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 : 2025. 03. 16(일)
□ 곳 : 매요마을~사치재~새맥이재~복성이재~매봉~치재~치재마을(11.5km-‘낙동’)
□ 낙동산악회
□ 참여 : 모두 19명
□ 날씨 : 구름, 비+진눈깨비+함박눈+싸락눈
□ 길 : 흙길+솔가리
□ 걷는 데 걸린 시간 : 2025. 03. 16(일) 09:20~13:48(4시간 28분, 쉰 시간 포함)
□ 간추린 발자취(글쓴이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 09:20 매요 마을 나섬.
○ 09:29 버드나무 고개[유치, 유치재](460m-‘푯말’)
○ ?? 유치 삼거리(해발 506m)
○ 10:10 사치재 푯말
○ 10:11 생태 통로
○ 10:12 사치재[이실재](해발 498m-‘푯말 1’, 해발 500m-‘푯말 2’)
○ 10:26 간이 헬기장
○ 10:59 새맥이재
○ 11:28~11:52 점심
○ 12:20~12:25 아막성
○ 12:37 시리봉 갈림길
○ 12:47 「성리(흥부 마을)」 갈림길, 고개.
○ 12:58 복성이재(601.4m-‘푯말’)
○ 13:23~13:25 매봉(712.2m-‘푯돌‘), 머묾.
○ 13;26~13:31 「봉화산 산철쭉 군락지 전망대」, 나무 쉼터[정자], 푯돌(봉수 왕국 전북 가야), 머묾.
○ 13:33 치재,
○ 13:48 치재 마을, 버스 있던 곳. 산행 마침.
매요 마을
생태 통로
생태 통로
사람도 동물도 고속도로를 가로지르지 않고 안전하게 대간 길을 이어 걸을 수 있다
사치재
얼레지. 아직 꽃은 피지 않았다
새맥이재
낙동산악회에서 푯말을 제작하여 붙여 놓은 것이다
아막성
아막성
아막성
아막성
보존 상태가 좋다
아막성
꽈배기처럼 꼬였다
복성이재
복성이재
매봉
이곳에서 봉화산은 3.3km 떨어져 있다
봉화산을 볼 수 있다 하여 이곳에 봉화산 푯말을 세운 것 같다
눈발이 날리는 날씨
치재로 다시 오르고 있다
치재에서 치재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 다른 사진은 아래 제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blog.naver.com/angol-jong
□ 줄거리(글쓴이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2025. 3. 16(일) 07:45분쯤 000 역을 떠난 버스는 2시간 25분쯤 뒤 전북 남원시 운봉읍 매요마을에 닿았다.(09:10)
길 나설 채비한 다음 매요마을을 나섰다.(09:20)
길 나선 지 9분쯤 뒤 버드나무재[유치, 유치재](460m-‘푯돌’)에 닿았다.(09:29)
버드나무 고개[유지, 유치재]는 “유치재(460m)는 ‘흐름 고개’ 또는 ‘버드나무 고개’” 라고도 한다.
“여원치와 사치재 사이에 있는 고개로 남원시 운봉읍 매요리와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경계 지점, 농사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알려진 지역,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도 심했던 지역, 동학 농민군의 주요한 거점”《여기까지 푯말에서 간추려 따옴》이었다고 한다.
버드나무 고개[유치, 유치재]에서 ‘생태 통로’를 거치는 등 40분쯤 뒤 두 번째 사치재 푯말이 있는 곳에 닿았다.(10:10)
낮은 고개와 산등성(이)인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역사의 현장을 지난다는 의미를 생각하는 상념에 잠겼다.
전에 사치재는 88고속도로 밑으로 굴다리가 있어, 대간을 걸으려면 굴다리를 거쳐 백두대간 산등성(이)에 올라섰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당시 왕복 2차선이었던 88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넘어 건너기도 했다.
무모하게 ‘무단 횡단’ 했던 곳으로, 이제는 ‘생태 통로’를 만들어 사람과 동물이 무사히 88고속도로를 넘어갈 수 있다.
전에 고속도로를 내면서 백두대간 산등성(이)을 무참히 깎아냈던 것을 늦게나마 복원한 것은 잘한 일이다.
