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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7세) - 4월 14일(화)
- 장소 : 과천과학관 전통예술관 / 9시 40분 출발합니다. 늦지 않게 등원시켜 주세요.
매월 1회씩 이루어지는 역사탐방!!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해 배우면서, 우리 선조님들의 뛰어난 예술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곡우가 다가오느라 대지에 농사의 단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과천 과학관內 역사체험관에 다녀 왔어요.
청정지역 청계산자락에 위치한 한결어린이집內 자연학습장 1,100여 평의 먹거리 농장 녹색지대는...
신선한 공기와 햇빛이 드는 자연에서 부모와 교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하며 온몸으로 뛰어노는 곳 입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양육원칙 10’ ☞ 여기를 클릭해 보세요.)
자존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 자세로, 자존심은 작은 웅덩이지만 자존감은 넓은 호수로써 존재의 깊이를 가지게 됩니다.
자연이 어린이들의 스승인 한결어린이집은, 아이들의 건강한 식단으로 원내에 1천1백여평의 자연학습장 먹거리 농장을
직접 관리하며,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청계산자락의 드넓고 청명한 하늘아래 위치하여, 흙의 향기를 마음껏 맡고 밟으며
뛰어 놀수있는 친환경 숲속나들이 활동 생태놀이터로, 천연적인 산림욕장 산책로 또한 한결어린이집 문을 나서자 마자 바로
“교실 밖 교실” 돌멩이, 솔방울, 나뭇잎, 나뭇가지, 민들레 갓털불기 등의 자연재료를 늘 접할수있고, 곤충과 식물의 생태를
가까이 관찰함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수 있는 5감각 체험위주의 과천도시농업포럼 시범모델 지정 생태 어린이집으로써,
도심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늘 자연과 접하며 성장하도록 진지한 고민을 실천하고자, 한국원예대학 도시농업지도자
과정 및 아시아에서는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채택한 미국 자연과학 분야의 명문 Texas A&M 주립대학교의 어린이들을 위한
자연 및 생태전문 교육프로그램(Junior Master Gardner)을 자연과 환경, 과학 등의 교과목에 연계하여 발표력과 리더십을
길러주는 "자신감 UP 주니어 리더십 스피치" 프로젝트 생태 스토리텔링 통합 프로그램의 메카 한결 어린이집입니다.
한결어린이집에는 우천시에 아이들이 안전하게 운전자의 시야에서 탁 트이게끔, 노랑색 비옷을 비치하였습니다^^
노랑색 우비를 입고 가니, 예쁜 병아리들 같아요~~
질서있게 이동하는 우리 친구들을 형님들이 칭찬해 주었어요^^
국립과천과학관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이 마침 '과학의 날' 이라고 여러가지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우리는 2층에 있는 전통과학관에 왔습니다.
입구 천정에 있는 별자리!!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별자리도 달라진다고 해요..
과천 과학관 도착 후 우비를 접어 가방에 넣고 과학관을 탐방하였어요.
전통 과학관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한글을 창제하신 이도 세종대왕 할아버님의 소중한 문화유산 훈민정음입니다.
옛날에는 시간과 계절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별자리를 통해 계절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별자리가 다름을 알 수 있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만원짜리에 있는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전문 관측기로,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 먼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은 해시계도 있지만 물시계도 있어요.
물시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영상과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았어요.
한옥의 구조와 좋은 점에 대해 알아보았어요...한옥은 200년이 지나도 견고하다고 합니다.
황토와 나무로 지어진 한옥은 공기 순환이 좋아 건강에 좋고 아토피가 있는 친구들에게도 좋다고 합니다.
한옥 내부로 들어가서 온돌구조에 대해 알아보았어요...온돌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난방장치입니다.
우리 민족의 예술혼을 알 수 있는 에밀레종입니다.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은 현대에서도 만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동양의 각 종소리를 들어봄으로써 우리나라 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었어요.
※참고로 올립니다: 이순신 장군 쌍룡도, 보물 장검과 참도
★실제로 전투에 나갈 당시 이순신 장군께서 사용하신 쌍룡도, 이순신 장군의 분신같은 보검이지만 아쉽게도...
서로 다른 한쌍으로 이루어져있다. 조선왕실 궁내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실종되었다.
(일본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함)
이순신 장군의 칼, 장검과 참도
가장 유명한 185cm 의 장검
1593년 태구련과 이무생이 제작했다는 그 쌍수도
위 장검은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현충사(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유품이다.
1959년8월24일 보물 제326-1호로 등록돼 현재 독립기념관이 관리 중이다.
이 칼의 특징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전장에서 휘둘렀다는 것. 길이만 자그만치 1m97.5cm로 웬만한 장수들은 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남색 천을 십자(十)로 감아 칼날 끝에 덩굴 무늬를 새긴 것이 인상적이다. 칼등에는 홈이 패어 있고 손잡이는 매우 길어
한 손용이 아닌 두 손용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칼집 끝은 은으로 돼 있는데 어깨에 찰 수 있도록 끈도 달려 있다.
이 것은 칼에 적혀 있는 문구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을 느끼게 합니다.
三尺誓天(삼척서천)...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山河動色(산하동색)...산과 강이 떨어지고
一揮掃蕩(일휘소탕)...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血染山河(혈염산하)...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당시 명수로 유명했던 태귀련과 이무생이 1594년 제작했다고 검신에 적었다.
