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하늘이 내린 재상’으로 칭송받는 류성룡의 자취를 장대한 드라마로 그려낼 것이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는
당대인들의 고뇌와 잘못된 판단, 그리고 극복의 의지를 현실감 있게 그렸다.
그리하여 역사의 과오를 꾸짖고(懲) 미래의 위기에 대비(毖)하는 지혜와 통찰을 구하려고 하였다.
‘역사’는 과거의‘정치’이고 ‘정치’는 현재의‘역사’다!
동서 붕당으로 인한 조선통신사의 내부 분열,
파천(播遷 임금이 수도를 버림)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
몽진(蒙塵 임금의 피난)하는 왕조에 대한 백성의 적대감,
난리 통에도 사회지도층의 의무를 외면한 양반층,
조선군의 무능함,
그리고 대안을 둘러싼 조정의 갈등...
대하드라마 <징비록>은
500년 전 조선을 배경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고민과 이슈를 환기시킨다.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선조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중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어머니 안동 김씨의 친정인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서림에서 출생하였다.
사복시정 유소(柳沼)의 4대손, 유자온(柳子溫)의 증손자이다.
조부는 군수 류공작(柳公綽)이며,
친형은 류운룡(柳雲龍)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런데 유성룡은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스승인 이황이 양명학을 사학(邪學)이자 사문의 화라고 비판하며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도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를 비판한다.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는 동인에 가담하였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 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정여립의 사건으로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였다.
이산해 등을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유성룡과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유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유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했다.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
1590년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수는 없다며
류성룡과 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그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왜(倭)가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다.
이 중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그 결과 이순신이 조선을 왜(倭)로부터 구원하였다.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따라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정확하게는 북행하여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또한 왜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여러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왜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왜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7년 이순신이 역모를 당했을 때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몹시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류성룡은 선조 앞에서 직접 이순신을 변호하였으나,
선조는 1월 류성룡을 경기 지방에 보내 순찰토록 했다.
류성룡이 한달 뒤 돌아와보니
그 사이에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류성룡은 사직을 결심하고
2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무려 1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순신을 옹호하여
이순신은 간신히 참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조치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하여 조선을 또다시 구하게 된다.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倭)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저서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남계서원 삼강서원 도남서원 빙계서원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그분은 국가 위기를 극복한 리더이다.
그분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과 지혜가 있다.
첫째, 인재등용의 혜안을 지녔다.
이순신이나 권율을 기용한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나
인재를 구할 때 폭넓은 시각으로 그 사람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둘째, 천심과 민심을 아울러 헤아릴 줄 알았다.
하늘의 순리와 인심의 가는 방향을 세심히 살펴
전란기에 애민정신을 실천해
국민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려 했다.
셋째, 외교적인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었다.
그는 명나라에 원군을 청할 때 구걸하지 않고
임진왜란 원인이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내달라”는 일본 요구를
조선이 거절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明나라와 의리를 지키려다 일본의 침입을 받았기에
明이 조선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넷째, 항상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지도력을 행사했다.
언제나 어떤 판단, 결정에도 나라 사랑이 우선했다.
개인적 私心을 버리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펼친 애국심은
길이 길이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XML: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