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없으면 올 수 없다는 땅, 미얀마.
자매끼리 여행 한번 같이 가자는 언니의 권유에 무조건 따라 나서긴 했지만, 같이 간 일행 누구도 어떻게해서 이 여름 우기에 미얀마를 가게 되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이 여행을 가자고 주선했던 사람은 참석하지 않았다나. 어쨌거나 굳이 인연을 찾자면 전생에 지나가던 탁발 스님에게 시주를 한 공덕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미얀마까지 직항기가 없어 태국 스완나폼 공항에서 환승을 하는데 무려 4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전날 밤 12시에 경주에서 인천공항까지 직행 버스를 타고 올라와 다시 태국까지 5시간 반을 비행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정말이지 왜 이 고생을 하며 불탑 구경을 하러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항 안에 있는 발마사지 샵에서 발뿐 아니라 어깨도 마사지를 해준다고 주인 여자가 잡아끄는 바람에 못이기는 척 들어가 발을 맡겼다. 이거 자꾸 하면 중독되겠다 싶을 정도로 온몸의 피로가 한 순간에 싹 풀리는 듯 했다. 태국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세 가지 학교가 있는데, 원숭이 학교, 코끼리 학교, 마사지 학교라고 하더니 내게 마사지를 해 준 아가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게 아마 그 학교에서도 우등생이었으리라.
우리 시간으로 밤 10시가 넘어 미얀마 밍글라돈 공항에 도착하였다. 가이드로 나온 사람은 아들뻘인 젊은이였다. 자신도 우연히 미얀마 배낭 여행을 왔다가 무슨 인연인지 발목이 잡혀 가이드가 되었다며 미얀마에 뿌리를 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가 문제였다. 여행사는 분명 전일정 준특급호텔이라 약속하였는데, 내게 배정된 방은 얼마나 비워둔 것인지 방에서 곰팡내가 나고 수도꼭지는 녹슬어 틀어지지도 않았다. 언니가 묵은 방은 에어컨이 들어오지 않아 밤새 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가이드를 만나자 항의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 일행은 신문의 칼럼에서 자주 보는 쟁쟁한 노교수님들이며 정부에서 일을 하셨던 분들이라 얼렁뚱땅 넘어갈 분들이 아니었다. 어찌나 호통을 치시는지 젊은 가이드가 자기 탓도 아닌데 고개도 못들고 야단을 맞는 양이 오히려 민망스러워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덕분에 그 날로 별 4개짜리 호텔로 옮겨갈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이드에게는 이번 투어 손님들이 최악이었을 것이다. 교수님들이 계속 쏟아내는 질문 공세에 용케 척척 대답을 하는 그 젊은이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미얀마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숫자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면 그가 얼마나 미얀마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으며, 자기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새삼 그 젊은이가 사랑스럽고 믿음직해 보였다. 흔히 가이드들 사이에 선생님 그룹이 질문 많고, 말 안 듣고, 잘 따진다고 인기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교수님들이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여준 셈이다.
우기라 해도 하루에 몇 차례 소나기가 쏟아지다 금방 개인다고 했는데, 방글라데시 쪽으로 폭우가 내리고 있는 영향 때문인지 온종일 비가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사원을 들어갈 때마다 반드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여간 번거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슬리퍼를 사러 시장부터 갔다. 가까이서 본 미얀마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얼굴에 하나같이 노란 가루를 바르고 있어 우스꽝스러웠다. '다나까'라고 하는 건데 얼굴 타지 말라고 바르는 미백제라고 한다. 그녀들은 하얀 피부를 굉장히 갖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를 마사지 해주던 버마족 아가씨도 마사지 하다 말고 제 까만 팔을 내 팔에 대보며 "라래, 라래(예쁘다)" 하면서 꽤나 부러운 듯이 내 살을 만져보았다. 또 미얀마 남자들은 '론지'라는 치마를 입고 다녔다. 속옷도 안 입고 천 한장을 두른 것 뿐인데, 치마때문에 소변도 앉아서 본다는 것이다. 더운 나라라 그렇게 입고 다니면 시원하기는 하겠는데 좀 불안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들이 "꿍에"라고 부르는 잎담배를 껌처럼 씹고는 '퉤퉤' 뱉는 통에 길바닥에 빨간 침이 늘어붙어 있는 게 눈에 거슬렸다. 정부에서 계몽을 해서 요즘 젊은이들은 덜 하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 잎이 각성 효과가 있는지 기사분들이 많이 씹는 것 같았다.
