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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묵상글 들 ( 부활 2주 토요일-온갖 두려움에 대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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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2주 토요일-온갖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없이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제자들 얘기인데
올해는 다른 주제로도 묵상할 수 있지만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서 묵상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무엇이고 어떤 두려움이 있으며
왜 있는지 뭐 이런 것들에 대한 묵상이지요.
두려움이란 '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라는
사전적 정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내가 싫어하는 것이 내게 닥칠까
꺼리는 극도의 부정적이고 불안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는 만나게 될까 두려운 존재였지요.
그러니까 웬만큼 싫어하면 두려울 것까지 없지만 너무 싫어하면
싫어하는 일이 내게 닥치거나 그런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지요.
그런데 그 싫어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두려움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첫째는 존재적인 두려움입니다.
존재적인 두려움이란 존재의 안위와 생사와 관련한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은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말끝마다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죽는 걸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같은 맥락에서 병고를 두려워하고 요즘 같으면 코로나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일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성공하길 바라고,
특히 남자들은 일의 성공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끼는데
그만큼 일의 실패나 좌절이 두려워 자기 전부를 걸다시피 하고,
반대로 실패할까 봐 아예 일을 벌이지도 않거나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도 하지요.
셋째는 관계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립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관계의 단절이나 이별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거절이 두려워 부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밤에 두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밤이 볼 수 없게 하고 알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같고,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종합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필이면 어두운 밤에 길을 떠납니다.
풍랑이 일어 몽땅 죽을 지경입니다.
갖은 애를 써도 헛수고이고 그래서 기진맥진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타나시는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니 유령 같습니다.
낮이면 주님인 줄 금세 알아챘겠지만 밤이어서 그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자
배는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다다르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고 같이 계시면
두려움은 즉시 사라지며 우리는 목적지에도 어느새 도달케 됩니다.
주님 없이 길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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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사제품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 수 있을까? 제의를 입은 채 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 할수록 자신은 더 없어지고 두려움만 점점 커져 갔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저의 첫 질문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았는가? 그 말씀을 외우고 되새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가?
그렇게 성경을 다시 읽어 나가다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병자들의 치유와 빵의 기적을 옆에서 직접 보았음에도 큰 파도에, 또 그 어둠 속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고 소리 지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고자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이 만나 주셨는데도 ‘사제품’이라는 큰 관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네가 울부짖을 때마다, 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마다 만나주었던 나다. 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이 말씀이 마음속에서 울리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고, 가끔 스멀스멀 그 두려움이 피어올라 올 때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묵상하던 가운데 ‘그렇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려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가려는 곳, 하느님 품 안에 가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어느덧 사제로 산 지 26년이 되어 갑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시간이 가겠지요.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려고 노력만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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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6-21: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빵의 기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카파르나움으로 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어 늦도록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배를 타고 떠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제자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그 상황이 제자들을 더욱 절박하게 한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배를 어디로 저어가야 할지 몰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7절) 그들의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상황은 적어도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분의 거룩한 법에서 떠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밟고 인간의 모든 교만을 내리누르며 물 위를 걸어오신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가며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재난이 찾아오고 이런 일이 많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파도를 밟고 건너오신다. 그러나 너무 어려움이 커서 끝까지 견뎌내려 노력하는 이들마저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 복음과 성경을 통해 답을 찾아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럴 때 예기치 않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구해 주신다. 당신의 권능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것을 실현하게 해 주시는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다.”하시며 귀에 익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2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적을 똑똑히 보도록 배 위에 오르시지 않고 물 위를 걸으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배에 모시려고 하는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배와 주님께서 모두 뭍에 닿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이미 목적지에 닿았다고 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의탁할 때, “어느새”(21절) 바람이 걷히고 목적지에 닿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파의 난관, 박해자의 손길, 그 안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분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려 노력하는 삶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우리,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항상 목적지에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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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떠오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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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
오늘 복음의 상황은 빵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 억지로라도
당신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쫓아오던 군중을 피해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겪으신 일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따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이 바람은 북쪽 헤르몬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과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마주치는 맞바람이었습니다(마르 6,45-52).
새벽이 되자 더욱 거세어진 바람에 밀려 배가 뒤집어질 지경이 되었고 높은 파도로 인해
스며든 물이 가득 차서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마태 14,22-33).
