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안과 밖 강연 시리즈: 2017 계승과 변화를 거듭해온 인류 지성사에 대한 성찰 | 맥스웰, 아인슈타인, 그리고 빛의 패러다임 - 이필진 교수
이필진 교수는 “맥스웰(James Clerk Maxwell)로부터 시작된 빛의 이야기를 물리학자 관점에서 되돌아”보면서 그 길은 “빛의 속도가 유한하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통해 “인류가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의문일 우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온 과정이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맥스웰 전자기 이론의 가장 직접적인 후계자”로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 의해 “맥스웰 이론과 뉴턴 역학의 충돌”이 해소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일반 상대론은 현재 진행형”인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양자 역학과 중력 이론의 충돌”에 대해 초끈(superstring) 이론을 비롯한 새로운 지적 도전이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지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우리라고 이야기한다.
열린연단 강연 (패러다임 18강) – 이필진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
이필진 : 빛이라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재미있는 거고 굉장히 신비한 거죠. 그런데 이 빛이 도대체 정체가 뭐고 빛이 가지고 있는 물리학적인 의미가 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게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그 빛에 관한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하고요. 특히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일반 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하고, 그리고 그 일반 상대성 이론 혹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시작된 굉장히 강렬한 빛의 성질이 하나 있는데 이 성질이 100년이 지나서, 1990년 이후로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우주에 대한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해줬는데요, 그래서 그 이야기에 주로 중점을 두고 얘기를 풀어나가볼까 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과학 문명, 특히 20세기의 물리학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아인슈타인 이야기를 하거나 양자역학이나 이런 얘기들을 주로 많이 하는데요. 제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 맥스웰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맥스웰이 없었으면 20세기의 과학의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열린연단 토론 (패러다임 18강) – 이상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덕환(사회) : 굉장히 복잡한 과학 이야기를 일반인들을 위해서 풀어내는 과정에 언어상의 어려움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희들이 사용하는 수학적 엄밀함이 다 깨져버리고, 그냥 황야에 던져지는 것 같은 상황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엄밀하지 않은 자의적 해석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많이 경계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민 : 강연에서 큰 바다 위에 섬들이 떠 있는 것처럼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멀티버스(multiverse, 다중 우주)라는 개념이 저 개인적으로는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물리학 논문에서 논의되는 주제 가운데는 가장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주제인데요. 아까도 살짝 언급하신 것처럼 만약에 서로 다른 섬우주(island universe) 사이에 어떤 교신도 원천적으로 영원히 불가능하다면 설령 멀티버스가 이론적으로 꼭 필요하고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빠지면 안 되는 요소로 판명이 난다고 해도 이건 물리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안 가질 수가 없는데요. 꼭 멀티버스가 아니더라도 물리학이 허용하는 인간 상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강의록 전문 보기
맥스웰, 아인슈타인, 그리고 빛의 패러다임목 차 1. 맥스웰과 아인슈타인 (8월 19일에 포스팅 / 금회에 다시 포스팅) 2. . 빛으로 보는 우주의 시작 (금회 포스팅) 3. 우주 상수의 퍼즐 (차회 포스팅 예정) 4. 초끈 이론과 멀티버스 (차회 포스팅 예정) 5. 에필로그 (차회 포스팅 예정)
1. 맥스웰과 아인슈타인
