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7. 29. 유엔군이 진주 부근 마을에서 사로잡은 부역자 혐의자를 산으로 연행하고 있다.ⓒ NARA
(* 이 기사 안에는 학살 현장 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심약하신 분들은 보지 마시길 권합니다)
언어와 시대상
"언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한다. 곧 그 시대에 유행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958년에 졸업했다. 그러니까 나의 소년시절은 한국전쟁 중이거나 휴전 직후였다.
그 시절 사람들이 자주 썼거나 유행한 말은 '공갈치다', '얌생이 몰다', '골로 간다' 등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자주 뱉었다. 대학 재학시절 조동탁(시인 조지훈 본명) 선생으로부터 그 말의 어원을 자세히 배운 적이 있었다.
조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작가단으로, 전란 현장에서 생생한 장면을 여러 편의 시에 담았다. <다부원에서> <도리원에서> <죽령전투> <서울에 돌아와서> 등으로, 선생은 강의시간이면 당신의 자작시들을 학생들에게 자주 낭독해주셨다. 그러면서 당신이 겪은 한국전쟁 당시의 체험담과 그 시대 유행어의 유래도 들려주셨다.
나는 그제야 그 말들의 뜻과 실체를 적확히 알고는 그 시대가 야만과 공포의 시절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때 사람들은 목구멍에 풀칠을 하거나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도덕한 일들도 별 죄의식 없이 함부로 저지르기도 했다.
유행어 '공갈치다'의 공갈(恐喝)이라는 말은 "공포를 느끼도록 윽박지르며 을러댐"을 뜻했다. 한국전쟁 전후 그 시절은 군경이나 우익단체 회원들은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냥하면서 공갈치는 일들도 흔했기 때문에 그 말이 매우 유행했다. 그래서 그 말을 자주 쓰자 나중에는 그 어의가 평가절하로 거짓말하거나 과장한다는 말로 폭락했다.
'얌생이 몰다'는 말의 유래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 교외에 사는 어떤 사람의 염소가 어느 날 미군부대 안으로 들어가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부대 보초에게 그 사실을 말한 뒤 허가를 받고는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 염소를 몰고 나오면서 견물생심으로 그 참에 미군 보급품을 잔뜩 훔쳐 나왔다. 여기에 재미를 들인 그는 다음부터 일부러 염소를 미군 부대 안으로 들여보낸 뒤 그것을 찾으러 들어가는 핑계로 그런 짓을 거듭했다. 그래서 얌생이 몰다는 말은 '도둑질하다', '남의 물건을 훔치다'는 말이 된 것이다.
1950. 9. 29. 충주. 주민들이 민간인 학살 암매장 현장에서 시신을 파내고 있다.ⓒ NARA
'골로 간다'
'골로 간다'는 말도 한국전쟁 전후로 매우 흔하게 썼다. 우리 악동들은 상대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야, 너 골로 갈래?"라고 말했다. 우리 악동들은 '그저 혼내 준다'는 정도로만 알고 무심코 썼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을 적확히 알고 나니까 참으로 무서웠다.
한국전쟁 전후로 군경의 좌익학살이나 인민군 또는 좌익들의 우익 학살은 매우 심했다. 서로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피장파장이었다. 그 무렵 군경이나 우익 청년단 회원들은 좌익은 물론, 그들 가족이나 친구까지도, 심지어 인민군이나 좌익 게릴라들에게 밥을 한 그릇 주거나 감자 한 자루 줬다는 이유로 촌부들을 산골짜기로 데려가서 총살한 뒤 그 자리에다 매장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당시 '골로 간다'는 말은 산골짜기로 데려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인 뒤 묻어버린다는 끔찍한 말이었다.
1950. 10. 10. 함흥. 한 동굴에서 민간인 학살자 시신 300여 구를 들것으로 꺼내고 있다.ⓒ NARA
1950. 10. 10. 함흥. 학살 후 우물에 은폐시킨 시신을 주민들이 건져 올리고 있다.ⓒ NARA
1950. 11. 13. 함흥. 덕산 광산 갱도에서 학살된 시신을 주민들이 끌어올리고 있다.ⓒ NARA
나는 조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 말의 실체를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와 맥아더기념관에서 등골이 오싹하게, 끝내 눈물을 쏟으면서 숱하게 봤다. 그런데 민간인 학살에는 좌익·우익이 따로 없었다. 산골짜기뿐 아니라, 동네 우물에도, 동굴에도, 광산 갱도에도 마구잡이로 데려가 학살한 뒤 은폐했다.
그동안 분단 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 백성들은 산골짜기로, 우물로, 동굴로, 갱도로, 가지 않기 위해 총구 앞에서 그저 벌벌 떨며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양심대로 정직하게 살았거나, 그렇게 사는 이가 가뭄에 콩 나듯 매우 적었나 보다.
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된 시신을 발굴하고 있다.ⓒ NARA
이번 회 게재 사진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 장면만을 모아봤다. 미리 양해 말씀 드릴 것은 사진 뒷면의 설명 영문 캡션에는 가해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사진에 예단해서 설명을 달지 않고, 단지 거기 기록대로만 박유종 선생의 도움으로 캡션 원문 번역문을 그대로 달았음을 밝힌다.
(* 이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을 찾아가서 직접 검색 수집한 것이나 아래 사진은 동일 사건을 연속 촬영한 것으로 재미사학자 고 이도영 박사가 NARA에서 발굴해 생전에 필자에게 제공한 것이다.)
1951. 4. 대구 근교. 인민군 부역혐의자들이 산골짜기로 연행되고 있다. ⓒ NARA
1951. 4. 대구 근교. 헌병들의 감시 아래 인민군 부역 혐의자들이 자기가 묻힐 무덤인 줄도 모른 채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있다. ⓒ NARA
1951. 4. 대구 근교. 미 군사고문관(맨 왼쪽)이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헌병들은 구덩이 속의 부역혐의자를 총살하고자 각자의 카빈(carbine) 총에 탄창을 끼우고 있다. 그제야 무지렁이들도 자기 무덤인 줄 알고는 뒤돌아 엎드리고 있다.ⓒ NARA
1951. 4. 대구 근교. 헌병들이 구덩이 속의 부역 혐의자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하고 있다.ⓒ NARA
1951. 4. 대구 근교. 헌병들은 구덩이 속의 부역혐의자 총살을 끝낸 뒤 삽으로 흙을 떠서 시신을 덮고 있다. ⓒ 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