사치재 일원은 약 20년 전쯤 산불이 나서 새까맣게 탔던 곳으로 이제 나무가 조금 자란 것 같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88고속도로 변 「지리산 휴게소」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인데, 이번에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사치재(498m-‘푯말 1’, 500m-‘푯말 2’)는 “사치재(498m)는 모래 언덕 고개라는 뜻으로 이실재라고도 불리며, 풍수설에 따르면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비안낙사(飛雁落沙) 형국”《여기까지 푯말에서 따옴》이라고 한다.
푯말에 써놓은 글자 반 이상이 지워져 알아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사치재 높이를 푯말 하나는 498m, 다른 푯말은 500m 라 써놓아 헷갈린다.
실제 높이에 맞게 바로잡고, 글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제대로 복구했으면 좋겠다.
사치재에서 14분쯤 뒤 간이 헬기장이 있는 턱에 올랐다.(10:26)
간이 헬기장에서 33분쯤 뒤 잘루목인, 새맥이재에 닿았다.(10:59)
새맥이재에는 낙동산악회에서 푯말을 만들어 걸어 두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 퇴색되었고, 약간 비뚜름하게 걸려 있었다.
국화 님이 글자가 잘 보이게 손을 봤다.
국화 님이 요기하자는 것을 “조금 더 가다가 먹자”며 조금 더 걸었다.
새맥이지에서 29분쯤 뒤 작고 밋밋한 봉우리에 올라서서 점심밥을 먹었다.
바람이 불었고, 자리가 썩 좋지는 않았으나 찬밥 더운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속에서 먹을거리를 나눠 먹었다.
먹을거리를 나눠준 대원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점심밥을 치르고 길을 나서(11:52) 28분쯤 뒤 아막성에 닿았다.(12:20)
아막성은 “둘레는 633m 가량,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진 곳, 북쪽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아 정교함이 보이며, 성안에는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 등이 쌓여 있다.”고 한다.《여기까지 푯말에서 간추려 따옴》
그 옛날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농사짓다가 군인으로 징집돼 성을 쌓고,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스러져 갔을 민초들과 역사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5분쯤 머문 뒤 아막성을 나서(12:25) 12분쯤 뒤 ‘시리봉 2.0km’ 푯말이 있는 곳에 닿았다.(12:37)
란선 님은 시리봉에 가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2km나 떨어져 있었고, 왕복 4km라 내가 “그냥 지나치자” 했다.
심민철 대장 님 외 몇 사람은 갔다 온 모양이었다.
발 빠름에 손뼉을 친다.
시리봉 갈림길에서 10분쯤 뒤 「성리(흥부 마을)」 갈림길에 닿았다.(12:47)
1.5km 떨어진 「성리(흥부 마을)」에 가서 마음씨 고운 흥부가 다리를 다친 제비를 간호하고 보살폈던 생가가 있는지 둘러보았으면 좋았겠으나 생각만 하고 지나쳤다.
「성리(흥부 마을)」 갈림길에서 10분쯤 뒤 복성이재(601.4m-‘푯말’)에 닿았다.(12:58)
“복성이재에는 전형적인 명당 터라는 전설이 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곳 일대에서 조정의 양곡 관리를 맡고 있던 변도탄이 천문지리에 밝았는데, 어느 날 천기를 보고 국가에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 후 전란에 대비해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 복성 별빛이 멈춘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지었다 하여 복성이재로 유래되었다.”고 한다.《여기까지 푯말에서 따옴》
천문지리에 밝았다는 관리의 말을 따라 대비는 하지 않고, 오히려 관직을 박탈시켰다니, 안타깝다. 왕을 둘러싼 현명하지 못한 간신배들 농간은 아니었을까?
다른 푯말에는 그에게 상을 내렸다니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복성이재에서 25분쯤 뒤 매봉(712.2m-‘푯돌’)에 닿았다.(13“23)
매봉에는 푯돌과 「전망대」, 길 푯말이 있었다.
여원재에서 0.7km, 봉화산까지는 3.3km이다.