예수님께서는 며칠째 군중을 가르치시느라고 시달리셨기 때문에 커다란
기적을 일으키시고 나서는 이들로부터 벗어나서 혼자 기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중도 제자들도 다 돌려보내시고 헤르몬 산에 올라 하느님께 기도하시다가 문득
제자들이 처한 위험이 감지되셨나 봅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매우 다급하게 느껴지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타고 가실 배도 없었던 형편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시느라고
물 위를 걸어가서 구해 주셨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인 줄 착각하기도 했지만(마태 14,26),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배에 오르시자 그렇게 거세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마르 6,51).
기적 같은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때는 맞바람 때문에
노를 젓기가 그렇게 힘들더니(마르 6,48), 그분이 함께 계시니까 노를 젓지 않았는데도,
배가 어느새 제자들이 가려던 곳에 슬그머니 가 닿았던 것입니다(요한 6,21).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는 자연현상의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기적은, 이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도 가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려던 곳에 어느새 가 닿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빵이 늘어난 일이나 물 위를 걸은 기적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려진 이 기적 현상이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메시지이고, 이는 독서에서 부제 직무를 신설한 사도들의 행위와
맞물려서 교회 직무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사제든 부제든 교회의 직무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는 점이고,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제의 독서분 말씀에서 들으셨다시피, 성령을 받은 후 사도들은 대외적으로는
박해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사제, 수석 사제들과 경비대장 등을 앞세운 유다 최고 의회로부터
툭하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매질도 당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 4,20)고
버티기도 하고,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 하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대사제로부터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사도 5,41)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군중 앞에서 태생 불구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이 기적을 목격한 군중과 소문을 들은 이들을 합해 무려 5천 명 이상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며, 몹시 분주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공동체 내부에서는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이 식량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은 일로 해서 불평이
터져나오게 되자, 사도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던 복음선포에 집중하고자 식량 배급과
공동체 내부의 모임을 주재하고 말씀을 전할 직무를 신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사도들은 이 직무를 담당할 제자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사도 6,3)이어야 한다고
직무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부제 직무가 신설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면제하게 된 결정과 더불어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으로 합의한 첫 결정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소집했던 역대 공의회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내린 이 결정은 또한,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예수 추종의 직무에 있어서 사도들이 수행하던
사제직으로부터 예언자직과 왕직을 분리해 내려던 조치였습니다.
이리하여 부제들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된 스테파노의 예로 미루어 보면,
당시 부제 직무는 말씀도 선포하고 식량 배급도 담당한 것으로 보아 그렇습니다(사도 6,8-15).
직무의 구분과 상관없이 변함없이 간직해야 하는 자세는 예수 추종과 성령 순종으로서,
사도들은 매질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특권으로 인식하여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떠받듬을 당하는 게 아니라 모욕을 당함에 있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세야말로 사도들이 보여주는 예수 추종과 성령 순종, 그리고 식별해야 할 지혜의 모범입니다.
사제와 부제 등 오늘날 교회 직무 담당자들도 이러한 은총을 청해 받는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현존을 청하고, 이로써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 그리고 무엇이 이를 위해 필요한 지를
식별하는 지혜를 갖춘다면, 우리가 탄 교회라는 배는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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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2018년 4월 14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에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친근하면서도 두려움의 존재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초월의 두 모습이겠지요.
스승께서는 허기진 오전명이나 되는 군중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신 표징은 감격 중에 감격이었습니다.
그때도 물론 제자들은 스승께서 자랑도 스러웠지만 나누어도 나누어도 끝이 없는 빵과 물고기를 나르면서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에 싸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스승님을 모시고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 속에서 신도 났지마
사실 피곤한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스승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한적한 곳으로 피해가시고 저녁 때가 되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을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는 설명이 없는데 요한복음의 분위기는 제자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갈 것도 아니고 기약 없이 배에서 스승님을 기다릴 것도 못하는 그야말로 어정쩡한 모습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와 마르코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그들을 카르파르나움으로 가서 당신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14,22; 마르 6,45)
그들이 배는 바람에 밀려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갔을 때입니다. 뭍에서 약 십 여리의 거리에 배를 탄 제자들은 큰 바람에 이는 큰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시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마태오와 마르코(마태 14,25; 마르 6,48)는 그 때를 이튿날 새벽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그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스승님을 배 안에 모셨는데 배는 이미 어느새 목적지인 카파르나움에 닿았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이 부분의 설명이 자연스럽지가 않고 어색합니다. 제자들 배가
십 여리 갔을 때 주님을 만났다고 했는데 떠난 곳에서 카파르나움까지의 거리가 약 삼 십리(약 12키로)라고 하는데 아직도 이 십리를 더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요한복음과는 달리 스승께서 배에 오르시고 바람이 멎었는데도 ‘그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고만 설명합니다. 목적지에 당도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는 거리가 문제가 아니고 바람을 만나 고생하던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서야 카파르나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고 봅니다.
