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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단-515 위로의 하나님(고린도후서1장1-11절)
성경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11절까지 봉독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함께 살펴보았고, 이제부터 고린도후서를 들어가게 되는데, 고린도 교회는 교회 문제도 복잡하고 또 편지도 사실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얼른 봐서는 고린도전후서를 원만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 고린도 사회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 이런 것이 다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에 요한계시록만큼이나 어려운 서신이 고린도전후서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서 같은 책이 구조적으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고린도에 보낸 이 편지가 참 어려워요.
지난번에 한번 고린도전서 첫머리에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첫 편지가 아니고, 이 편지보다 앞서서 또 한 편지가 있었던 흔적을 고린도전서 5장 9절 이하에서 우리가 봤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가 두 번째 편지이고, 우리가 지금 보는 고린도후서서 그냥 우리가 단순히 보면 고린도전서후서 이렇게 되지만, 사실로 하면 고린도에 보낸 세 번째 편지 같은데, 세 번째 편지라고 보기도 어려운 점이 또 있는 것이, 읽어 나가다 보면 이 앞에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에 고린도후서가 시작되는 그 어간에 또 한 편지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데,
그 편지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고, 또 최근에 어떤 학자들은 고린도후서 10장부터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책의 10장부터 13장까지가 세 번째 편지로 간 것인데, 두루마리로 된 파피루스 종이를 연결해서 붙이다가 뒷쪽의 것을 앞에 붙이고, 앞의 것을 뒤에 붙인 것 같다. 이런 학설이 나올 정도로 고린도후서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읽어도 그 앞에 선행된 어떤 사연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것이 뭉떵 빠져있는 채로 읽어야 되니까, 이해도 연결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또 바꿔서 보기가 어렵겠죠.
제가 성경강좌를 할 때에는 바꾸어서도 합니다.
없어진 편지는 어쩔 수 없지만, 고린도전서를 읽고 후서는 10장부터 13장까지를 고린도전서 뒤에 있었던 편지이고, 지금 고린도후서 1장부터 9장까지는 네 번째 편지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최근에 나온 학설을 따라서 살펴보는 그런 방법도 취합니다.
그렇게 하면 너무 어렵고 복잡할 것 같아서 그냥 공부하면서 설명하고 나중에 읽어가다가 이런 부분들은 우리가 지금 두번째 편지로 보기 어렵다 싶고,
또 바울이 고린도에 방문한 것도 한번 간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도행전대로 한번 간 것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마지막 코스가 거기 고린도 사역이니까 그것은 알겠는데, 편지를 보면 바울이 거기 한번 더 갔다온 것으로 되어 있어요.
고린도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갔다 왔는데, 수습이 안 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디모데 손에 들려보내어서 지난번에 고린도전서를 디모데가 가져가거든요 너희 가운데 두려움 없이 있게 하라. 그런 말도 있는데,
문제는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가서 읽어 주었지만 역시 해결이 안 되었다는 겁니다.
디모데가 가서 편지를 전달하고 설명을 했지만, 역시 고린도 문제는 수습이 안 되었고,
그리고 디모데가 아주 부정적인 소식을 가져 온 겁니다.
그것을 듣고는 바울이 굉장히 격노해서 아주 격한 편지를 지금 우리가 공부할려고 하는 고린도후서 앞서서 아주 격한 편지를 하나 보냈다는 겁니다.
보내놓고는 바울이 또 후회를 한 거예요. 편지를 보내놓고..
여기 고린도후서를 읽어나가다가 보면 어떤 편지를 보내놓고 ‘근심하고 후회했다.’ 그런 얘기를 써요.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같은 경우는 보내놓고 근심하고 후회할 만한 것이 한마디도 없거든요.
모든 말을 어떻게 썼길래 보내놓고 근심하고 후회까지 했을까..
그리고 지금 현재 고린도후서를 쓸 때에 ‘전에는 편지 보내놓고 근심하고 후회했지만 그 뒤에 소식을 알고는 지금은 별로 근심하지 않는다.’ 그런 말도 있다는 거예요.
제가 가끔 얘기 하죠.
편지라는게 본래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죠.
누가 편지를 딱딱하게 알아먹지 못하게 이렇게 안 쓰거든요.