현대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일 것이다.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기적의 해라고 불리는 1905년에, 네 편의 짧은 논문들을 출간하면서 20세기 과학을 한 순간에 열어버린 인물이다. 흔히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상대성 이론 역시 이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중 두 편의 논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설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상대성 이론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는 특히 빛이라는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현상이 매우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였는데, 오늘은 이를 중심으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볼 생각이다. 한편, 물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듯이, 1905년 네 논문들 중에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연구는 상대성 이론이 아닌 소위 광전효과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 역시 빛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당시까지 주로 파동이라고 생각해오던 빛이 사실은 광자라는 입자가 무수히 많이 모여 만들어지는 현상으로도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당시까지의 물리학으로는 설명이 잘 안되던 광전효과를 깔끔하고 단순하게 설명함으로써, 이때까지만 해도 플랑크 등에 의하여 간접적인 혹은 수학적인 가설로서 제안되던 양자 현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역할을 하였다. 흔히 현대 물리학의 두 축이 상대론과 양자 역학이라고 하니, 이 두 가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의 영향력은, 감히 평가한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에, 반드시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이라고 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인 과학자이다. 그가 만든 것이 그 유명한, 그리고 이공계를 전공한 많은 사람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을, 맥스웰 방정식이다. 맥스웰 방정식은 어떤 형태이건 한번은 풀어보고 지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물리학 그리고 많은 공학 분야의 교육 과정인데, 이는 곧 현대의 과학기술에서 맥스웰 방정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맥스웰 방정식은 흔히 전자기 방정식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전자기는 전기와 자기를 합친 말이다. 자기라고 하면 자석이나 나침반 등으로 고대로부터 비교적 흔히 접해온 현상이고, 이보다 조금 더 나중에 발견된 전기는 번개 혹은 정전기 같은 현상, 그리고 지금은 배터리와 같은 많은 개인 기구의 동력원을 통칭하는 말로서 친숙하다. 19세기 물리학의 가장 큰 발견이라면 이 두 가지 현상이 실은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 이를 1861~1873년 사이에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것이 맥스웰 방정식이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백열전구와 유선전화, 20세기 대중문화를 대변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그리고 소위 3차 및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는 컴퓨터 관련 기술들, 어느 하나 전자기 현상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 없다. 조금 더 근원적으로 보자면 생명 현상 역시 대부분 매우 복잡한 전자기 작용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전자기 현상을 조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 이 맥스웰 방정식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리 법칙들은 맥스웰이 태어난 1831년 전후로 거의 완성되었다. 18세기 말 발견된 쿨롱(Coulomb)의 법칙, 그 이후 1830년대에 출현한 가우스(Gauss)의 법칙, 앙페르(Ampere)의 법칙, 패러데이(Faraday)의 자기유도 등 중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들이다. 이에 반해 맥스웰 방정식이 정립되는 시기는 1860-1870년대로,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발견들과 최소한 30년의 간극의 존재한다. 위의 발견들을 통해서 전기와 자기가 한가지 근원을 가지고 있음은 어느 정도 이해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지 못한 채, 혹은 무엇이 빠졌는지 모르는 채 30여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맥스웰이, 빠져 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새로운 실험을 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앞서간 사람들이 발견하고 정리한 법칙들에 단지 “숟가락” 하나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숟가락”은 가히 현대 과학과 기술 문명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하다. 학창 시절, 전기와 자기에 대하여 배운 기억이 있는 분들은 여기 등장하는 상수 두 가지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전기 유전율과 자기 투과율이라는 녀석들로서, 흔히 그리스 문자로 ε과 μ라고 쓴다. 전자들이 서로 밀쳐내는 척력이 얼마나 크며 못에 감긴 코일에 전류를 흘리면 얼마나 센 전자석이 생기는지를 말해주는, 쿨롱의 법칙과 앙페르의 법칙에 각기 들어가는 상수들이다. 전자와 같이 전하를 가진 물질이 있으면 이들 사이에 척력 혹은 인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는데, 이것이 소위 쿨롱의 법칙이다. 앙페르의 법칙은 전자들이 일정하게 움직여서 전류를 만들면 자석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전자라는 한 가지 물체가 가만히 서 있느냐 혹은 움직이느냐에 따라 두 가지 전혀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는 말인데, 따라서 이 두 상수 역시 무언가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이미 ε과 μ가 비교적 엄밀하게 측정되기 시작하였는데, 1856년에 베버(Wilhelm Weber)와 콜라우시(Rudolf Kohlrausch)라는 두 사람이 희한한 발견을 한다. 