2분쯤 머문 뒤 매봉을 나서(13:25) 1분쯤 뒤 「봉화산 산철쭉 군락지 전망대」, 나무 쉼터[정자], 푯돌이 있는 곳에 닿았다.(13:26)
푯돌에는 ‘봉수 왕국 전북 가야’ 라는 글을 써놓았는데 언뜻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옆에는 ‘봉화산’ 푯말을 세워두었는데, 날씨가 좋은 날, 봄철 산철쭉이 활짝 피었을 때, 봉화산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곳에서 봉화산 산철쭉을 보면서 봉화산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세워둔 것 같았다.
5분쯤 머문 뒤 「봉화산 산철쭉 군락지 전망대」를 나서(13:31) 매봉 쪽으로 계단을 다시 올랐다.
치재 계단에 올라서(13:33) 왼쪽 「치재 마을」으로 내려섰다.
치재에서 15분쯤 뒤 「치재 마을」에 닿아(13:48) 산행을 마쳤다.
날씨 변덕이 심했다.
처음에는 비가 내렸고, 뒤에는 눈이 조금 내렸다.
더 걸었더니 함박눈 형태 눈이 내렸고, 그 뒤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기온이 조금 내려가 비를 맞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맘때 비를 맞기라도 한다면 춥고 괴롭다.
앞장섰던 네오 대장 님과 대원들 수고 많았다.
□ 그밖에
◎ 흘러가는 생각을 잠깐 붙들고...
고향 산과 많이 닮은 나무
시골 우리 집에 작은 갓-’산‘을 이르는 말-이 있었다.
그 갓에는 소나무, 노간주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진달래, 도라지, 춘란 따위가 많았다
이번 구간에 땅에 내려앉은 누런 솔갈비가 정겨웠다.
우리 갓에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에 땔감이 귀했던 시절 밥 짓는 데 썼기에 솔갈비를 보는 느낌이 남 다르다.
솔갈비는 장작보다는 못해도 불땀도 좋았다.
재주 좋은 형뻘 되는 사람들은 솔갈비를 긁어 네모지게 잘 다듬어 지게에 졌다.
모양 있게 다듬을수록 지게에 얹은 모습이나 지게를 진 모습이 몹시 날렵하고 멋있었다.
몸을 움직여도 솔갈비 한 잎 지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보고 ’야무지다‘고 했다.
그렇게 솔갈비를 잘 다듬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야무지고, 똑 부러지게 잘 처리할 것이다.
일터에서도 이런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나는 솔갈비를 긁어모아도 지게에 얹는 솜씨가 없어 늘 엉성했다.
잘 다듬지 못한 풋내기들은 솔갈비를 진 지게가 엉성하고, 잘못하면 이동할 때 더러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내 일 처리 솜씨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고 늘 허술한 것 같아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2. 백두대간이 숨 고르기를 하는 구간
백두대간 전체 구간 가운데 남한에 있는 구간은 거칠고 높고 까다로운 구간이 더러 있다.
설악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남덕유산까지는 제법 높다.
남덕유산~장수 서봉을 지나 육십령으로 크게 낮아졌다가 영취산~백운산으로 높이를 조금 높였다가 이내 높이가 낮아진다.
만복대~고리봉~노고단~반야봉~천왕봉으로 고도를 높이기 전에 한껏 자세를 낮춘다.
백두대간 길이 기복이 적고 높이 자체가 높지 않다.
사람은 거들먹거리고, 우쭐거리고, 남을 업신여기고 제 잘났다고 뻐기기 좋아한다.
남과 겨루고 다투기 좋아한다.
한껏 몸을 낮춘 전북 남원 · 장수군~경남 함양군 사이 낮은 백두대간 길에서 겸허한 자세를 배운다.