다 읽으면 알아들을 만하게 편지를 쓰는게 상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연이 복잡할 때는 편지가 어려울 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일방통행이니까..
고린도 교회 쪽에서 보낸 편지를 함께 읽어보면 낫겠는데,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편지에 응답한 것은 우리가 잘 모를 때에는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말씀을 가지고 상당 부분은 유추해서 알아내야 되기 때문에 어렵다는 거죠.
그냥 일반적으로 오늘 기성교회에서 많이 하는 것처럼 요절 한절 빼어서 써먹고 말바에는 어려운 것도 없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편지를 제대로 원만하게 이해할려면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서 재구성을 해보고,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이런 말이 오고 갔느냐?’ 하는 것을 정확히 읽어낸 다음에라야 바른 해석도 되고,
오늘 우리 신앙과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갈피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특히 고린도후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와 바울 그리고 서신들 이 삼각관계라는게 결코 만만치 않다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어떻든 여기 지금 오늘 우리가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들 중에는 바울이 편지를 굉장히 부드럽게 쓰고 있어요.
격한 편지와는 아주 거리가 한참 먼, 정말 섬세한 어머니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후서를 지금 쓰고 있는데, 그래서 ‘위로’라는 말이 여러차례 나옵니다. 위로..
우리가 읽어갈 때 위로라는 단어가 나오거든 동그라미를 쳐보세요. 여러 번 위로라는 말을 쓰는데,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만날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이 복잡한 세상, 환난이나 고통이나 사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아픔도 있고 고통도 있고 슬픔도 있고 이런 분들이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는 중에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과 슬픔과 고난과 핍박과 불이익과 아픔과 고생과 질고와 죽음과 불행과 이런 것이 대개 혼자 오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렇죠?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 이렇게 오는 수가 있어요.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그런게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날이 있습니다.
불행에 불행이 연속되는 거야.
그럴 때 누가 와서 사람들이 뭘 말해봐야 잘 위로가 안 되는 수가 많아요.
또 어떤 때에는 위로하러 온 사람이 정죄나 하고 가는 수가 많다고..
가뜩이나 사고당해서 어려운 고통중에 있는데, ‘너 십일조 떼먹었지, 너 주일 빼먹었지?’ 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아무 위로가 안 돼요.
여러분 욥기에 보면 욥이 극한 환난을 당했는데, 친구들이 처음에 위로하러 왔는데, 위로는 고사하고 막 정죄를 해가지고 욥이 아주 심하게 반발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바울이 여기 이 편지를 쓰면서 위로의 하나님이 하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참 읽어둘 만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은혜라고 하는 말은 헬라적인 인사이고, 평강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적 인사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그런데 지난번에 우리가 고린도 교회 문제를 봤죠. 열가지나 되는 문제가 있어요.
그렇다고 그게 교회가 아니냐?
교회라는 겁니다. 엄연히 하나님의 교회예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다.’
하나님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는 거야.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가더라도 그 교회에 가서 혹시 이런 저런 문제가 열가지나 있다고 해서 ‘뭐 교회가 이 모양이냐?’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게 교회라는 거예요.
여러분 병원에 가서 웬 환자가 이렇게 많냐? 해봐요.
당연히 병원이니까 환자가 많죠.
교회라는 것은 죄인들만 모아놓은 곳인데, 나는 죄인 아니다 하는 사람은 안 왔잖아요.
나는 죄인이라서 예수님 은혜가 아니면 희망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데, 당연히 이런 저런 문제가 있는 거죠.
문제가 계속 문제로 남아 있으면 곤란해.
하나씩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문제가 점점 해소되고, 밝은 데로 나가야 되죠.
그런데 어떤 사람의 문제는 돌아가실 때까지 별로 해결이 안 된 채 그냥 문제를 그대로 가져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불행이 있다할지라도 그 불행이 해소되었으면 좋겠는데, 해소 안 된 채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있는 것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경우에 어떤 위로가 필요한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다가오느냐?
3절 보세요.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거기 줄을 그으세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위로의 하나님이 어떻게 위로하시느냐?
여러분 어려울 때 하나님이 딱 나타나가지고 ‘너 참 고생 많다. 내가 다 알고 있다.’ 하면 참 위로가 되겠죠.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하나님 만나본 사람 손들어봐요.
별로 없잖아요.
어떻게 위로하시느냐?