이 두 상수를 서로 곱한 후, 1을 이 곱으로 나누어 주면 어떤 속도의 제곱이 나오는데, 이 속도가 대략 초속 30만㎞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점은, 지금이야 초등학생들도 곧바로 알아차릴 테지만, 당시가 빛의 속도가 직접적으로 측정되기 시작하던 시절이어서였는지, 이들은 이 중요한 “우연”을 간과하였다고 한다. 한편, 역시 1830년대에 패러데이는 자석을 흔들면, 즉 자기력에 변화를 주면, 이로 인해 전하를 움직이게 하는 전기력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하는 원래 전기의 힘을 만드는 것인데, 전하를 움직이면 자기력이 생기고, 그 자기력을 흔들었더니 다시 전기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전하와 전류, 그리고 전기와 자기 사이에 이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 여기까지의 이야기인데, 유독 전기력이 흔들리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전기력이 전하에서 나오고(쿨롱의 법칙), 전하가 움직이면서 자기력이 생긴다면(앙페르의 법칙), 전기력이 움직여도 자기력이 생겨야 말이 될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 말을 하고 나면, 이를 수식으로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를 찾아보게 될 것인데, 이 새로운 법칙의 형태가 위의 패러데이의 법칙에서 전기와 자기의 역할을 교환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빠져 있던 항을 하나 추가해서 이를 통해 전기력과 자기력의 서로 물고 물리는 공생 관계를 수학적으로 기술한 것이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이다. 전자기 이론을 완성한 이 발견을 굳이 “숟가락을 얹었다”라고 한 이유는, 첫째, 새로운 실험을 해서 알아낸 발견이 아니며, 두 번째로는 알고 보면 그 이전까지의 법칙들이 이 새로운 항을 추가하지 않으면 실은 수학적으로 서로 모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00% 추론만으로, 이만큼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한 경우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편, 무언가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가 있을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 주기적인 운동인데, 놀이터의 시소를 생각하면 된다. 영희 쪽 시소가 내려가면 철수의 시소는 올라가고, 그 무게를 못 이겨 철수 쪽 시소가 떨어지면 영희 쪽 시소가 올라가고, 둘 중 하나가 지칠 때까지 이를 반복할 수 있다. 전기와 자기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이 두 가지 힘이 서로를 이끌어주는 주기적인 운동의 형태로서의 파동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지는 파동을 전자기파라고 한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을 풀면 이 파동의 속도가 항상 일정하게 나타나는데, 그 값이 다름 아닌
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속도는 당시 측정되기 시작한 빛의 속도와 매우 유사하다. 아! 그러면 혹시 빛 역시 전자기파의 특수한 형태일까? 맥스웰이 이 생각에 다다른 것이 1862년의 일이라고 한다. 빛이 전자기파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는 이 생각,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의 근원인 원자를 만드는 기본적인 힘이 이 전기와 자기에 있다는 다음 세대의 학자들의 발견이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은, 그리고 앞으로도 끼칠 영향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 물리 법칙 자체에 무언가의 속도가 상수로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어떤 물체의 속도가, 물리학적 법칙에 의하여 특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 상공 바람의 속도는 당일 주변 고기압과 저기압 분포로 결정된다. 류현진 투수의 피칭은 그날 몸 상태에 따라 혹은 해당 타자를 처리하는 전술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 한강의 유속은 지난 며칠 강수량에 따라도 달라질 것이고, 구간마다 또 다를 것이다. 즉 물체 혹은 파동의 속도는 대부분 환경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더구나, 속도는 항상 상대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한강변을 따라 움직이는 자전거 족들 속도는 대략 시속 20㎞ 부근이지만, 함께 움직이고 있는 한 떼의 자전거 동호회원들에게 서로의 속도는 시속 0㎞에 가까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물건의 속도가 물리 법칙의 일부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환경적이고, 전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유독 빛의 속도는 전기와 자기의 법칙들을 모아놓은 맥스웰 방정식의 일부로 구현된다. 19세기 말 이론가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 중 가장 큰 것이 여기에 있었다. 맥스웰 방정식에, ε와 μ라는 두 상수로 나뉘어 녹아 들어가 있는 빛의 속도가 도대체 누구의 입장에서 본 속도이며, 왜 굳이 자연 법칙의 일부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19세기 학자들이 가설로 내세운 것이 “에테르”라고 하는 우주 전체에 분포하는, 그리고 공간의 기준이 되는 매질이었다. 소리가 공기의 파동이듯이, 이 에테르라는 매질의 파동이 빛이고, 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매질을 기준으로 잰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라는 관점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생각은, 상대론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마이컬슨 (Albert Michelson)과 몰리(Edward Morley) 두 사람의 실험을 통하여, 그리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머지않아 폐기되었다.