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점자 집사의 간증🌷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義肢)할수 있었던 건 내 생애 최고(最高)의 사건(事件)입니다.
담양 산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끼니가 간 곳없이 힘들었어도 ‘동네에서 노래 제일 잘하는 아이’라는 말에 위로받곤 했던 제가 마음껏 찬양하고픈 욕심에 교회를 찾아간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때 목소리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라는 걸 깨달았고, 그 주신 달란트를 헛되이 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정말 이악물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얻기 위한 노력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점자 집사(창원대 교수·정동제일교회)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삶에 대해 사람들은 ‘방직공장 여공에서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변신한 인생’이라 줄여 말하지만 그녀의 마흔두해 삶은 ‘여공’과 ‘프리마돈나’라는 두말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험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사람들은 고생 많이 했다고 하지만 내게는 연단(演壇)의 시간이었고, 그때가 지나면 하나님은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다”고.
그녀는 전남 담양 산골 소작농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할아버지대에는 머슴도 부리고 살던 그녀의 가족들이 친척 소유의 빈집을 빌려 살면서 밥먹듯이 끼니를 굶게 된 건 손이 귀한 집의 늦동이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버지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가장역할을 해야했던 그녀의 큰오빠는 잔치집에 품팔러 갔다가 얻어 먹은 음식이 잘못돼 이레만에 숨졌고, 그 1년후에 막내 여동생도 홍역으로 잃어야했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예닐곱살, 죽음의 의미가 뭔지 몰랐던 그녀는 자라면서 ‘가난이 사람의 꿈도, 희망(希望)도, 목숨까지도 빼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것임을’ 깨닫고 전율했다고 한다.
“엄마를 위해, 동생들을 위해 보리밥 한덩이도 배불리 먹지 않고 오직 가장역할만 묵묵히 하다 죽어간 오빠를 보면서 ‘난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열 번 스무번 다짐했다”는 이 교수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오기같은 그런 다짐들이 나를 다잡아 주었다”고 고백(告白)한다. 그러나 그런 다짐과는 달리 가난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개학을 앞둔 어느날,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 처지에 딸년이 공부는 해서 뭣한다냐, 어여 공장에 취직해 집에 보탬이 되야지” 라며 교과서를 불태워버렸던 것. 그녀는 한달여를 울며 사정했지만 아버지는 냉담했고 할 수 없이 포기하려던 그때 도움의 손길이 왔다. 평소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아껴주시던 음악선생님이 장학금을 주선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중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일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고모의 말에 뒤도 안돌아보고 짐을 싸 한일합섬에 취직을 했다. ‘여공’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교회에 나갔다.
노래가 하고 싶어서…. 어린 시절 가난에 찌든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던 그 노래들을 마음껏 불러보고 싶어서….그러나 그녀는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가족과 함께 앉아있는 여고생들 사이에서 작업복을 입고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성가대에 서서 노래할 땐 그 열등감을 잊을 수 있었어요. 찬양을 하면서 나나 저 아이들이나 하나님께는 똑같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초등학교 때부터의 꿈이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4만5천원하던 월급에서 1만5천원이라는 거금을 떼어내야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감행했다. 8시간의 공장일과 4시간의 학과수업, 그리고 1시간의 피아노 교습으로 숨 고를 틈 없던 때였지만 그녀는 열심히 살았다.
그녀는 “하나님은 우연(偶然)도 노력(努力)하는 자에게만 선물(先物)한다”고 강조한다. 동료들의 질시어린 눈길 속에 피아노를 배우고, 교내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해서 특상을 받고, 마산여성합창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대학 진학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관리사무실에서 주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중학교 시절 한달여 배운 주산실력으로 겁도 없이 손을 번쩍 든 그녀는 다음날로 관리사무실로 발령받았고 좀 여유로워진 시간을 입시공부에 투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런 부단한 노력은 결국 중학교를 졸업한지 6년만에 창원대 성악과 합격이라는 결과로 나타났고, 그제야 그녀는 공부를 위해 고향에 한번도 송금하지 못한 미안함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녀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무대에 서는 일도 쉽지 않았고, 제대로 뜻도 모르는 오페라의 노랫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은 욕심은 그녀를 오스트리아로 떠나게 했다. 그녀의 나이 31세.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광주에 피아노학원을 열였을 때 그녀의 가족들은 ‘이제 니 고생길은 다 끝나부렀어. 좋은 베필만 만나면 더 바랄 게 없다’며 좋아했지만 그녀는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無酌定) 건너간 오스트리아에서 그녀는 절망을 맛보았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는데 나이제한으로 인해 빈국립대학에서 성악실기를 전공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
“솔직히 그 순간만큼은 절망스러웠다”는 이교수는 “그러나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대로 내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믿음대로 우선(優先) 나이제한이 없는 이론수업을 위해 국립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오랜 기도 끝에 카라얀도 인정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음악코치인 미미 프라이셀러를 만날 수 있었고, 그녀로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아 파격적인 조건으로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학생활 9년만에 그녀는 오페라과를 수석졸업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한국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부했다”
는 이점자교수, 그녀는 귀국독창회를 통해 금의환향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5백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서 앵콜송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녀는 모교와 수원과학대 교수직에 연연해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두렵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고, 그 축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방직공장 근로자에서 세계적인 오페라 디바가 된 이점자교수는 고난과 시련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시련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갈립니다.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