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쥐가 시골 생활이 어려워서 도시로 상경했습니다. 시골 쥐가 도착한 첫날 밤, 예상치 않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한밤 중에 도시 뒷골목을 서성이는 고양이를 만난 겁니다. 고양이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시골 쥐를 발견하고는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골 쥐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서, 쓰레기통 뒤에 있는 작은 구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숨을 죽인 채 고양이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야말로 쥐 죽은 듯 기다린 겁니다. 잠시 후 고양이가 있던 곳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쥐는, “고양이가 떠났구나”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양이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분명, 개 짖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처럼 각박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소한 2개 국어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해”라고 했습니다. 각박한 삶 속에서 원치 않는 어려움에 닥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또,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은 “여호와의 전”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일단 성막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위치는, 언제나 하나님 안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많이 가져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행복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 어디에 있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성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참된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생명의 자리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하나님과 관계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고 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함을 말함으로,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는, 값비싼 보배를 찾기가 어렵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매우 힘들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렇게 어두웠던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 엘리의 영적 무능함에 그 1차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겁니다.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이 선포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선포하는 말씀이 없다는 것이 마지막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암 8: 11에서, 이스라엘에 임할 기근은, 양식이 없어서나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캄캄한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통한 희망의 등불을 바라보며 나가는 그때, 비로소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 찬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으로, 혼란과 어둠의 시기가 지나고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새 역사가 시작함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우리도 세상이 들려주는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록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성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뚫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 55: 3을 보시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합니다. 사무엘 시대나 이사야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습니다. 왜?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각기 자신의 의지에 따른 소리만을 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시 42: 1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적 갈급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한 갈증 속에 있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영혼의 생수가 되시는 주를 찾고 또 찾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시대가 타락했다는 증거요, 불행 그 자체입니다. 홍수가 나면 보이는 게 물이고, 넘치는 게 물이지만, 정작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수는 구하기 어렵니다. 그래서 물이 넘치는 홍수 속에서 오히려 물이 부족한 기갈을 생깁니다. 이와 같이, 현대인들은 넘쳐나는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생명의 말씀이 부족한 말씀의 기갈 가운데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외치지만,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한 인본주의 사고와 세속주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 무분별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수와 같은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홍수 속에서 깨끗한 물을 찾기가 어렵듯, 많은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분별하고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믿음의 열정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절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야 합니다.
본문의 엘리 제사장은 100세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령의 엘리가 눈이 어두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신 34: 7을 보시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모세는 120세의 나이였으나 눈이 흐리지 않았지만, 엘리는 육신의 시력과 함께 영적인 감각도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전 안에서 침묵하며 누워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침묵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 62: 1을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며, 침묵 가운데서 그분을 바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즘, 밤이 되면, 성내천 주변에서 풀벌레 소리, 쓰르레미, 매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들리듯, 하나님의 음성은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어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합니다. 현대를 일컬어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앨빈 토플러”가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지식이 눈코 뜰 새 없이 쏟아지는 제 3의 기술 혁명으로 정보 교류가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을 예언한 뒤로, 현대를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곧,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조금만 관심을 멀리하면 순식간에 뒤쳐지고 밀려나는 시대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와 신지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관심을 기울이며, 매스미디어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서야 합니다. 세상 정보, 세상 지식을 뒤로 하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는, 저 하늘을 향해 귀를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어야 합니다. 마치, 한 밤중에 천문학자들이 저 우주를 향해 천체 망원경의 문을 열 듯, 우리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가까이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무엘은 성소에서 잠을 잤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전”은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성막”을 말합니다. 사무엘은 이 장막의 성소에서 등불을 관리하며 잠을 잤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하나님의 전에 누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것을 가까이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집중하고,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세 번이나 부르셨지만,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속에서 분주히 살아가는 우리는 어찌해야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 거대한 일까지, 계획하는 일에서 실행하는 일까지, 실패와 성공, 소망의 일 모두를 하나님께 묵상으로 또는 소리내어 기도함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삶은 마음을 흩트리고 혼란하게 하는 일이 많기에,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주변 환경과 사람으로 인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굉장한 사건 속에 임하실 것 같지만 그것은 인간의 편견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이벤트 가운데 임하실 것 같지만, 그것은 인간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세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세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 - 10절을 보시면,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9절은 사무엘이 또다시 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아이 사무엘을 부르시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엘리는 사무엘에게,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이에 사무엘에게 다시 가서 누웠다가 또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합니다. 이에 사무엘이 자기 처소로 돌아가 누웠습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나 집요하고 간절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무엘은 비록 어리지만,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심으로, 친히 그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어린 사무엘은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을 보시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구약성경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용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재고 따지고 조건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자라면 자고, 먹으라면 먹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왜 사용하셨습니까? 사 6: 8에서, 하나님이 누가 우리를 위해 갈 수 있나 물었을 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기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인생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향해 나아가면 반드시 어둠을 뚫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고 어두울지라도 하나님 성소의 등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성소를 향해 나가기만 하면, 응답과 승리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름과 말씀을 들을 당시는, 국가적으로 암혹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고 이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그 암울한 시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무엘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귀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계시도 없는 시대라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대적 환경이 아니라, 과연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 있느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고, 마음과 귀가 열려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들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실 겁니다. 여러분! 사무엘은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된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그래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하는 열망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축복의 삶, 형통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