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에테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지구를 기준으로 하면 빛의 방향에 따라 그 속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비교적 상식적인 가설을 검증하려는 시도였다. 결과적으로 빛의 방향이 동서남북 어느 쪽이건 간에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검증하게 되었다. 빛의 속도는, 특이하게도 상대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에테르 가설이 옳지 않을 것이라는 매우 직접적인 증거를 준 셈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 결과보다는, 에테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부분 때문에, 그리고 맥스웰 이론의 구조 자체 때문에 특수 상대론을 설파했다고 한다. 에테르가 실제로 있었다면 일어났을 묘한 상황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안드로메다 은하에 가기 위해 은하철도 999에 탑승해보자. 무료한 기차 여행을 위해 노트북과 mp3 플레이어를 하나씩 챙기고 음악을 들으면서 우주 여행을 떠나보자. 에테르 가설의 주장은, 맥스웰 방정식이 유효한 것은 에테르를 기준으로 했을 경우에 그런 것이고, 지구의 속도가 어쩌다 보니 크지 않아서 에테르 입장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기에 지구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차가 안드로메다를 향해 가속을 시작하면, 속도는 점점 커져 빛의 속도에 접근할 것이고, 맥스웰 방정식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할 것이다. 노트북과 mp3의 작동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의 상당 부분이 맥스웰 방정식에 온전히 담겨 있으므로, 이 기계들은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아니라도 전혀 다른 짓을 하게 될 것이다. 기차가 움직이는 쪽과 그 반대쪽으로의 빛의 속도가 서로 다를 것이므로 mp3를 놓는 방향에 따라서도 다른 소리가 날 것임에 분명하다. 노트북 역시 이상한 짓을 할 것이고, 어쩌면 1+1=3이라는 계산을 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는 모순은 아니지만, 과연 이럴까 하는 자연스러운 의구심이 든다. 사실 비행기로 태평양을 건너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비행기가 거의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기는 어렵다. 비행기가 길쭉하게 생겼고, 앞뒤가 분명하니, 앞쪽으로 날아가고 있겠거니 생각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이를 검증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빛의 매질로서의 에테르가 실존한다면, 그리고 내가 탑승한 은하철도 999가 광속에 근접한 혹은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이런 자연스러운 경험과는 많이 다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은 이럴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에테르가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빛의 속도와 맥스웰 방정식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은하철도 999 안에서도 빛은 여전히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초속 30만㎞로 전파된다는 이 주장이 옳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서 시작하여 19세기까지 내려오던 너무나 상식적인 관점을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서로 섞여버리는 상대론적인 세계관으로 대치해야 한다. 상대론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최소한 mp3가 재생하는 음악 소리에 대하여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은하철도 999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서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가는 데 지구 기준으로 최소한 250만 년이나 걸리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들고 탄 mp3는 계속 같은 음악을 재생해줄 것이다.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모두 뒤집어버린, 그래서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대론이지만, 사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물리학자가 마주치고 대답해야 하는 부조리는 훨씬 더 다양하고 이상하다. 위에도 잠깐 언급되었지만, 빛의 속도가 누구에게나 일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 어떤 물체도 빛의 속도 c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 v로 움직이는 질량이 m인 물체가 가지는 특수 상대성 이론 에너지 공식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무리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도 v가 c보다 커질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 물론 위 식에서 물체가 정지해 있는 경우가 그 유명한 E=mc^2가 되겠다. 