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조건 없이 환대하라(벧후1:5-7, 약2:8-9)
2024.9.22,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김일수 명예교수가 있다. 이분은 제3세계 형법을 대표하는 유명한 형법학자이다. 또한 신앙적으로는 신실한 장로님으로 알려져 있다. 매학기 김일수 교수의 탁월한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강당을 가득 메운다고 한다. 김일수 교수는 첫 시간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형법이 최고인줄 믿고, 그 형법을 배우고자 이곳에 왔는데요.... 형법보다 위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형법은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학교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각자가 무슨 역할을 하든,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잊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형법보다 위대한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사랑은 세상의 어떤 규정이나 원리보다 위에 있다, 사랑이 우리를 살린다. 그러나 안타깝게 우리 사회는 법조항은 보면서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도 콜카타(Kolkata)의 빈민가에서 헌신했던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는 이런 말을 했다.
“행복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짧은 한 마디이지만, 이 역시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생수 같은 명언이다. 이런 말은 십자가 앞에서 진심으로 자기부인의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슴의 언어이다. 사실 김일수 교수나 테레사의 말 속에 오늘 설교말씀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지난 수 주 동안 베드로후서 1장 5-7절 말씀 속에서, 사도 베드로가 강조했던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성도들이 가질 덕목들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다(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살기를 더욱 힘쓰지 않는 자는 (영적인) 맹인과 같다고 했다(벧후1:9) 다 같이 읽어보자.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5-9)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모든 덕목들의 절정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눈다. 사도 베드로는 “형제 우애(필라델피아)에 사랑(아가페)을 더하라”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서 쓰인 사랑(아가페)이란 조건이 없고, 차별이 없고, 변함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오늘 본문 외에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요13:34-35,요일3:18,요일4:11 등).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아가포멘)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펜토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에가펜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아가판)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아가파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아가페사)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가파테)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아가펜)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오늘 또 하나의 본문인 야고보서 2장 8-9절 말씀에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것을 말씀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아가페세이스)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그러나 이러한 권면과 명령이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친구의 사랑이든, 아가페의 사랑이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주님 밖에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힘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속에서 형제 우애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에 “사랑(아가페)을 더하라”고 강조했던 사도 베드로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형제우애”라는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내용보다 사랑의 대상이다. 여기서 말한 “형제”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범위를 확대하여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가난한 이웃, 소외된 자들, 열방, 선교지의 사람들 등)에게 까지 조건 없고,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 성도들의 가질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사람을 향한 조건 없고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할 때, 짝꿍처럼 함께 다니는 말이 있다. 바로 환대(Hospitality)라는 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아들이 불특정 다수인 모든 인류를 환대하신 사건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성경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조건이나 차별 없이 사랑하고 환대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강도만난 사람을 데려다 치료하고 돌보아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10장)는 성경적인 사랑과 환대가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비유의 내용은 개인적으로 찾아서 읽고 묵상하기 바람).
한국전쟁 후에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우고 피난민들을 위해 무료 진료하면서 헌신했던 고 장기려 박사(장로)가 있다. 그는 아가페 사랑과 환대를 잘 실천한 분들 중의 한 분이다.
장기려 박사가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의 처방전에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를 주시오”라고 쓰고, 자신의 월급에서 닭 값을 지불해 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예수님의 심장을 품지 않고는 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이외에 감동적인 일화들이 많다. 그의 사랑과 환대에는 조건이나 차별이 없었다. 그는 죽기까지 사랑을 실천했다. 이것이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더욱 힘써야할 방향과 덕목이다. 우리가 회복해야할 초대교회의 모습은 성령충만 받아서 단지 교인 숫자만 늘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의 이웃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환대하며, 그들의 필요를 섬기는 것까지가 초대교회의 회복이다.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는 봉사활동이나 구제사역 심지어 전도사역도 그 사람이 우리교회에 꼭 출석해야한다는 조건이 붙으면 안 된다. 단지 그 영혼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면 된다. 봉사나 환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이 기뻐하신다. 물론 이렇게 힘쓸 때, 찾아오는 열매와 보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지금까지 우리교회와 성도들도 이렇게 사랑과 환대를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국내는 물론 이름도 알지 못하는 국외 선교지의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건축하고, 장학금과 선교비와 구제비를 보내는 것에 무슨 조건이 있겠는가? 아무 조건 없이, 차별 없이, 변함 없이 주님의 사랑을 베풀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주님께 값 없이 받은 사랑, 주님의 이름으로 값 없이 흘러가게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또한 놓치기 쉬운 사랑과 환대의 대상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다시 한 번 오늘 또 하나의 본문인 야고보서 2장 8절 말씀을 보라.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아가페세이스, 아가페)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2:8)
이 말씀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이웃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환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도 사랑하고 환대하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심리이론 중에 헬퍼 증후군(Helper Syndrome,조력자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는 헌신적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돌보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일상에서는 천사처럼 비춰지지만, 정작 그로인해 자신은 병이 나기도 하고(우울증, 트라우마, 질병 등), 가족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주로 의료진, 간호사, 교사, 복지사, 상담사 등 봉사와 관련된 직업군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며, 예전의 우리의 부모들도 그러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성도들 중에는 자신은 돌보지 않으면서 교회 일만 하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은혜 받은 중직자들이나 선교사들, 목회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성도들은 교회 안팎의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고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자신만‘이 아님) 귀하게 여기고 돌보아야 한다. 믿음이 좋다는 것을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만 환대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 없듯이,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환대하고 사랑해야 그것이 힘의 원천이 되어서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사랑은 가슴의 언어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본래부터가 경험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서두에서 마더 테레사가 했던 “행복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라는 말을 언급했다.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 안에의 형제들, 교회 밖의 이웃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이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 성도들이 더욱 힘써야할 덕목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세상을 향해 더욱 힘써 서로 사랑하고, 더욱 힘써 환대하자.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을 가슴으로 경험해 가자. 이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새 힘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