여기 지금 아주 놀라운 비밀이 여기 숨겨져 있는데, 4절에 보면,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를 위로할뿐 아니라 우리가 위로받은 그 위로를 가지고 또 다른 환난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 참 이 말이 어렵죠.
처음에 어려운데, 가만히 돌아보면 참 천번 만번 맞는 말씀이야.
저도 목회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 보다는 어려움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었어요.
여러분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대로 살면 아무 고통도 없을 줄 아세요?
아무 불행도 어려움도 환난도 슬픔도 불이익도 불행도 없었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다른 사람은 아무 환난도 고통도 아픔도 슬픔도 불이익도 아무 것도 없는데, 나 혼자만 어려움 당하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졌는가? 나는 저주를 받았는가? 가계에 저주가 흐르고 있는가?’ 별 생각을 다 할거라.
그런데 보면 겉으로는 다 웃고 다녀도 가정 가정 속속들이 들여다 보면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불행과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것을 보고 위로가 된다니까..
제가 참 위로가 되었던 전에 요한복음 할 때 말씀 드렸죠?
여러분 잘 되고 잘 되고 만사형통하고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 함께 하시느냐?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면 은혜 주시면 모든 문제가 다 눈 녹듯이 해결되고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보니까..
여러분 야곱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해요. 그렇죠?
사랑하는데, 그 집구석에 일어나는 일들은 참 끔찍한 일들의 연속이야.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을 버렸느냐? 버린게 아닙니다.
욥을 하나님이 버렸느냐? 버린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그래요.
제일 충격받은게 베다니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집 이야기죠.
아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예수님이 그 집을 사랑하시면 병이 나아야 될 것 아닙니까? 나사로가..
병 고쳐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좀 나사로의 누이동생 그 마리아가 창녀일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도록 그 정도는 예수님이 해줄 수 있어야 될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전혀 해준게 없어요. 예수님께서..
그냥 그대로 두고 그를 정죄하지 않고 그리고 그를 사랑했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 혹시 예수님 좀 이런 것 못해 주나? 그런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것 안해주고 못해준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든지 그런 것 아닙니다.
이게 참 위로가 되더라고..
또 바울은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으니까, 아무 근심도 고통도 없이 만사형통하고 잘 되고 잘 되고 부흥되고 이런 신바람나는 그런 사역을 했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이분도 고린도 교회 때문에 이렇게 속상하고 분통터지고 기가 막히고 얻어터지고 사례금도 못받았고 얻어터지기만 하고, 예레미야 같은 분도 보세요.
그래서 산상보훈에 보면, 오늘 아침에 잠깐 묵상한 대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위로받는다는 거예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즈음에 한국에 많이 퍼져있는 신학이 이른바 번영신학이라는 신학이 있어요.
뭐든지 잘되고 잘되고 긍정하고 긍정하고.. 그랬으면 저도 좋겠어요.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전에도 한번 이야기 한 것 같은데, 갠 날 맑은 날만 좋은 날이고 요즈음 우리가 작년까지만 해도 가물어 가지고 ‘제발 비가 왔으면 좋겠다.’ 했는데, 비 조금 오니까 채소가 썩었다고 하늘 쳐다보고 난리죠.
갠 날이 참 좋은 날 맞는데, 갠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일단 우리가 성경을 보면 먼저 우리가 내 개인의 고통 내 가족의 아픔 슬픔 괴로움 이런게 있는데, 나만 받는가? 다른 사람은 다 편안해 보이고 내가 받은 고통만 커 보이고 그러다가 알고 보니까 사도바울은 우리는 더 고통도 받았다. 야.
얼마나 고통 받았느냐?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대요.
이런 고통이 있었다는 거야.
아마 모르긴 해도 그 철없는 고린고 교인들에게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고통받은 것이 큰 위로가 되었을 거라.
바울만 고통 받느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았어요.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어요?
또 우리 에스라 성경강좌에 와서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소리 했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하고 울고 통곡하고 그런 것은 상상도 안해봤다가,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데 번번이 좌절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데, 하나도 안 이루어지고 번번이 좌절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들어먹어야 말이지..
너희가 언약을 지키면 약속을 지켜야 말이지..
너희가 일차적으로 내 소유가 되고, 바알의 품에 가서 안겨버리는데.. 아세라 목상 앞에서 절하고 앉았는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안 섬기기는 뭘 안 섬겨..
