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5. 어린이주일예배설교
마가복음 10장 13~16절
이해가 아니라 사랑하세요.
■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무한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질투도 보이시고, 분노도 나타내시고, 심판도 하시지만, 이 모든 태도는 오직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심에 대해 질문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한데, 왜 결국 사랑이시고, 사랑이실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인간 때문입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지은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탐구가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지만, 여전히 미스터리한 인간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신 것입니다. 이해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시는 것이고,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해한 뒤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회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하시다면, 우리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선이해 후사랑’이 아니라, ‘선사랑 후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인간은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존재입니다.
이 사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어린이주일을 맞은 우리가 더욱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이 확증하고 있습니다.
■ 어느 날, 예수님이 몰려든 군중에게 여러 말씀을 주고 계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이들의 부모들이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만져주시면 병도 낫고, 머리도 좋아지고, 미래도 밝아질 것이란 기대감이 생겨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군중이 모여 가까이 가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만, 기를 썼습니다. 이러는 중에 제자들에게 제지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데 방해가 된다며 호통을 맞고, 내쫓겼습니다. 경비와 보안을 담당하는 제자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호통치셨습니다. 아이들을 제지하고 내쫓은 행동을 두고 엄청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신 이유를 겸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좀처럼 화를 내시는 일이 없으신 예수님이 화를 내셨는데, 그것도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이유인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 즉 어린 아이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어린 아이들을 함부로 다룬 것에 대해 화를 내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어린 아이면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나?’ ‘그러면 어린 아이는 몇 살까지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과 함께 어린 아이가 부러워집니다. 그리고 내 나이가 많은 것이 아쉽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이런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15절에 해석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5절의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의 나이가 아닌,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한/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순진함’ 또는 ‘순수함’입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이해한 대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순진함이고 순수함입니다. 이러한 태도와 모습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대표하는 어린 아이들을 내쫓은 제자들을 심히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꾸짖으신 후, 예수님은 쫓겨났던 아이들을 일일이 안으시고는 축복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16절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혹시 우리 중에 ‘어린 아이라고 다 순진하고 순수한가?’라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간혹 어른 못지않은 되바라진 아이를 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라고 다 순진하고 순수한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다 순진하고 순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린 아이면 누구나 다 안아주시고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오는 어린 아이는 누구든 다 환영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어린 아이는 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가 순진한가? 순수한가?’를 따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기준은 단 하나셨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사랑>이셨습니다. 사랑만이 평가의 절대기준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해하고 어린 아이를 안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안으셨습니다. 따지고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기에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십니다. 이해로는 도저히 안아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죄로 철저히 더럽혀진 인간임을 아는 순간, 인간은 안아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만 하십니다. 그리고 이해하십니다. ‘선사랑 후이해’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가 이해해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이해됩니다. 이에 가족은 더욱 그러합니다. 가족은 이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들이 왜 귀한지,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특히 하나님 앞에서 되새김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해가 아닌 사랑만으로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축복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 모두 사춘기입니다. 사춘기는 하나님도 어려워하신다는 슬픈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춘기 당사자들이 더 힘들 것입니다. 이전의 자신이 아니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겠습니까? 본인도 본인을 이해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이해 못 할 때, 사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방법대로, 사랑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랑만 하십시오.
■ 바라기는, 우리 비전공동체의 비전은 <사랑만>(only Love)이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해를 볼모로 잡지 말고, 사랑으로만 안아주고 축복하는 신앙공동체이길 소망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자녀들을 더욱 안아주시고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