빵을 많게 하시는 주님의 표징 보다는 파도를 헤치고 걸어오시는 스승의
표징은 두려움을 불러 오게 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적인 만남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스승께서는 바로 참 인간이신 예수님으로 제자들과 정답게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물위를 걸어오시는 스승을 못 알아보고 두려움에 싸여 있는 제자들을 전하는 것은 아무리 가까운 제자들이라도 아직 주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하며 세계로 향하면서 그리스계 사람들도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셨지만 그 구성원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집니다.
그 발단은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마다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홀대를 받는데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상의를 해서 자신들은 말씀봉사에만 전념하고 일곱의
식탁 봉사자들을 뽑아 세우기로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를 하고 선출된 일곱명의 봉사자들을 사도들 앞에 세우고 안수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과 부활을 체험하게 하시고
복음선포를 위해 세상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참 인간으로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사랑으로 제자들과 일치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신앙인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갖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데도 때로 탄식하고 삶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도 갖습니다.
인간의 한계에서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과 갈등을 갖기도 하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면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세상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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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료신부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땜빵사목’을 주제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본당 사목은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사제는 가끔 피정도 가야하고, 휴가도 가야하고, 아프면 입원도 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피로와 갈등 때문에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대신할 사제를 찾아야 합니다. 교구에서 그런 문제까지는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며칠은 문제가 없지만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할 때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사제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걱정도 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에 있는 스페어타이어처럼 항상 준비가 되어있는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사목 경험이 있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주고, 강론도 잘하는 사제입니다. 911에 전화를 하면 급한 문제를 해결해 주듯이 교구에 연락하면 ‘땜빵사제’를 보내 주는 것입니다.
‘거리사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나 식당에 사제가 머물 장소를 마련합니다. 오랫동안 학생사목을 했던 사제면 좋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열정으로 학생들이 오는 길목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제는 카페나 식당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강의를 해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미사를 해도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고민, 아픔, 희망을 들어줍니다. 고백성사를 원하면 즉석에서 성사를 줍니다.
책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같이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본당에 청년이 없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청년을 기다리기보다는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낚시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고기를 잡지 못하면 장소를 옮기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땜빵사목과 거리사목’을 시도한다면 인사적체로 힘든 교구에 ‘숨구멍’이 생길 것 같습니다.
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땜빵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부터 시작되어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는 코로나19의 영향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현장을 찾아가는 ‘홍보’입니다. 그런데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말에 사무실이 쉬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한인 성당의 사제가 몸이 아파서 한국으로 돌아갔고, 후임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3개월만 도와주기로 했는데 어느덧 7개월이 넘었습니다. 비자문제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본당의 주일 미사도 도와주었습니다. 병자성사, 장례미사, 혼인성사, 세례성사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나누었던 ‘땜빵사목’을 여지없이 이곳 뉴욕에서 하고 있습니다. 부르클린과 롱아일랜드에서 주일미사를 집전하고, 오후에는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점심은 차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땜빵사목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사도들은 ‘땜빵사목’을 할 수 있는 부제들을 선발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커지면서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 마귀를 쫓아내는 일, 병자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커지면서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났습니다.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업무입니다. 음식을 나누고, 재산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돌보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조직의 관리와 운영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협조자인 부제들을 선발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땜빵사목과 거리사목은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었습니다. 교구가 공동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사목의 주체라면 수도회는 교구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교우들의 어려움을 들어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수도회는 ‘재속회’를 두고 있습니다. 재속회는 수도회의 후원자들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교우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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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학창 시절에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가 기억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명절 때에 단골로 방송될 정도로 지금까지도 인기 있는 영화입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대한 소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봤었음에도 제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같은 영화인데 다른 관점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다시 이 영화를 찾아서 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 관점으로 영화를 보니 또다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영화를 새롭게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 가득하신 모습,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모습, 언제나 내 편이신 분으로 생각하면서 하늘에서 우리를 인자한 모습으로 바라보시는 모습을 떠올리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꼭 우리의 생각 안에서만 머무시는 분이실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또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랍고 신비스러운 표징들을 기억한다면 이 역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새로운 모습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주님의 모습을 한정 지었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라고 단정을 짓는 순간, 주님을 알아보는 우리의 시각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에 대해서도 놀라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보시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알아 뵙고 주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곧바로 가려던 곳에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알아 뵙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려는 곳,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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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요한 업적 중 대부분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한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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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세요.