우상을 만들거나 거기에 절하지 말라..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전체를 만국 종교 박람회장을 만들어버렸어요.
여러 번 하나님의 꿈이 하나님의 소원이 좌절되고 좌절되고 천년 동안 좌절된거야.
우리야 좌절돼봐야 70-80년 밖에 안 되지만, 하나님는 영원히 사시니까 별의 별 것을 다 보는 거야.
모세부터 말라기까지 1천년을 좌절하고 참담한 마음으로 4백년간 대화를 끊고 있다가, 세례요한의 소개를 받아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되는 거야.
그리고 아직은 연약한 교회가 64년부터 시작해가지고 311년까지 250년간 피로 값주고 산 교회가 그런 대환난과 고통을 겪는,
그리고는 그 이후에 얼마 안 가서 중세 교회가 썩어 부패해버리는 그런 쪽으로 가요.
제가 그러죠.
성경 강좌에 오신 분이 우리 소원, 간절하고 애타고 다급한 것 있다할지라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아픔이 얼마나 좌절되고 있는지 한번 봐라..
그것을 쭉 듣고 나면 자기 문제는 하나도 해결 안 되었어도 굉장히 기쁨이 충만해서 돌아가는 거야.
‘아이구야. 나만 소원이 좌절되는게 아니고 하나님도 이렇게 좌절을 안고 아픔이 계셨구나..’
4박 5일 동안에 단지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을 보는 순간에 성도들의 신앙이 많이 성숙해져요.
맨날 어린애처럼 자기 소원 가지고 보채고 안달복달 하고 주여 삼창하고 난리굿을 피우다가 ‘아이구야 하나님의 소원도 이렇게 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꿈도 이렇게 무참하게 깨어지고 무너지고 그러셨구나..’ 하는 것을 보면, 그게 좋은 쪽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줄 알았더니 하나님이 자기 집안 문제도 이렇게 어렵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는구나..
오히려 자기 하찮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보챘던 자기 자신이 많이 부끄러워서 돌아가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 고린도 교회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5절입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바울이 ‘내가 너희보다 훨씬 더 고생했다’ 할 때, 아하 바울도 그렇게 고생했구나 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해야지, 만약에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고 그러면 환난도 없고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어요.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거스려 갈려고 하면 반드시 불이익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고독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 당연하죠.
..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고난을 받는구나’ 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견딜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만 이런 고난 당한다 싶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심하면 자살하고 그래요.
그런데 ‘아 이게 다른 사람에게도 다 같은 싸움이 있구나, 다 같은 아픔이 있구나’ 하면 참을 수 있다니까..
놀부 이야기를 제가 가끔 하죠.
놀부가 어느 날 배가 얼마나 아픈지 쥐어짜듯이 아프니까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다가 배가 아픈 것도 아픈것이지만 자기 부인이 배가 안 아픈게 더 배가 아픈 거야.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자기 부인이 ‘아이고 배야’ 하니까 ‘그러면 그렇지 나만 아프면 되나 너도 아파야지’ 하면서 훨씬 위로가 되어가지고..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놀부전 누가 썼는지 몰라도 상당히 심리적으로 썼어요.
그래서,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끝없이 위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믿음이 연약한 집사님이 있었는데, 남편은 교회에 안 나오고 여집사님만 교회에 나오는 거야.
그런데 아들이 대학 시험에 떨어진 거야.
그래가지고 삐어져가지고 교회에 안 나와.
한주간 기다려보고 두주간 기다려봐도 안 나오니까 목사님이 심방을 갔대요.
갔더니 얼굴 색이 아주 우거지 상을 하고 있어.
우거지 아시죠? 김치통 열고 우거지 한번 들쳐봐. 오만상 찌그려져 있는 거야.
그래가지고 그 목사님이 ‘아들이 합격했으면 참 좋을텐데, 떨어져서 참 마음이 아프시죠.’
그러면서 ‘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애들도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그 여집사님 얼굴이 금방 밝아지면서 ‘목사님 아들도 떨어졌구나’ 해가지고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고..
그래서 목사님이 참 감사했다고 해요. 우리 애가 안 떨어졌으면 그 사람 교회에 영 안 나올뻔 했다 하면서..