우주 모험을 꿈꾸는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과학적 사실이 매우 불편한 제약이다. SF 영화에서야 워프드라이브나 웜홀이라고 부르는 편리한 장치를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이고 실제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는, 즉 에너지가 무한대가 아니면서 v=c 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질량 m 역시 0인 경우인데, 이것을 만족하는 대표적인 것이 빛 혹은 광자이다. 이 경우 v=c 가 되면서 위 에너지 식의 분자와 분모가 각각 0이 되는데, 이는 질량이 없는 빛의 경우 에너지가 표현되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담이지만, 빛이 가진 에너지가 어떻게 표현되느냐 하는 문제는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빛 역시 질량이 없는 광자라는 입자들의 모음”이라는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맥스웰 방정식의 출현은 단순히 전자기 현상의 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상식적인 과학의 탄생을 위한 서곡이었기도 한데, 가장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소위 “원격 작용(action at a distance)” 문제이다.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이 득세한 근대의 물리학에서는 별과 별 사이의 중력이 “순간적으로” 전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뉴턴의 만유인력이 그러했다. 예를 들어, 오늘 자정에 달을 폭파해버리면, 250만 광년 떨어져 있는 안드로메다인이 그 순간 중력의 변화를 잘 감지하여 이를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하는 세계관에서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물질적인 세계관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던 19세기 학자들에게, 이미 매우 비상식적인 주장이었는데, 상대론은 이런 “원격 작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중력 역시 빛보다 빨리 전해질 수 없다는 말이 되므로, 뉴턴의 만유인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중력 이론이 필요했다. 그 결과물이 물론 일반 상대성 이론이며, 그 안에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중력의 파동 즉 중력파가 있을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이에 대한 직접적인 검증은 일반 상대론의 발표 시점인 1915년 11월에서부터 거의 정확히 100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는데, 라이고(LIGO)라는 실험팀에 의하여 2015년 9월에 첫 중력파 신호가 관측되었다. 거의 모든 물리학자들이 곧 이에 대한 노벨상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는 주어지지 않았던 노벨상이, 결국 아인슈타인이 옳았다고 검증한 팀에게는 주어지는 조금 묘한 상황이 될 듯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맥스웰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상대론적인 세계관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그 안에서 빛이 차지하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는 질량이 없는 “물질”이 차지하는 특별한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 이미 강조하였듯이 20세기 기술 문명의 어느 하나도 빛을 포함한 전자기 현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여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제한된 시간 내에서 이런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보다는, 이 새로운 세계관에서 시작되어 최근 꽃을 피운 두 가지의 서로 연관된 순수 과학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2. 빛으로 보는 우주의 시작
요즘 도시의 밤하늘은 빛 공해로 인하여 은하수는 고사하고, 북두칠성 보는 것도 어렵지만, 청정 고산 지역에 올라가 보면 하늘은 무수히 많은 별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물론 아무리 많은 별이 있다 한들 낮과 같이 밝지는 못하다. 그런데 1823년에 올버스(Wilhelm Olbers)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놀라운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왜 밤하늘은 어둡지?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동설을 믿는 과학자라면 지구가 특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양계 역시 특별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은하 역시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될 텐데, 그렇다면 우주에 있는 은하의 분포 역시 위치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일정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우주의 크기가 무한히 크다면, 밤하늘은 무한히 밝아야만 한다. 멀리 있는 별에서 지구에 다다르는 빛의 양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한편, 같은 거리에 있는 별의 수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따라서 1000광년~1001광년 거리에서 오는 빛의 총량과 1000만 광년~1000만 1광년 거리에서 오는 빛의 총량은 대략 동일하게 된다. 우주의 크기가 무한히 크다면 이런 빛을 거리별로 다 더한 것이 지구에 다다르는 빛인데, 모든 거리에서 동일한 양의 빛이 도달하므로, 그 총량은 무한히 많을 것이다. 그렇게 지구에 도달하는 빛의 양이 무한히 많으므로 밤이건 낮이건 지구 표면은 항상 무한히 높은 온도로 달구어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과연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이 올버스의 놀라운 질문이었다.