어느 형제님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잉꼬부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내와의 대화가 불편해진 것입니다. 자신의 질문에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 신문에서 요즘 중년 중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내도 혹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시험해봤습니다.
먼저 방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소리로 아내에게 “내 말이 들려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불렀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고, 더 가까이 가서 불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슬픈 마음에 아내 바로 뒤로 가서 아내를 부르자, 아내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잘 들려요. 네 번이나 대답하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내가 아니라 바로 남편 본인이었습니다. 자기가 들리지 않는 것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만 원망을 쏟아붓게 됩니다.
자신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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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예수님 중심의 균형과 조화, 일치의 공동체(삶) -
어제는 신록의 아름다움 눈부신 날이었지만 하루 종일 찌푸듯한 날씨에 몸도 마음도 아팠던 간간히 비뿌리는 음울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어제는 세월호 참사 7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당시는 주님 수난을 기리기 시작한 성주간 수요일이었지만 지금은 부활2주간 부활시기입니다. 지금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312명 희생자들 모두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문득 오래전 위령성월 11월에 썼던 ‘죽음’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귀환이다, 해후다, 화해다, 구원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1998.11.10.
참 요즘은 지인들이 곳곳에서 소리없이 여러분 떠났습니다. 엊그제도 부음을 들었습니다. 45년전 초등학교 재직시 사랑했던 제자의 어머니, 김명숙 로사 자매님이 선종했다는 소식이었고 어제 아침 연미사도 봉헌했습니다. 참으로 신심깊고 착한 분으로 제 모친의 초록색 털조끼를 손수 짜주었고, 제 왜관수도원 종신서원식때도 찾아 주셨던 분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삼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수녀원 피정지도를 끝내고 10일만에 귀원하니 온통 신록의 바다가 된 수도원 풍경입니다. 흡사 신록의 바다 한 복판에 떠있는 섬처럼 보이는 수도원입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밖을 향할 때는 라일락 그윽한 향기와 더불어 별세계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정말 깨달아 눈이 열리면 하루하루가 새하늘과 새땅의 하늘 나라일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도원 십자로의 예수님 성심 부활상 아래 바위판 정면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입니다. 측면에서 바라볼 때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사람의 모습은 여전한 감동이었습니다. 신록의 단풍나무와 빨간 철쭉꽃 배경의 예수님 부활상과 기도하다가 된 바위가 된 사람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기도하다 바위가 된 사람! 그 자체가 영원이네요!”