그래서 고통도 혼자 당하면 힘든데, 남들도 고통이 있고 바울도 고통이 있고 예수님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도 고통이 계셨구나 하는 것을 알고나니까 한결 위로가 되는 거죠.
뭐든지 나홀로 당하면 기가 막히는 거예요.
다 같이 당하는 겁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그렇게 불행스럽게 살지는 않았는데, 제가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만, 옛날에 개척교회를 20년 가까이 19년을 꼬박 하니까 사는게 참 말이 아녜요.
어지간하면 내가 물질적인 것 그런 것을 가지고 불평할 사람이 아닌데, 너무 힘드니까 집사람이 못견뎌 하는 거야.
그런데 사실은 저보다 훨씬 더 어려운 분이 있는 거야.
한번은 새벽에 전화가 왔는데, 통화가 되었는데 숨소리만 들리고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노목사입니다. 말씀하세요.’ 해도 말을 안 해요.
한 5분이나 10분이나 지났는데, ‘목사님 우리 생활비가 한 달에 17만원이예요.’ 하고는 딱 끊어버려요.
저는 그래도 그 때 50-60만원 받을 때인데, 17만원이라는 거야.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어려운 것 입에 꺼내도 안 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도 그 지리산 지역에 할머니 할아버지 몇사람 모시고 그런 개척교회 섬기는 이런 분들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도시 교회가 쬐금 돕다가 연말만 되면 잘라버리는 거야. 남선교회 회장 바꼈다고 잘라버리고 여전도회 회장 바꼈다고 자기 연고지에 보낸다고 협박이 날아와. 끊어버린다고..
또 얼마나 성장 했느냐?
시골에서 성장은 무슨 성장이야. 도시에서도 성장이 안 되는데..
연세 많은 할머니 자꾸 돌아가시기만 하고 교회에는 잘 안 나오는데, 나와도 듣지도 못하고..
그래도 성도 10명 20명 그것 버리지 못해 가지고 묵묵히 교회를 지키고 있는데, 초상은 뻔질나게 나는데, 맨손으로 가지 못하고 시골 목회자의 생활이라는 것은 참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워요.
그리고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데, 예레미야 같은 분 봐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가정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 생활비도 나오는데도 없고 어떻게 빵을 먹고 살았는지 그렇게 어려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변이나 아니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읽어보면 우리가 받는 고난은 고난도 아니다, 호강에 받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예요.
여러분 우리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다면 성경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힘이 되거나 여유가 있으면 지리산 지역에 작은 개척 교회들 성도가 10명에서 20명. 30명은 완전히 자립하는 교회입니다.
지금 농촌 교회에서 30명은 괜찮은 교회입니다.
10명 20명 그런 교회에서도 목회자가 묵묵히 일하는 것 가서 보면 감히 우리가 어렵다 말을 못해요.
8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우리가 아무리 봐도 사도행전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승승장구하고 만사형통하고 기적과 표적이 일어나서 마술 하는 사람이 책을 가져와서 은 5만이나 되는 책을 불사르고 대부흥이 일어난 것만 봤지, 아시아에서 이렇게 고난 받은 것은 기록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아요. 바울이 자기 고난의 이력서를 다 안 써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겁니다.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그런 고통이 항상 있었고, 그래도 건져 주셨고 또 앞으로도 건져주실 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 고통이 없기를 고통이 없는 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그렇게 어려워도 똑같이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끝까지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하고, 또 육체의 지혜로 요령을 피워서 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양심을 따라서만 살았다.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교역자와 교회와의 관계인데, 고린도 교회야말로 바울의 자랑이 되고 바울의 지도를 받고 바울을 따라서 바울을 후원하고 했던 것이 고린도 교회의 자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자랑거리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도 마찬가지죠.
제가 섬겼던 교회가 맨 처음에는 금서교회라는 교회인데, 제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던 곳이고 집사로서 섬겼어요. 집사와 교사로서 구역장으로 청년회장으로 섬겼어요.
그 다음에 제가 직접 개척한 사천에 소곡교회인데, 5년 1개월을 거기에 있었어요.
그리고 원지교회에 갔었는데, 원지에서 14년을 있었습니다.
14년에서 2개월 모자라는 14년 있었죠.
