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21일,
이호왕 박사,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개발
유행성 출혈열은 19세기 초 러시아의 아무르 지역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1939년 일본인들이
흑룡강 유역의 송고 지방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에서 발생한 것을 기록한 것이 최초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러시아군과 일본군에서는 만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관동군 731부대에서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였다고도 한다.
이 병은 1951년 한국전쟁 중에도 크게 유행하였다. 중부전선에 주둔해 있던 유엔군 장병 3천여 명이 감염
되었고, 그 중 다수가 사망하였다. 전쟁 후에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다시 발생하였고,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줄어드는 추세를 보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유행성출혈열은 야외활동이 많은 농민, 군인에게서 많이 발병하며 세계적으로 매년 약 50만 명이 감염
되는 병이다. 이 병은 발병 이후 특효약이 없어 사망률이 7%에 이른다. 특효약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예방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호왕 박사는 1976년 4월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한탄강 유역에서 채집한 등줄쥐에서
발견하였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의학자 2명을 포함해 230명의 미국 연구진이 4천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5명의 연구원이 20만 달러로 성공한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로부터 국립보건원 연구책임자 자리와 높은 연봉, 훌륭한 연구 환경을 제안 받았지만
그는 “과학자에게도 조국애가 있다”며 제의를 거절했다. 이호왕 박사를 ‘한국의 파스퇴르’라고 부르는
데는 미생물학에서의 업적뿐 아니라 깊은 애국심도 한몫 했다
그리고 발견한 병원체를 한탄강의 이름을 따 한탄바이러스라 명명하고 이에 대한 예방접종약을 개발,
실용화하는데 노력해왔다. 이 과정에서 8명의 연구진이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이 교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구에 정진했다.
그리고 1990년 9월 21일 말라리아 및 간염과 더불어 세계 3대 전염병으로 불리던 유행성출혈열의
예방백신을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개발했다. 유행성출혈열 백신은 그 동안 선진 각국에서 여러 차례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해왔는데, 국내 고려대 의대 이호왕 교수팀이 1981년 한탄바이러스
예방백신 개발에 착수한지 10년 만에 성공한 것이다.
이 예방백신은 임상실험을 거친 후 1991년부터 ‘한타박스(Hantavax)’라는 이름으로 시판됐다. 그 결과
최근 한국에서의 출혈열 환자 수는 2,000명에서 500명으로 감소했다.
이호왕 박사는 1928년 10월 26일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났다. 1954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
의사가 되길 원했다. 그 당시엔 6‧25 직후라 뇌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 환자가 넘쳐났는데, 내과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염병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공부하다가 일본뇌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뇌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1년에 6,000~8,000명이 감염되어 그 중 3,000~4,000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호왕 박사는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뇌염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
되면서 환자수는 급격히 줄었다.
일본뇌염이 극복되면서 이호왕 박사는 5년 간 연구했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연구과제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군인에게서만 발견되던 병이 민간인에게도 발견되기
시작해 그 심각성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