이순신 장군의 위풍과 얼이 스며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칼은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 장군께서 사용하던 것으로, 장군다운 위풍이 서려있는 유물이다.
충무공의 거북선 이야기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위기에서 구국일념으로, 촛불같이 꺼져가는 나라를 목숨바쳐 구하신 7천 여만의 자부심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존경받는 위인중에 한분이신, 성웅 이순신 장군 할아버님의 난중일기와 명량해전의 돌격 거북선입니다!
거북선의 내부를 살펴 보았어요.
우리 나라 화약 무기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어요.
역사탐방!! 어려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결어린이들에게 조상님의 빛나는 얼과 지혜를 다시금 되새겨보는 진지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전통과학관도 둘러보면서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지혜와 나라 사랑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대한민국은 우리가 지킬거예요^^
우리는 미래의 과학자! 대한민국의 꿈! 이랍니다^^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넘는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약 세계적인해군 제독으로 명성을 높였고,
일본국의 10대 영웅 중 한 사람이 되었다.도고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출처: [수요 산책] 12명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천만 번 말해도 부족하다. 장군의 무한한 애국애족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진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충무(忠武)란 공신 호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충무라는 공신 호를 받은 이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열두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순신 등 고려 이후 12명 시호받아
공신은 왕조 시대에 국가나 왕실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임금이 내린 시호(諡號)다.
이는 결국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제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왕조 시대의 공신 호를 아직도 쓰는 것은 사실 사리에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공신제도는 고려 초부터 시작됐다.
조선 시대에는 개국공신을 비롯해 28종류의 공신이 있었다.
이 가운데 충무는 국가에 공이 큰 무신(武臣)들에게 국왕이 내려준 시호다.
그 대표적 장수가 이순신이다. 다시 말해 충무공은 이순신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충무공하면 곧 이순신을 떠올리게 된 데는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도 있다.
역사학자나 교사들이 '충무'란 공신 호를 받은 사람이 이순신 장군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은 고려 시대에 세 사람, 조선 시대에
아홉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은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강릉 최씨 시조인 최필달(崔必達)이다.
그 다음은 평장사를 지낸 박병묵(朴炳默)이고 또 한 사람은 공민왕 때의 명장 지용수(池龍壽) 장군이다.
조선조로 들어서 가장 먼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영무(趙英茂)다.
그는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고려 말 개성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암살한 인물인데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두 번째 충무공 호를 받은 사람은 이준(李浚)이다.
그는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둘째 아들로서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예종 초에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해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세 번째 충무공은 '소년 장수'로 유명한 남이 장군이다.
남이는 세조 때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준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 1등에 올랐다.
여진 정벌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불과 27세에 병조판서가 됐다가 유자광(柳子光)의 참소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남이와 그의 옥사를 다스린 이준의 시호가 같은 충무공이었으니 공교롭다.
네 번째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이니 긴말하지 않겠다.
다섯 번째 충무공은 이순신과 같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시민(金時敏)이다.
그는 진주목사로서 임진년(1592년) 10월5일 겨우 3,800명의 민군을 거느리고 7일간의 격전 끝에 2만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한산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대명사로 쓰지 말고 이름 붙여야
여섯 번째 충무공 이수일(李守一)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고 1602년 병마사로 여진족을 소탕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출정해 반군을 대파했다. 뒷날 형조판서를 지냈다.
일곱 번째 충무공 정충신(鄭忠信)도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로 공을 세웠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웠다.
여덟 번째 충무공 구인후(具仁후)는 인조의 외사촌 형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했고 나중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아홉 번째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는 광해군 때 총사령관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후금정벌에 나섰다가
아깝게 전사한 장군이다.
참고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이처럼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여러 명 있기 때문에 충무공을 이순신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써서는 안 된다.
충무공이라는 공신 호를 사용할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이나 '충무공 김시민'처럼 반드시 그 뒤에 본명을 붙여야 옳다.
※세계인이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는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 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해군중장 G. A. 발라드는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며"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토마스 브레너는 "나는 35년 동안 역사를 공부했지만 이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
이렇게 훌륭한 분이 안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나의 아들이 해군인데 그 아이도 이순신을 못들어 봤다고 한다.그래서 아들에게도 이글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전했다.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青柳南冥),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장군이 만약 나의 함대를 갖고 있었으면 그는 세계 해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
실제로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도고 헤이하치로보다 이순신장군이 더 비중있게 소개되고 가르친다.
한산도대첩에서 개 털린 일본 최고의 명장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순신장군의 탄생일마다
존경의 표시로 한국을 방문한다.
중국의 한 학자 장웨이는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북경대 강의에서 거북선을 설명 후, 이순신장군을 찬양한다.
게다가, '만약 청나라때 영웅 한명을 살릴 수 있다면 누구를 살리겠는가'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진 후
학생들이 제갈공명, 한신, 항우 등 시대에 따라 당대 최고의 영웅들을 말할때
이 학자는 모두 틀린 대답이다하고 '그 영웅은 이순신장군'이라 한다.
만약 이순신장군이 중국에 있었더라면 중국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강대국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전세계 해군 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법을 가르친다. 출처: (문화재단이사장의 글에서 인용)
그래서일까? 이 나라 바다는 지금 그 분이 너무도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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