그리고 무안교회에 갔었는데, 무안교회에서 9년 4개월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지난온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가 반듯하게 바르게 서 있어야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내가 작은 자랑이나 되겠죠. 자랑까지는 안 해도 그래도 제가 땀 흘린 흔적이 될 것이고, 또 그분들이 내가 당부했던 말씀을 잘 따라서 했어야 또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그들도 교회도 자랑이 될텐데..
바울이 지금 염려를 하는 거죠.
지금은 ‘나는 너희의 근심거리요 너희는 나의 근심거리다.’ 서로 근심거리 밖에 안 되면 기가 막히죠.
그래도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오해가 다 풀리고 바르게 수습 되어서 하나님께서 볼 때 바울도 자랑할 수 있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15절,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여기 보면 두번이나 갔었다는 거거든요.
첫 번째는 개척하러 간 것이고, 그 뒤에 한번 방문 했다는 얘긴데, 사도행전에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방문한 얘기가 나오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다는 거죠.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바울이 고린도에 간다 했다가 안간 적이 있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예’ 해놓고 ‘아니’ 하면서 말 바꾸기 하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나중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가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낄려고 안 갔다. 내가 갔을 때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게 하기 위해서 아겨서 안 갔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갔으면 몇 사람 작살나는 거야.
그래서 좀 더 생각해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줄려고 안 간건데, 그것을 가지고 말바꾼다고 ‘예 해 놓고 안 오는 것 봐라. 이게 무슨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냐?’ 하고 바울을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4절,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여러분 저도 여러분의 믿음을 주관할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억지로 온 성도를 내 손안에 움켜쥐고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주관하는 것은 저와 안 맞아요.
왜냐하면 누군가가 내 믿음을 주관하고 이런 것 제가 싫어해요.
마찬가지로 저도 여러분의 믿음을 주물러서 내 마음대로 온 성도를 내 손에 꽉 쥐고 이렇게 하는 것은 저에게 맞지 않아요.
그래서 진리 자체를 여러분에게 성실히 전한 후에 여러분이 인격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지, 목회자가 성도를 너무 지나치게 주관하는 그런 교회를 가끔 봐요.
그래서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어가지고 성도들 한눈 팔 시간도 안 주고 뱅뱅 잡아돌려서 정신없이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지나치게 성도를 주관하려는 그런 목회 스타일이 있는데, 저는 안 맞아요. 제가 볼 때 바울도 마찬가지예요.
바울이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머물러서 평생 꽉 쥐고 숨도 못쉬게 하고 이 교회를 벗어나면 저주 받는다고 이런 식으로 안 했어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바울도 그렇게 안 한 거예요. 보니까..
얼마 있다가 떠나요. 떠났기 때문에 주관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2장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여러분 누군가가 누군가를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으니까 근심하는 거죠.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근심하게 할 자가 기쁘게 할 자이고, 기쁘게 할 자가 근심하게 한 자죠.
관심과 사랑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거죠.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깊은 사랑이 있으니까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고 그런 것이지, 또 내가 너희를 근심을 하거나 책망을 하거나 하는 것은 사랑이 있으니까 근심하고 책망하고 애태우고 하는 것이다..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아마 고린도 교회에 꽤나 속 썩이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바울을 근심하게 하고 고린도 교회 전체에 심려를 끼치고 그래서 결국은 어떤 처벌도 받았는가 봐요. 이 말썽꾸러기가..
처벌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그 정도로 온 성도들에게 지목을 받아서 그렇게 벌을 받았다면 계속 그렇게 벌받을 사람으로 천벌받을 사람으로 밀쳐서 생각할게 아니라,
7절,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징계나 징벌도 적당한 선에서 해야지 지나치게 해 가지고 그만 낙심하거나 또 어떤 경우 너무 심하면 반발도 해요.
징계의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으로 끝내야지, 너무 지나치게 밀어붙여가지고 사람이 설 곳도 없게 만들어버리거나 이렇게 하는 것은 잘 하는게 아니라는 거죠.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벌을 주거나 권징을 통해서 징벌을 받았을 때 계속해서 완전히 그저 따돌려서 끝장을 낼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이게 바울의 심정이죠.
여러분 이게 바로 아버지의 심정이고 어른들의 심정이고 하나님의 심정이지 않습니까?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지금 ‘내가 두고 보겠다’ 그 말이죠.