사진과 더불어 지인에게 보내신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예수님 부재시의 내 자신이나 공동체가 내외적으로 얼마나 위태한지 상징적으로 참 잘 보여줍니다. 한 밤중 격랑에 휘둘리는 공동체라는 배가 흡사 때로 불안과 두려움에 크게 휘둘리는 각자의 내면을,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아니 기후위기와 코로나와 온갖 사유들로 혼란중에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를 국내 상황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때로는 말 그대로 위기상태의 현실이 풍전등화, 일엽편주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이 때 우리에게 들려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배안에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우리 공동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균형과 조화, 일치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성공적 광야 인생 항해 순례 여정을 마칠 수 있음을 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공동체 모습이 그대로 복음의 항해여정중 위기에 직면한 공동체 배를 상징합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내부의 분열로 파선의 위기에 봉착한 참 위태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소위 이상적 유토피아 사도행전 공동체에도 갑질의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갑질, 재벌, 내로남불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 용어로 외국어 번역시는 한글 발음 그대로 사용한다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된 사도들은 영적본능으로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고 기민하게 대처합니다. 이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역할 분담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균형과 조화, 일치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사도들의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의 은총이 놀랍습니다. 예전 장상의 불교 사찰의 방장과 주지, 이판승과 사판승의 제도를 부러워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영성과 수행에만 전념하는 방장과 이판승, 사찰의 재정과 관리, 사무에만 전념하는 주지와 사판승의 역할 분담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성과 재무 관리의 CEO 역할 둘 다하기에는 수도원 원장의 직무가 너무 벅차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영적봉사와 식탁봉사의 역할 분담이 주는 가르침이, 깨우침이 참으로 고맙고 교회 공동체 생활에 깊이 고려할 사항이겠습니다. 새삼 교회(수도)공동체 재무(당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다(I AM)’ 바로 하느님 이름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I AM for us)’,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I AM with us)’임을 암시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쓰면서 하루하루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매일 강론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강론 쓰는 것이 단 하나의 간절한 제 소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 중심의 균형과 조화, 일치의 아름다운 공동체 건설에 온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수시로 주님께 다음 감사 고백 기도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중심,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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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려움은 최선을 다할 기회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체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하셨지만 나는 밖에서 허둥거렸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 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 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욕되지 않게 포기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십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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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삶의 풍랑에 개입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요한 6,17)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의 부재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6,18)
물 일에 익숙한 제자들이 큰 바람을 예견 못하고 배에 오릅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환경적 어려움을 맞닥뜨린 것이 오늘 제자들을 뒤흔든 첫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요한 6,19)
두 번째 두려움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옵니다. 사람이 물과 관계하는 방식은 물에 잠기거나 헤엄치거나 둘 중 하나니까요. 체험했든 전해 들었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월적으로 보면 신비일 테지만 기괴하게 보면 유령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시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주님의 소리가 물 위에 머물고 ... 주님께서 크나큰 물 위에 계시네."(시편 29,3)라는 시편작가의 고백처럼, 물 위를 걸어 호수의 성난 힘 위에 우뚝 서신 분께서 말씀으로 제자들의 내적 동요까지 가라앉혀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부재가 그분 현존의 권능과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여정이 되기도 하지요. 없어 보아야, 잃어 보아야 현존의 행복을 알 수 있으니까요. 영성생활에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주님의 부재 상황이 우리를 갈증과 두려움으로 삼켜 버리게 허락하지 않으려면,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성난 힘 위를 당당히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리라는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 안에 직무가 분화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며 유다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선 이들 안에 갈등과 소요가 생겨납니다. 아무리 뜨거운 마음과 선의로 시작한 길이어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도 새어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들이 느낀 차별과 불공정은 공동체의 수치스런 흠집이 아니라, 개선하여 더 나아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오늘의 독서 대목은 사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를 잘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지요.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명을 지키면서, 다른 선량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봉사의 직무로 초대합니다. 주님의 지체가 저마다 받은 모든 소명이 소중하고 가치로우며, 사람들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참여함을 한 걸음씩 익혀 나가는 여정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세상 안이든 교회 안이든 왜 불일치와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런 고통과 어려움의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귀 기울이고 지혜를 모아 찾아나가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잠시의 혼돈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사도 6,7)는 놀라운 체험까지 덤으로 받을 겁니다.
교회는 넘실거리는 어둠의 물 위를 항해하는 배입니다. 우리는 그 배 안에서 외부적 어둠과 바람과 파도는 물론, 내부적 갈등과 충돌의 아픔까지 떠안고 가야 하지요.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분 몸의 지체인 서로를 믿고 기다려 주며 무지와 의혹의 밤바다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등대와 같은 위로이고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예수님 목소리에 위로와 힘을 받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뒤흔드는 문제들을 바로 그 예수님께서 압도해 짓밟으시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이 여정을 통과하면서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을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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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진리와 정의를바로세우자!'
어제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화'를,
오늘은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화'를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나 같은 모습은,
진리와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그런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실을 지키고 정의를 세워라."(시편45,4)
우리 주위에는 진실을 감추고, 정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과 책임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나아가 어떤 대책 수립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어제로 7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입니다.
진실을 감추고, 정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모두가 함께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바로 세워진 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이루시려고 했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 하느님의 제자들, 곧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새로운 일꾼들인 봉사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독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와 다른 여섯 명의 봉사자들이 뽑히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봉사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봉사자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진리와 정의를 세우는 일,
곧 하느님의 나라 건설에 필요한 봉사자들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우리 모두 함께 동참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이 되게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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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도행전 6,1-7
요한 6,16-21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기도야말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수려한 금강산의 풍경도 쫄쫄 굶은 상태로 바라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크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피정오신 분들을 동반할 때 자주 체험합니다.