◎ 이 구간에 있었던 나무(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것이나, 내가 아는 것만 기록함)
○ 녹나뭇과 갈래 : 비목나무
○ 두릅나뭇과 갈래 : 두릅나무[참두릅, 총목(楤木)]
○ 때죽나뭇과 갈래 : 때죽나무
○ 물푸레나뭇과 갈래 : 쥐똥나무
○ 버드나뭇과 갈래 : 갯버들, 은사시나무
○ 소나뭇과 갈래 : 리기다소나무[미국삼엽송, 아메리카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 옻나뭇과 갈래 : 붉나무
○ 운향과 갈래 : 초피나무[제피나무]
○ 장미과 갈래 : 산딸기나무[산딸기], 산벚나무
○ 진달랫과 갈래 : 산철쭉, 진달래나무, 철쭉[철쭉나무, 척촉(躑躅), 산객(山客)]
○ 참나뭇과 갈래 : 갈[갈나무, 갈잎나무, 도토리나무, 떡갈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참나무]
○ 측백나뭇과 갈래 : 노간주나무, 편백
○ 콩과 갈래 : 싸리(나무)
◎ 이 구간에 있었던 덩굴성 떨기나무
○ 백합과 갈래 : 청미래덩굴
◎ 이 구간에 있었던 풀
○ 고빗과 갈래 : 꿩고비(?)
○ 백합과 갈래 : 비비추, 얼레지[가재무릇]
○ 양치식물 고사릿과 갈래 : 고사리
□ 새 : 멧비둘기인지 매 같은 맹금류 공격을 받고 털이 잔뜩 뽑힌 것으로 봐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첫댓글 사진 후기 잘읽엇습니다. 시간대별로 보니까 색달라서 신기합니다^^
알맹이는 없고, 산만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아막산성을 밟고 내려갈 때였습니다. 힘없는 사람들 끼리 싸우다 죽었을 것인데, 만약 그들에게 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고혼들은 이 산성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라면 어디에선가 몸을 바꿔 새롭게 태어났을까? 참으로 실소를 해야 할 어이없는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점점 사연 있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풍경도 들어오고 이제는 산행을 즐길 줄 아는 산꾼으로 바뀌고 있다고 자평해도 될 것 같습니다.~~ㅋㅋ
고맙습니다.
말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민초들의 원귀가 잠들어 있는 현장.
그들은 고통 없는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큰데,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고 편리한 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걸으면서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음은 걷기가 주는 크나큰 소득입니다.
고맙습니다.
변덕스런 날씨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길 큰형님 산행기는 언제나 어린시절 향수를 불러오네요.
자주 사용하는 "야무지다"는 어원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ㅎ
아막산성을 접할때 느끼는 소회감은 모두가 비슷한가 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퇴보 할진데,
대행이 우리 민족은 세칭 지도자들이라는 자들보다도 일반 시민들이
조금더 깨어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쉽습니다.
언제나 좋은글, 대원들의 소중한 추억들 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산행때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뵙길 바라옵니다.
감사합니다.
자연은 큰 틀에서 일정한 흐름을 따라 움직일 뿐인데, 사람은 작은 변화에도 커다란 변동으로 받아들이고 일희일비하고 때로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에서 바른 길을 읽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할 것인데, 인간이 영원불변한 존재라도 되는 양 바른 길을 외면하는 무리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봄이되 봄과 겨울이 함께하는 요즘입니다.
더디게 오다가 어느 날 성큼 다가오는 봄 충분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걷지 않는 자에게서 내공을 바랄 수 없다는 걸
한길님을 뵈며 차츰 알아갑니다.
땅바닥에 발바닥을 대고 걷는 일로
마일리지를 받으셨다면
아마도 대한항공 퍼스트 클래스로
지구 한바퀴 만큼을 쌓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의 단단한 내공으로
작은 위기에도 무너질 만큼 부실한 후배들을
잘 다독여 같은 길로 인도해 주시니
그지없이 고맙습니다 🥰
고수들이 즐비한 등산계에서 그 맨 꽁지에도 들지 못해 허덕이던 지난 세월이었습니다.
보절것없는 발걸음은 '꽁지 빠진 새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일을 추억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오늘 내 둔한 몸놀림을 기쁜 마음으로 실천해 보려 합니다.
오늘 발걸음이 훗날 추억이 될 터이니...
칭찬이 과해 부끄럽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고생이랄 것도 없으니 아직 젊음(?)을 밑천 삼아 부대껴 봅니다.
멋진 대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웁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