미얀마가 버마인 시절에는 태국 아유타야를 29번이나 침략하여 막대한 금을 빼앗아 왔다던데, 그 금을 온통 파고다에다 도금을 했는지 가는 사원마다 어머어마한 금탑들을 세워 놓았다. 바고의 쉐모도 파고다는 114미터,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는 99미터가 넘는다던데 몽땅 금칠을 했으니 그 휘황찬란함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압도 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탑을 에워싼 작은 탑들이며 불상들도 다 금빛이었다. 쉐다곤 파고다 꼭대기에는 미얀마 국민이 30년을 먹고 살 수 있는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너무 높아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많은 보석을 부처님을 위해 바치는 사람들이 사원 구석에서 퀭한 눈빛으로 젖먹이를 안고 구걸하는 여인들에게는 왜 보시하지 않는 건지, 저 불탑이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가진 것을 털어 사원에 시주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금탑을 쌓아 올려놓고는 정작 자신들은 가난한 삶에 허덕이면서 복받기를 빌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이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미얀마는 어디를 가나 개천국이다. 개고기를 먹지 않으니 우리나라 개들처럼 복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서인지 저희도 사람들 틈에 끼어 사원을 유유히 돌아다니다 아무데서나 늘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짐승에게는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들이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 전에도 미얀마 서부 지역의 어느 마을에서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서로 보복전을 벌여 8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들은 전혀 아무런 의심없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부처님은 "금 나와라, 뚝딱. 돈 나와라 뚝딱" 하는 도깨비 방망이라도 갖고 있는가 보다. 나라 재정이 어려울 때 정부가 은행이 아니라 쉐다곤 사원에서 돈을 빌려 쓴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해 내가 이러쿵 저러쿵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전 국민의 95%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이 나라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생각하면 그들의 터무니없는 믿음이 이해가 안되었고, 그들의 뇌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나 자신은 모든 걸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하시 수도원에 갔다.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뜻의 '위파사나' 명상을 하는 곳이다.
영적 세계에 관심이 많은 언니는 '위파사나'의 본고장인 미얀마에 오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그래서 언니가 그 곳의 노스님에게 잠시 명상법을 배워 보자고 제안하였다. 계속 번쩍이는 금탑만 보다가 실제 스님들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명상을 하는 동안 문득 이 나라의 불교가 부처님에게 금이나 갖다 바치면서 제 자신의 안위를 비는 기복신앙쯤으로 상상한 것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빌고 있는 것이 현세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윤회를 벗는 진정한 해탈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헐벗고 가난한 그 곳 사람들의 눈빛이 그렇게 선량하고 평화로울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이었다. 호숫가에 100억대의 성채를 짓고 살고 있는 부자들에 대해서 질투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은 채 무심히 바라보는 그들의 순박한 영혼은 이미 이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미얀마의 거대한 파고다는 그들이 가고자하는 아름다운 천상 왕국의 표상이며, 그래서 그들은 매일 그곳을 찾아 기도하며 큰 위로와 기쁨을 얻고 있는데, 모든 걸 돈으로 계산하는데 길들여진 우리의 눈에는 엄청난 부를 쌓아놓고 가난한 몰골로 살고 있는 그들이 더없이 어리석어 보일 뿐 그들의 영적인 행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인지 각자 마음에 달렸지만, 욕심없어 보이는 맑은 눈빛으로 수줍은 미소를 짓는 그들 앞에서 하룻밤 불편한 잠자리도 견디지 못해 불평해대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감히 말하기가 부끄러워진다.
아직도 왜 내가 미얀마에 가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 내게 무언가를 보고 느끼게 하려는 크신 분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참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 3-10)
가난하지만 행복한 땅 미얀마.
나는 그곳에서 '산상수훈'속의 그들을 직접 보았고, 그들과 함께 한 며칠 동안 진정 행복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belly진 12.07.11. 19:54 미얀마까지 가는 행로가 피곤한데 도착한 숙소마저 엉망이니 순간 왜 이곳으로 떠나 왔나 싶었겠어요.
글을 읽다보니 미얀마에서는 준특급호텔이라 하여도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아닌 걸 알겠어요. 다행인것은 젊고 잘생긴 박식하고 호감형의 매너 남 가이드는 잘 만나신 것 같아요.ㅎ
부자이고 가난하고 위파사나 명상과 여행의 참 맛이 느껴져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다시 글을 다듬어 올리면서 벨리진님의 댓글을 복사해 붙였어요. 먼젓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나중에라도 내 영혼이 혼란스러워면 한번 들러 볼 나라로 찜해두어야겠습니다
강추!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느껴지는 그들. 그 곳에 있었을 때는 아무 근심이 없어 참 행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