생각해볼 수 있는 해답을 몇 가지 꼽아보자. 예를 들어 우리 은하를 기준으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은하들의 밀도가 떨어지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 혹은 우주의 크기가 사실은 무한히 크지 않아서 해결될 수도 있다. 전자는 코페르니쿠스가 불편해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과학적인 확인이 쉽지 않은 해답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올버스의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은 의외로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다는 것이었다. 빛은 항상 그 누가 보더라도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따라서 멀리 있는 별을 보러 가기는 어려우나, 멀리서 공짜로 날아오고 있는 빛은 앉아서 보는 것이 가능하니, 그 별의 비교적 최근의 모습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제약이 따르는데, 별에서 오는 빛이 그 별의 거리에 따라 다른 과거에 생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하늘에 보이는 별은 약 30분 전의 목성일 수도 있지만, 약 250만 년 이전의 안드로메다 은하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멀리 있는 “별”은, 그 정체가 완벽히 밝혀지지 않은 소위 퀘이사(Quasar)들과,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초신성들인데, 일부는 그 거리가 100억 광년이나 되어 실제로 이들은 관측한다는 것은 사실 100억 년 전의 이 천체들의 모습을 보는 셈이다. 우주의 거대한 공간에서는, 이렇게, 멀리 보는 것이 단순히 멀리 보는 게 아니라, 옛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빛의 속도가 의미하는 이 단순해 보이는 사실이 올버스의 의문을 푸는 열쇠이다. 올버스의 질문은 지구에 다다르는 빛의 총량에 대한 문제인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광원 중 그 어느 것도, 지금 우주 나이라고 회자되는 137억 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러면, 오늘밤 지구 표면에 다다를 수 있는 빛은 137억 광년 너머에서는 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140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천체에서 오는 빛은 곧 140억 년 전의 그 천체에서 생성되었어야 오늘밤 우리가 볼 수 있는데, 그때는 그 천체가 생기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1조 광년의 거리에 아무리 많은 은하가 있어도, 이들이 1조 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은하들이 방출한 빛은 아직 지구에 다다를 수 없으며 따라서 지구에서 보는 밤하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유한한 우주의 나이가 절대적인 빛의 속도를 만나면, 올버스의 질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답이 이렇게 쉽게 나온다.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가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기 때문이라는 말인데, 위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100년 전 맥스웰과 아인슈타인의 매우 이론적인 주장, 밤하늘이 어둡다는 고대로부터의 상식,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다는 20세기 우주론의 결론, 이런 전혀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이렇게 단순하게 관련되어 있다니 말이다. 이렇게 빛의 속도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무엇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고생물학이라는 학문을 생각해보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 즉 공룡이나 다른 멸종된 생물에 대하여 질문하고 유추하는 학문일 텐데, 이런 학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남겨진 자취들이다. 공룡 화석을 발굴해서 그 뼈대에 어떤 근육과 어떤 표피가 얹혀져 있었을지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들을 모아 설득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생기는 혼란이, 예를 들어 공룡이 조류에 가까운 것인지, 파충류에 가까운 것인지에 대한 과거의 논란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화석을 발굴하는 대신 살아 움직이는 공룡을 촬영할 수 있다면, 고생물학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이 자명하다. 물론 타임머신(time machine)을 만들기 전에는 꿈과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론이 제한적인 타임머신을 허용한다고 할 수 있는데, 절대적이고 유한한 빛의 속도 덕분이다. 위에 말했듯이 멀리 보는 것이 곧 과거를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공룡을 촬영하려는 그 고생물학자가 지구로부터 5000만 광년 떨어져 있는 어떤 행성에 살고 있다면 말이다. 그 학자의 문명이, 이를 위해 충분히 좋은 망원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전제하에, 5000만 년 전 지구의 모습을 지금 촬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우주 탐험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제약인 빛의 속도가,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에게는 오히려 과거를 들여다 보게 해주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해보자. 