가 덜 자라 깊은 맛이 없고 옥수수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떨어진다. 반면 수염이 말라가는 옥수수는 물을 넉넉히 붓고 삶으면 구수한 맛은 풍부하나 알갱이의 표피가 거칠고 단맛이 덜하다. 맛도 식감도 풍부한 옥수수는 손톱으로 알갱이를 누르면 뽀얀 녹말이 톡 튀어나오며 이제 막 여물어 수염 끝이 살짝 마를 무렵이다.
엄닌 키 작은 내게 옥수수를 따 보라고 대궁의 허리를 뚝 끊어 드리워주며 "막내야~ 예 와서 이거 하나 따보렴" 하며 옥수수밭 길동무의 호기심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나는 재빨리 달려가 옥수수를 따 들곤 "엄마, 이건 내가 먹을 거다~" 하며 밭고랑에 서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흑구도 덩달아 날뛰며 꼬리를 쳤다. 엄닌 눈빛만으로도 알맞게 여문 옥수수를 고르는 점쟁이였다. 여덟 식구가 끼니를 때우려면 다래끼가 허기진 엄니의 허리를 조를 만큼 축 처져야 엄닌 옥수수밭을 나섰다. 어미의 고단함도 모르는 어린것이 엄니 앞에 서서 마냥 좋아 깡충거리며 비탈길을 내려올 때면 그늘진 엄니 얼굴에도 옥수수밭 옆 도랑 가에 핀 물봉선화가 되었고, 뒷산 수리봉에서 부~흥 부~흥 울어대는 부엉이 울음소리는 어서 빨리 부자가 되어 끼니 걱정 하지 말라는 듯이 엄니의 종종걸음을 떠밀곤 어스름 저녁 하늘로 흩어지곤 했다.
집에 돌아오신 엄닌 사랑방 부엌 앞에서 부랴부랴 옥수수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어린 나도 한몫 거들며 옥수수 껍질로 인형을 만들곤 했다. 겉껍질을 벗기고 얇고 고운 속 껍질만을 골라 옷감을 마름질하듯 반을 접어 펼친 뒤 그 위에 분홍빛 꽃술(수염)을 손가락으로 곱게 빗어 속껍질 사이에 쟁여 넣는다. 그리곤 한복 치마를 입히듯 펼친 껍질을 돌돌 말은 뒤 허리띠인 양 껍질을 가늘게 찢어 묶으면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은 듯이 어느새 눈앞에는 고운 머릿결을 찰랑찰랑 드리운 예쁜 소녀 인형이 태어났다.
언제나 인형은 두 개였다. 분홍빛 꽃술 인형은 여자아이였고 연초록 꽃술 인형은 남자아이로 나였다. 분홍빛 인형은 그날 기분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곤 했는데, 3학년 무렵까지는 늘 ㄱㅅ이었다. ㄱㅅ이는 여자애 중에 공부를 잘하고 얼굴엔 주근깨가 좀 있었지만 나름 밉지 않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 뒤 학년이 올라가며 변심해 분홍빛 인형은 늘 눈웃음을 생글생글 짓는 'ㅇㅈ'가 되기도 했고, 도시에서 전학을 온 새침데기 'ㅁㄹ'이나 얌전한 'ㅅㄷ'이가 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성에 대한 속마음을 보이며 관심을 받고 싶었던지, 여자애들에게 곧잘 관심(?) 어린 심술을 부리곤 했다. 그렇게 인형을 만들 때면 누나들은 장난삼아 "넌 이다음에 커서 누구한테 장가갈 거야? " 하고 놀리듯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ㄱㅅ이한테 갈 거야!" 하곤 했다. 그러면 누나들은 "우리 막내 얼른 키워야 하겠네!" 하며 깔깔거렸다.
