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昇華) / 11회 오세윤

[김호중]

소아과 전문의로 바쁘지 않은 국영(國營) 특수 병원에 근무할 당시, 틈틈이 짬을 내어 인근의 정박아 학교로 진료봉사를 나가던 때가 있었다.
교장 선생님(김성수 신부)과 신부교사 세 명, 수녀 두 분, 그리고 주방과 청소요원 몇 명이 두 살부터 열대여섯 살까지의 육십 여명을 힘겹게 돌보고 있었다.
끼니때마다 무릎에 앉혀 고정 시킨 뒤 턱받이를 하고 밥을 먹여줘야 하는 아이들, 열대여섯 살로 몸은 어른 못지않게 자랐지만 심부름이라도 시킬 참이면 몇 걸음 가다가 뛰어노는 아이들 속에 섞여버린 채 받은 심부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아이들, 시험 삼아 주말에 버스를 태워 집에 보내보면 종점까지 그대로 타고 가는 아이들, 열 살이 넘도록 대 소변을 가려줘야 하는 아이들, 심지어 열네 살짜리의 달거리마저도 누군가가 보살펴 줘야만 하는 정박아 기숙학교.

때 묻지 못하고 타고난 그대로의 본능과 자라지 않는 두뇌가 슬픈 아이들은 그늘지고 심각한 표정의 어머니들과는 달리 배만 고프지 않고 춥지만 않으면 마냥 웃고 행복해 했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주기만 해도 쉽게쉽게 웃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수녀들의 얼굴에도 짜증은커녕 언제나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의 자애로움만이 있었다.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문리대 뒤에 자리한 예과 교실에서의 첫 시간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강의 시작을 기다리며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낯선 한 녀석, 스포츠형으로 깎은 붉은 머리가 빳빳하게 하늘로 치솟은, 앉은키도 길쯤한 녀석은 주위의 짓까불음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듬직하게 버티고 앉아 남다르게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남들보다 좀더 뒤에 알게 된 김인수는 더할 수 없이 호방한 성격의 전혀 무뚝뚝하지 않은 부산출신의 경상도 사나이였다.

한껏 풀어져도 좋을 예과시절이라 취향과 결이 같은 녀석들끼리 어울려 모이다 보니 공교롭게도 인수와 나는 함께 예과 축구부의 같은 공격멤버가 된다. 그래도 명색이 의과대학인데 얼마나 공이 차고 싶었으면 축구부가 다 생겨났을까!
선수로 뛰어본 중학교 때의 향수가 입시공부에 바빴던 고등학교를 건너뛰어 되살아나기는 녀석도 나도 아마 매한가지였던 듯 했다. 축구 말고도 돌체다 르네상스다 하고 음악 감상실을 번잡스럽게 드나들던 나와는 달리 그는 축구장과 강의실외에서는 쉽게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예과시절과 함께 아쉽게 축구도 끝났다. 그 후로 본과 4년 동안 둘은 학교울타리 밖에서는 거의 어울려본 적이 없었다.  

졸업 후 군의관으로 월남을 다녀와 근무하게 된 곳이 청주 육군병원, 공교롭게도 그가 먼저 와서 외과파트에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둘은 새롭게 낚시에 취미를 붙여 초평이니 이담이니 사리니 하는 유명 낚시터를 편력하며 함께 생활하고 생각하며 많은 말들을 나누게 됐다.

본래 고향은 함경도라는 것, 부산에도 서울에도 일가친척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 그래서 대고(大故)를 당하여 인천의 구월동묘지(현재 대 단위 아파트가 됐다)에 모시던 때도 조문객이라곤 너와 정우만이어서 무척이나 민망스러웠다는 것. 고등학교 3년 동안 요 이불을 제대로 깔고 자본적이 다 합쳐 열흘도 안 된다는 것. 대학생활 내내 중고생 아르바이트로 생활했다는 이야기. 매번 입학금과 등록금이 걱정은 되면서도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낙관적인 희망은 버려지지 않더라는 이야기. 의사가 되겠다기보다는 더 오래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의대를 지망했다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통해서 후회 없이 공부한번 실컷 해 보았노라고 말하던, 정말로 배움이 고팠던 젊음. 재시험을 당할 때에도, 축구시합에서 월등한 실력차로 골을 땅콩 주워 먹듯 먹을 때에도 기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털털 큰소리로 薦만庸?‘케 세라 세라다, 어이 모두 힘들 내라!’고 큰소리로 외치던 호쾌한 남자. 마음을 다하여 자기와 주변을 보듬던 폭이 유달리 넉넉하던 친구.

최고를 향한 도전만큼 멋진 게 어디 또 있느냐며, 대학의 합격 방을 보는 순간의 짜릿함 하나만 가지고도 자기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노라 말할 수 있다던 소박하면서도 당당하던 친구. 도전할 수 있는 우듬지가 있다는 건 두려움이고 스트레스이긴 할망정 어찌 보면 오히려 신에게 감사해야할 신나는 일이기도 하더라던 천주교신자.