음식이 아주 중요하더군요.
일단 맛갈진 음식으로 배를 잘 채우고 나면, 그 뒤는 만사 오케이입니다.
여정이 순조롭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상처입고 소외감 느끼는 이유는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먹는 것에서 차별대우 당한다고 느낄때 받게되는 상처는 만만치 않습니다.
언젠가 한 축하연에 갔었는데, 일반석, 특별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차려진 음식들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별석에 앉아있는데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에다, 부담스런 마음에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주최측 담당자에게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첫번째 독서로 낭독되고 있는 사도행전에서는 천국을 앞당겨 살았던 공동체, 세상 모든 공동체들의 모델인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상이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풍경 하나를 전해줍니다.
이상적인 공동체였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만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발단은 바로 음식에서의 차별대우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접할 때 마다 속으로 웃습니다.
초대교회도 별것 아니었구나,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6장 1~7절)
당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외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공동체 안에는 본토 유다인들, 즉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본토 유다인들의 텃세가 좀 있었겠지요.
더구나 두 유다인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보니 생기는 오해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부류 사이에 은근 알력도 발생했을 것입니다.
하필 그런 순간 그리스계 과부 배급 차별 사건이 발생합니다.
화가 잔뜩 난 그리스계 신자들이 사도들을 찾아와 강력한 항의를 했습니다.
그 순간 사도들이 보여준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계 신자들의 민원을 일단 접수합니다.
사도들이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었겠지요.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억울함을 토로한 그리스계 그리스도 신자들의 민원 앞에 사도들이 미적거리지 않고 초스피드하게 대응한 것이 눈에 띕니다.
사도들의 제안 앞에 온 공동체가 기쁘게 동의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한계와 약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사도들은 과부나 환자들 같은 약자들을 돌보는 자선행위를 개별적으로 관리감독해왔습니다.
사도들은 보다 본질적인 직무에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하며, 식탁 봉사나 배급, 자선 행위를 일곱 부제들에게 일임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기도야말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인 임무라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식량배급이나 식탁봉사가 차원 낮은 일이라고 여긴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보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가장 근본적인 사명, 1차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사람 참 많습니다.
뭔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반드시 해야될 일은 죽어도 하지 않습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만 골라하고 있습니다.
그 둘을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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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6,1-7
요한 6,16-21
두려움이 있는 만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관점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과정은 공관복음과 비교하면 매우 짧게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을 배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성체성사’와 연결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성사를 설명하는 내용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을 먹인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역시 성체성사의 예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도 이 내용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바로 ‘두려움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고,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였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세상이란 바다의 풍랑에 휘둘리며 걱정과 근심으로 살아가는 한 척의 배와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며 세상을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셔 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무엇을 잃을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건강과 자녀, 재물 등을 잃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리스도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은 십자가를 지게 만들어 나를 온전히 내어주게 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내가 있으면 사랑은 그만큼 없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모셨다면 당연히 내가 죽었으니 두려움을 느낄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나와 내가 소유했다고 믿는 것을 잃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사랑은 적극적으로 나를 잊고 남을 위해 바치게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들어왔는데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윤발은 1955년 홍콩 라마섬의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절한 가난을 겪으며 유년 시절을 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무와 고구마를 먹으며 중학교를 중퇴하고 상점 직원과 집배원 등의 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갑니다.
우연한 친구의 권유로 연극을 시작하고 연기 생활에 접어듭니다.
워낙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함이 있었기에 그는 점차 감독들의 시선을 받게 됩니다.
1980년 ‘상해탄’이란 영화로 인기를 얻게 된 그는 그때부터 신문에서 우연히 본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선행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 기사를 보고 감명을 받은 오우삼 감독은 그를 캐스팅하여 영화를 찍는데 그것이 바로 주윤발의 인생 최고작 ‘영웅본색’입니다.
오우삼 감독은 주윤발이 영화 속 인물보다 더 의리가 넘치는 인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래에 8,100억 원의 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홍콩 반환 반대 시위에 동조하는 의미로 나라에서 금지한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시위 현장에 나타나서
중국 TV나 영화 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검소한 주윤발은 “괜찮습니다. 돈을 좀 적게 벌면 되죠.”라며 웃어넘겼습니다.