그렇게 내가 인형을 만들어 놀고 있는 사이 엄닌 안마당 부엌 앞에 놓인 깡통 화덕에 양은 솥을 올리고 장작불을 지펴 옥수수를 삶기 시작한다. 옥수수가 잠길 만큼 넉넉히 물을 붓고 한소끔 끓으며 김이 오르기 시작하면 풋옥수수 특유의 달큰한 냄새는 안마당을 채운 뒤 흑구와 외양간에서 저녁 여물을 기다리며 벌렁이는 누렁이의 콧구멍을 휘돌아 초가지붕 위 초저녁 달빛을 받은 박꽃 무리의 잠을 깨우곤 별들이 총총한 까만 밤하늘로 흩어지고 바깥마당 멍석 위에 누워 바로 위 막내 누나와 재잘거리던 나는 부랴부랴 엄니에게로 달려간다. 그때마다 엄닌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막내 배고프지?" 하며 솥뚜껑을 열고 옥수수 하나를 꺼내서는 반을 뚝 잘라 고갱이에 나뭇가지를 꿰어 작은 쪽은 누나 몫으로, 큰 쪽은 내 손에 쥐어주시는 막내의 특권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면 나는 졸졸 따라붙는 흑구를 발로 밀어내며 겅중겅중 뛰어 다시 멍석 위로 돌아와 막내 누나와 동요를 부르며 쫄깃하고 달콤한 옥수수 별미 여행을 떠난다.
그러기를 잠시 뒤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옥수수는 집 뒤 우물 샘 항아리에서 꺼낸 농익은 열무김치와 화롯불에서 풋고추와 호박을 넣어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를 호위병 삼아 멍석 위에 도열한다. 여덟 식구가 둘러앉아 시끌벅적 삶은 옥수수로 저녁상을 받을 때면 고난한 세월의 그림자도,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도 잊은 채 *오봉에 담긴 푸짐한 옥수수만큼 어미의 사랑도 더 깊어진다. 엄닌 돌아가며 어린것들의 눈빛을 살피며 "너도 좀 더 먹고, 너도 좀 더 먹어라" 하시며 옥수수를 잘라 이리저리 나눠주신다. 어둡고 힘들었던 세월에 여러 남매 둔 어미가 든든하게 끼니를 채우셨으랴! "어떤 날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헛헛하여 남은 게(음식) 아무것도 없는 줄 알면서도 부엌에 나가서 빈 솥을 열어보기도 했다" 라는 어머니. 그러니 그저 자식들 틈에서 먹는 시늉만 하시다가 상을 물리는 일이 다반사였지 싶다. 그렇게 한여름 밤 저녁이면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밤새 소리를 벗 삼아 가난한 농부의 여덟 식구 삶의 세레나데는 화로에서 피어나는 쑥 향기를 타고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엄니가 남겨 준 옥수수를 들고 멍석 위에 누워 밤이 이슥하도록 까만 밤하늘을 유영하는 반딧불이와 별자리를 찾으며 누나들과 재잘거리곤 했다. 그때마다 왠지 모르게 맨 처음 부르는 노래는 늘 <오빠생각>이였다. 지금도 눈을 감고 불러보면 그날의 추억이 오롯이 그려지며 하늘에 계신 엄니와 엄마보다 먼저 하늘로 떠난 막내 누나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짓곤 한다. 매년 옥수수가 익어갈 여름이면 내 유년 시절에 누나와 불렀던 그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흘러나온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2006년 8월
*다래끼: 1.2년생 어린 싸리나무를 잘게 쪼개어 바구니를 역는 방식으로 타원형으로 입구는 좀 좁게 하여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바구니다.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아 주로 싸리나무를 사용했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들로 산으로 나물 뜯으러 다닐 때 많이 사용한다. 또 다래끼보다 훨씬 작은 종다래끼 라는 도구가 있는데, 이것은 씨앗을 넣어두거나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내 어린 시절에는 꼬맹이들이 허리에 차고 봄나물 캐러 다닐 때 따라다니기도 했다.
* 오봉(=쟁반): 당시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씀(강원도 방언임)
* 요즘은 옥수수 종자를 개량하여 예전 내 어린 시절 옥수수보다 평균 키가 작다. 키가 큰 옥수수는 태풍 등 바람에 쉽게 꺽이고 옥수수 이삭으로 가야 하는 양분이 손실되어 성장이 더딘 단점이 있다.
※ 내가 사는 시 정부 소식지에 투고되었던 일기 글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는 75년에 전기가 들어온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었다. 3남3녀(ㅎㅎㄴㄴㄴㅁ)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엄니와 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맨 위 두 형은 나보다 22.18살 차이가 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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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이 노래를 부르던 시기와 맞지 않지만 통기타 멜로디와 고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노래가 가슴에 와 닿는다.
6070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영상과 이선희의 맑은 음색이 이 노래의 맛을 살려주는 듯하다.^^
첫댓글 https://youtu.be/TGYs1OsItH8?si=X-55EZQzzsnslg-e (오빠생각/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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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글은 해당 게시판에 옮겨 두었음(2024.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