만일, 위에 언급한 것처럼, 우주가 무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면, 최근의 우주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137억 년을 조금 상회하는 “나이”를 가지고 있다면, 137억 광년 거리에서 오는 빛을 들여다봄으로써 우주의 시작을 관측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불과 지난 30여 년 사이에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빛을 전파하는 매질로서의, 그리고 빛의 속도가 정의되는 기준으로서의 에테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앞서 하였다. 그런데 실제 우리 우주에는, 이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어디에나 있는 우주 배경 복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 비유를 하자면 한겨울 아이들의 교실을 데워주는 구식 조개탄 난로를 생각해보자. 이것이 낯선 젊은 세대라면 라디에이터나 난방용으로 쓰고 있는 시스템 에어컨을 생각해도 좋다.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훈훈한 열기를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난로에서 발생한 적외선 광자들이 곳곳에 퍼지고 반사되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난로에 손을 댈 필요 없이, 교실 전체에 퍼져 있는 적외선 복사파의 온기를 느낀다는 말이다. 우주의 텅 빈 공간에도 역시 이와 비슷하게 전자기 복사파가 가득 채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복사파는 우주의 탄생, 즉 흔히 빅뱅이라고 부르는 당시의 열기가 차츰 식어 남은 잔재라고 하며, 통칭하여 우주 배경 복사라고 부른다. 이 열기의 온도는, 절대온도의 단위로 하면 대략 3캘빈, 섭씨로는 영하 270도 정도에 해당한다. 물론 열기라는 말이 무색한 저온이지만, 주변에 있는 별들에서 나오는 매우 뜨거운 열기와 아무런 상관없는, 온전히 우주의 탄생과 연관되는 온도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편, 우주와 교실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우리의 우주가 대부분 텅 비어 있다는 점이다. 교실 안의 적외선은 벽과 학생들의 몸에 반사되고, 흡수되고, 다시 방출되기를 반복하지만, 우주의 빛은 아주 낮은 밀도로 분포하고 있는 별이나 먼지 구름을 만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무조건 직진한다. 우주는 거의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전자파 망원경에 측정되는 우주 배경 복사는 대부분 우주의 나이 동안 이렇게 직진해온 녀석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137억 광년 멀리에서 온 137억 년 전 우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타임머신인 것이다.
사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천문학을 바라보는 물리학자들의 시선에는 항상 일말의 의구심이 있었는데, 이는 관측 결과를 정량적으로 100% 믿기 힘든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허블 상수인데, 현재 우주의 팽창 속도를 말해주는 숫자이다. 우주가 일정하게 팽창한다는 것은 공간 자체가 팽창하는 것이라 은하와 은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며, 또한 멀어지는 “속도”는 둘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게 되는데, 이렇게 두 은하 사이의 거리와 상대적으로 멀어지는 속도 사이의 비례상수가 허블 상수이다. 천체가 멀어져가는 속도는 그 천체가 발산하는 빛의 구성을 관측함으로써 비교적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데 반하여, 해당하는 별까지의 실제 거리를 정확히 아는 것은 지구에 발이 묶여 있는 천문학자들의 입장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허블이 처음 “측정”한 1930년대의 값과 현재 학자들 사이에 받아들여지는 값 사이에 약 10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어려움을 여실히 말해준다. 이에 반해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측정을 비롯한 지난 30년 사이의 우주에 대한 여러 관측들과 이를 통한 새로운 이해들은 이러한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데, 이렇듯 우주론이라는 학문이 지난 30년 사이에 엄청난 변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1980년대 말 COBE를 기점으로, 2000년대 초에 전개된 WMAP, 그리고 2010년대 들어서 활동을 시작한 PLANCK라는 세 가지의 관측 위성으로 대표되지만, 그 이외에도 Boomerang이라거나 BICEP과 같은 남극에서 하는 일련의 실험, 그리고 조금 더 천문학적인 Type Ⅰ 초신성 관측 등, 지난 30년 사이에 봇물을 이루며 수많은 데이터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30년간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한 학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자 생물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DNA 발견, 분자생물학의 출현, 인간의 게놈 지도 완성, 그리고 클론의 출현 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분야이다. 그에 비해 일반적으로는 덜 알려져 있지만, 어쩌면 인류가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의문일 우주에 대한 궁금증들이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해결되기 시작된 것도 역시 지난 30년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절대적인 빛의 속도가 타임머신의 역할을 해주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팅 예정: 다음 회에 계속)
3. 우주 상수의 퍼즐
4. 초끈 이론과 멀티버스
5.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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