최근 태권도와 김치의 종주국이 중국이라는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이 8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김포공항에서부터 김치 냄새가 났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온 동네 아이들이 태권도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논란에 대해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처럼 공항에서 김치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거리에서는 태권도복을 입은 학생들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의 두려움 없는 행보는 인간관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얼마 전 간암으로 70세에 사망한 유명 배우 ‘오맹달’과의 사연입니다.
오맹달은 왕년에 술과 여자,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끝에 거액의 도박 빚까지 지는 바람에 중국의 최대 조폭 삼합회의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이때 오맹달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한 주윤발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주윤발은 평소 의리남 행보와는 다르게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며 차갑게 단칼로 오맹달의 부탁을
거절해버렸습니다.
이미 부와 명성을 크게 쌓은 주윤발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오맹달은 주윤발이 1원 한 푼 주지 않자
그때부터 크게 원망하기 시작하며 분노심을 원동력 삼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본업에 매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화계에서 오맹달은 술과 도박에 빠져 자기관리가 안 되는 문제아라고 찍혀버리는 바람에
그의 바람만큼 복귀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실낱같은 희망으로 간신히 영화 ‘천장지구’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는 인생 연기를 펼치며 그해 홍콩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타내는 쾌거를 거두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오맹달은 배신자라고 생각했던 주윤발을 시상식에서 마주치자 아직 앙심이 풀리지 않아 주윤발의 축하 인사마저 냉랭하게 무시했고 이후로도 주윤발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계속 주위 사람들에게 비췄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오맹달을 구해준 작품 천장지구의 진목승 감독이 술자리에서 오맹달을 부르며 그가 몰랐던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맹달씨, 나는 사실 당신을 캐스팅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 또한 당신이 도박과 술에 빠진 망한 배우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친구 주윤발이 그대를 내게 적극적으로 추천했습니다.
당신의 친구 주윤발이 우리 영화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내게 사실 부탁이 아니라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고요.
그리고 주윤발은 당신에게 미움받을 걸 알면서도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은 당신을 캐스팅한 내게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 주윤발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고맙다고 말하세요.”
이 얘기를 듣자마자 오맹달은 그 길로 눈물을 흘리며 찾아가 사과를 했고 주윤발의 인성과 큰 그릇에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주윤발 마침내 태권도와 김치 중국 논란에 대해 입을 열다’, 유튜브 채널 ‘비지이지TV’]
만약 주윤발 씨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비난받기 싫어 돈을 얼마 주었다면 오맹달은 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만큼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돈과 명예, 심지어 우정까지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주윤발 씨 안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윤발 씨와 다르게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지는 게 두렵고, 미움받고 멸시받는 게 두렵고, 조금 고통받는 게 두렵다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모신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이미 두려움에 바다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자아에게 말입니다.
그러니 그 두려움을 받아들이면 다른 두려움은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위험에 있는데 아이 시험 성적 떨어지는 게 왜 두렵겠습니까?