5월말, 나보다 먼저 제대특명을 받은 그는 나와 초평 저수지에서 마지막 밤낚시를 하고 다음날로 청주를 떠났다. 잠시 강원도의 보건소장으로 가있던 그가 9월 중순쯤 느닷없이 고운 처자를 대동하고 운동화에 배낭 차림으로 나를 찾아왔다. 설악산으로 해서 동해안을 도보로 도는 신혼여행길이라며 처자의 손을 꽉 잡고 선 녀석은, 각시가 나의 고등학교 3년 후배라며 자랑스럽게 신부를 소개했다.
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 전공의 4년 과정을 마치자 곧바로 용인에 병원을 개설하여 성공적으로 열심히 의사생활을 했다. 지역모임과 동료들에게도 더없이 성실한 바람직한 생활인이요 성실한 외과 의사였다.

88년 7월, 병원 근무를 마치고 부인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진입하던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운동신경이 남달리 뛰어난 그의 순발력 덕분에 부인은 갈비뼈 두 대만이 금이 가는 경상으로 그쳤지만 자신은 치명적으로 다쳐 어이없게도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그 뒤로 16년, 부인은 혼자의 힘으로 삶을 꾸려가고 남편을 돌보고 아이들을 키웠다. 어엿하게 자란 아이들 셋 모두 제각기 가정을 이루어 바람직하게 독립했다. 참으로 고맙게도 효심 깊은 자부가 들어와 실제적인 도움뿐 아니라 마음에도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 동안도 그는 코에 끼운 튜브로 음식을 공급받으며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대 소변도 나머지도 모두 부인이 돌봐야하는 의식 없는 상태로 두 눈을 멀뚱거리며 누워있어야만 했다. 오로지 숨쉬기 하나만을 제 스스로 하면서- .

환자특유의 냄새 하나 없는 방, 그 오래인 동안 몸에 욕창 하나 없이 보살핀 부인의 침묵하는 인고는 또 얼마였을까. 부부의 사랑인가, 그에게서 받은 사랑이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컸던 때문일까. 교육으로 배워 지니게 된 부도(婦道)일까, 선대에서 물려받은 부덕(婦德)일까. 아니면 자기 한 몸의 위해(危害) 따위는 아랑곳 않고 부인의 생명을 염려하여 방어운전을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운 보답인가. 처와 자식의 생활과 교육을 마련해 놓은 그의 경제적 배려에 대한 당연한 빚 갚음인가. 그도 아니면 깊은 신앙적 희생과 봉사인가. 추측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 모두를 넘어선 측량불허의 그 어떤 것. 신앙, 그리고 사랑.

누워있는 그의 백발이 안쓰럽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정박아 학교 원장 신부의 당당한 백발을 본다. 다른 친구의 자녀 혼례식에 참석하여 한 녘에 조용히 서있는 인수 부인의 기품 있게  백발 진 온화한 모습에서, 인고하는 이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보며 감동해 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이는 착잡함은 어쩔 수가 없다.

                                              
        
   복 수 초                              
                                              
                                          
외로움을 여유로운 울림이게 하고
쓸쓸함을 풍정(風情)한 열두 폭으로 감싸는
오동나무 속 비인 거문고를
님은 들으시는가

동천(冬天)을 나는 새가 춥지 않음은
아름다운 사랑이 꽃잎 틔우는
복수초(福壽草) 옛이야기 있음인 것을

설한풍 매운 뜰에
매화 지던 날
지는 잎 그늘 담고 눈 속에 피어

사랑만은 버리지 못하노라고
열 매듭 매어두고 살겠노라고
당신의 염처(艶妻)되어 살겠노라고

이 세상 끝나는 그날 넘도록
사랑만은
단 하나 지녀야 할 매듭이라고
지녀야 할 간절한 기도이노라

거문고 여섯 줄에 얹는 노래를
내 고운 당신께선 들으시는 가
            
              
                
                    2004. 2.10.  열녀문 앞에서  慧 明 읊다 

[김호중]

14회 현경자 동문의 부군 김인수(본인의 서울의대 동기로 정형외과 전문의)의사가 21년간의 긴 투병생활에서 오늘 타계하였습니다. 그간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던 그를 정성을 다하여 돌본 부인 현경자동문의 숭고한 정신에 감사와 존경의 정을 보내며 지난 2004년의 글을 여기 올립니다. - 11회 오세윤

14회 선배님들에게 쓰신 글이라서 <부고USA> http://www.bugoUSA.org [시와 수필, 2010-07-03] 에서 옮겨 왔습니다. - 15회 김호중

[흰구름]

김호중님,감사합니다.

[리 챤]

11회 인사회를보며 오세윤 선배님의 근황을 접합니다. 친구 김인수님과 현경자동기의 보살핌에 감사와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김호중]

이창흥 선배님, 이메일을 <chchich@naver.com> 으로 보내는데 자꾸 되돌아옵니다.
"15김호중" <revhokim@gmail.com> 앞으로 이메일 연락 좀 주십시오.

[리 챤]

바로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대경]

오세윤선배님, 김호중 동문님 감사합니다. 현경자동기의 숭고한 정성에 우리 모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간 넓은 사랑으로 그를 보듬어 주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