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안다고(본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요한복음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본문은 예수님께서 소경된 아들의 눈을 뜨게 한 후에 하신 말씀(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후에 바리새인들이 받아치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도 소경인가?
이 사건에서 과연 누가 소경인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당연히 성경을 읽는 독자는 바리새인이 소경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옳다는 가정하에서 성경을 보기에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 유대 땅에 오심은 병든 자 소경 죄인을 찾아 오셨다고 합니다. 소경을 찾으러 왔음에도 자신들은 소경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들에게서는 예수님이 유대 땅에 오신 목적의 유효성을 달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온 민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유대나라에서 최고의 실세 중의 한 학파로서 정말 백성의 모본이 될 정도로 철두철미한 신앙생활을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특정인이 자신이 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의 능력에 대하여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유대인들에게 존경심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회당에 모이면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서 앉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높은 자리를 비워놓을 정도로 바리새인을 우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국회의원들을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고 있지만 유대나라의 바리새인들은 욕 얻어먹을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욕먹을 행동을 하고 다녔다면 그들에게 높은 자리에 앉을 자리가 남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왜 예수님에게서는 소경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리새인은 그냥 소경이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을 향하여 소경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잘못된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사람은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둘러서 표현하거나 우회적으로 표시할 수는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실까요? 의사는 환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직고할 의무가 있는 자입니다. 환자가 아픈 곳이 있음을 알고도 의사가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는 세상에 전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만 하셔야 하기에 자기의 생각으로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
예수의 하신 말씀은 예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하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생각과 바리새인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는 바리새인의 생각과 바리새인이 보는 예수의 생각은 상호간에 충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는 예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생각이 틀렸음을 그냥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면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서도 성경을 보는 각자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제것으로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것으로 말하는(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그렇게 존경받는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제것으로 말하는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온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는 이천년 전 유대나라에 보내진 하나님의 보내신 자(천사)였습니다. 지금도 보내주신다고 하는 그 천사는 보내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천사가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땅이 제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전부라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이 그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을텐데 자신이 그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둠의 세상에 빛이 보내진다고 합니다. 빛이 보내진다는 것은 어둠이기에 보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천년 당시 유대민족 중에서 존경받는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역시 어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 전 뿐만 아니라 그 어둠은 동일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역시 어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천년 전 유대나라에만 어둠이었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은 빛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우리는 또하나의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보내지고 있다는 자체가 어둠에 보내지기에 우리는 어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이 없다면(이미 빛이 존재한다면) 빛은 이미 낮이기에 올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독수리가 시체들이 있는 곳에 온다는 말씀이 있지요. 먹잇감이 없으면 독수리는 오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들(바리새인)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전의 바리새인이 소경이었듯이 지금을 사는 우리도 소경인 졸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를 비추이는 거울이라고 하였지요. 이천년 전의 그 바리새인을 통해서 지금의 바리새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바리새인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인 줄 알면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읽으면 언뜻 바리새인보다 더 열심히 행해야 천국 간다는 말로 읽혀질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그 의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성도의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떡(말씀=예수)을 먹고 배불러서 남은 것이 12바구니(열두아들=이스라엘=교회)로 버려지지 않는 택한 성도를 의미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성도나 시작은 모두가 볼 수 없는 소경된 자들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소경이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접하지 아니한 바리새인은 소경 그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고 성도(영접한 제자들)는 그 소경의 상태에서 점점 깨어나는,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 살아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볼 수 없는 소경입니다. 모든 사람의 시작은 미미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영접한 자에게는 그 나중이 창대하게 됩니다.
소경(미약)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안에 속하여 배움으로 믿어지는 그 믿음으로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함은 반드시 보낸 자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은 여러분이 만날 수도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아버지께 배워서 택한 자만 영접할 수 있는 힘(능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출처; 네이버카페 생명의 만나 남용모 목사
유튜브 남용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