성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분이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사랑이 들어오시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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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요즘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이웃 본당에서 미사를 가끔 하곤 합니다. 이틀 전에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영성체를 한 후에 잠시 신부님께서는 성체를 감실에 모시면서 큰절로써 예수님께 예를 다하며 넣는 것을 보면서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니 그렇게 공경을 하는 것입니다. 또 성체가 예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데 그런 모습을 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런 것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내놓으신 성체성사에 관한 회칙을 읽으면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성체를 의심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질문을 통해서 좀 더 성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고자 하는 뜻에서 가진 질문이었습니다. 의심을 하게 된다면 성당에 다닐 필요도 없고 미사를 봉헌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짧은 회칙 안에 있는 내용은 아마 신학적인 내용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며 성체에 대한 공경을 가장 컴팩트하게 압축을 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 예수님과 성체로 계신 예수님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참 어려운 내용입니다. 근본 본질은 같은 분이시지만 성격이 조금 다른 것이지 않을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성체를 향해서는 두려움 같은 걸 느끼는 분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있다면 한 가지 경우가 있을 겁니다. 이것도 신심과 믿음이 좋을 경우에 일어날 일이지만, 대죄를 지어 은총에 없는 상황에서 모령성체를 할 경우가 있을 때, 그때 이 모령성체에 대해 정확하게 알면 두려움이 앞설 겁니다. 단순히 모령성체를 하면 되지 않는다고만 아는 것과 그 실체를 알게 되는 것과의 차이는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특히 연옥영혼에 대한 교회에서 인준된 책을 통해 보면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걸 알고 있다면 모령성체를 사실 알고서는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성체가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서 두려웠는지는 두 가지 정도로 압축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낮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 두려웠을 텐데 더군다나 저녁에 일어난 것이니, 시간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호수 위를 걸으신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긴 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도,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한 배경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배제하지는 못할 겁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사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그걸 눈으로 실제 본다면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당연한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해서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아마 경외감 같은 그런 두려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경외감으로써 두려움이라면 그다지 부정적인 모습은 아닐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자세로 바라봐야 할지를 묵상해봤습니다. 사랑 가득하고 자비심이 심연을 감싸듯 대자대비하신 분으로도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으로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써 두려운 경외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식을 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할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말씀도 가볍게 인식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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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7. 부활 제2주일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는 '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유지가 힘든 과부들 (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로 번역된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테메리네' (en te diakonia te kathemerine)는 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 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제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의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는 '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 (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 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와 구제 봉사는 직무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요한6,16-21)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9-20)
요한복음 6장 19절의 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에 해당하는 '톤 이에순~ 기노메논' <ton Iesoun~ginomenon ; Jesus ~drawing(approaching)>은 '보고'에 해당하는 '테오루신'(theorousin; they saw) 동사의 목적절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부분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둘 다 현재 분사로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리파툰타'(peropatounta; walking)이고, 또 하나는 '오시는 것을'로 번역된 '기노메논'(ginomenon; drawing)이다.
'페리파툰타'(peripatounta)는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분사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walk around)이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곳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바다, 즉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노메논'(ginomenon)은 '기노마이'(ginomai)의 현재 분사인데, '가까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엥귀스'(enggys; nigh)와 함께 쓰일 때에 '~에 접근하다'는 의미가 된다.
파도가 높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사가 가운데 사도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십이리쯤'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했던 코스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 바로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한편, 요한복음 6장 20절의 '나다'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 진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요한9,26; 6,35.48.51; 8,12.28.58; 13,19; 14,6; 15,1.5; 18,37).
예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또한, 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탈출3,14)에서 온 것인데,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고, 제자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2021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존재기 되는 것
(요한6,15-21)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공관복음- 마태오와 마르코는 기도하러 가셨다고 전한다. 혼자(모노스), ‘하나’라는 뜻과 ‘따로 구별하여’ 라는 뜻도함께 가지고 있다. 산으로 가심-세상과 떨어진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보내신다. 예수님을 세상의 빵을 위한 임금으로 억지로 삼으려 했던 그 세상 사람들과 분리를 위하여, 또한 무엇인가를 가르치실, 교훈하시기 위해서이다.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 큰 바람(아네모 메갈로)- 태풍, 강풍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그 큰 바람 속으로 들려 보내신 것이다. 하늘의 비밀스런 구원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공관복음 모두 제자들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몰랐기 때문이다. 풍랑, 그 저주의 바다를 밟으시는, 곧 저주의 바다 같은 우리 인생의 고난(苦難)을 밟으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알았다면(믿었다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나다(에고 에이미- 나는 있는 나) 하느님의 이름이시다.(탈출3,14)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 곧 ‘너희(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시는 것이다.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어느새(유테오스- 즉시)- 동시(同時)의 개념이다. 가려던 곳- 하느님의 뜻인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곧 구원의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 나라에 즉시(卽時)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다는 의미(意味)다.
*성경은 오늘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새로운 탈출(파스카)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행복과 만족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평화의 당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폭풍(暴風)이라는 것이 사용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인생에 폭풍이 일어날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러한 폭풍을 허락하시는 것일 거야’ 하고 기대와 희망 속에서 받아 들려야지, ‘왜 나에게 이런 폭풍이 이러나는 거야’ 하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祈禱)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힘 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하셨습니다.(루가22,39)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들려주신 말씀이 나의 것(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와 내 안에서 활동하시려면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풍랑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서, 그 저주의 물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 그 길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 할 줄 모르는 저희를 위해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시는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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