앞으로 그런 사람이 벌 받은 것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쯤했으면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낼 때가 되었다 그런 얘기예요.
어차피 우리 모두가 아무도 완전하지 않잖아요.
벌받은 그 사람만 죽일 놈이고 우리는 천사냐?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본인이 잘못을 깨달았으면 교회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잘 하는 것이다.
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한 사람을 지나치게 밀쳐서 상처를 입혀서 사랑으로 품지 않으면 마귀가 그것을 이용해가지고 그 사람 속에서 부글부글 해가지고는 반발해가지고 교회를 훼방하게 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12절부터 17절까지는 이것 때문에 우리가 또 한 번 이 고린도전후서의 연결성에 문제를 삼는 건데,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복음을 전한다 하고 드로아에 갔는데, 그 때 주 앞에서 문이 내게 열렸다는 거야.
주님께서 드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문이 활짝 열려서 일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13절,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그러면 드로아는 아시아의 끄트머리에 있는 항구도시요 마게도냐로 갔다는 것은 유럽으로 건너갔다는 건데, 이게 언제 있었느냐? 사도행전에 안 나오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 사이에 격한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리고 보낼 때 디도를 보냈는지 편지 보내고 뒤따라 디도를 보냈는지 어떻든 디도가 가서 쭉 돌아서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쪽으로 올줄로 알고 드로아에서 만나서 거기서 같이 일하기로 했던 모양인데, 못 만난 거예요. 드로아에서..
그래서 바울이 너무 근심을 해가지고 마음이 편치 못해서 드로아에서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치 못해서 일을 못하고 마게도냐로 갔다는 거죠.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참 놀라운게 어디를 가든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든지 문이 열려있다든지 이런 것을 보는 거죠.
무슨 사람들이 어떻게 냄새를 맡는지 그 진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온다 하는 냄새를 맡고는 그렇게 사람이 모여든다는 거야.
그렇게 바울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15절,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그러니까 로마군인들이 외국에 나가서 싸움을 해요.
싸움을 하고는 돌아올 때 승리를 하고 개선문으로 장군이 말을 타고 백마를 타고 쫙 들어오면 그 때 향기를 날리고 향수를 뿌리고 꽃을 던지고 대환영하면서 오는데, 그 때 승리하고 오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야말로 생명의 향기고 살아돌아왔기 때문에 맡을 수 있는 그런 향기로운 일이지만, 그 뒤에 포로로 끌려오는 사람들은 사망의 향기예요.
죽음이 가까이 왔다. 아니면 노예로 끌려가거나..
똑같은 향기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향기라는 거야.
그래서 바울이 지금 어느 곳에 갔을 때 바울의 냄새를 맡고 와서 생명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웬지 바울이 싫어.
그 복 못 받을 사람은 성경책 빨간 모서리만 봐도 밥맛이 떨어진다고 하는 거야.
찬송가 소리 역겹다는 거야. 사망의 향기처럼 들리는 거야.
참 불쌍한 사람이 있는 거죠.
우리는 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한 동네 한 복판에 예배당 종각이 올라와 있고 십자가가 있으면 그 마을에 생명의 말씀이 복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평화를 느끼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 들어오는 것 때문에 밤잠을 못자고 안달복달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어차피 사도바울에게서 나는 냄새를 어떤 사람은 생명의 향기로 어떤 사람은 사망의 냄새로 맡게 된다.. 이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얘기죠.
17절,
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 말씀 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첫째 수다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심히 혼잡하게 했어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율법학자 이런 사람들이 ‘미드라쉬 미쉬나 게메라 토셉타 탈무드 할라까 하까다 브라이다’ 자꾸 해석에 해석을 해가지고 끝없이 혼잡하게 하는데, 우리는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라고 하죠. 하나님 면전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것도 제가 참 배우고 싶은 자세이고, 늘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할 때, 내 욕심이나 내 사심이 설교 속에 묻어나지 않도록 그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더하지 말고 빼지 말고 왜곡하지 말고, 기록된 원목적대로 단순하게 전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사도바울의 마음이었고, 또 우리 모두도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 후서를 읽고 있지만, 우리의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생각하고 깨닫는 것이 미흡하여 온전하게는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록된 그 원목적을 바르게 깨닫고 우리도 배워서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