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온 거위
강 문 석
하천을 따라 길게 뻗은 자전거도로에서 뒤뚱거리는 새하얀 거위 한 마리를 만났다. 이미 서산으로 해가 기울어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는 시각. 금정산과 오봉산에서 한 글자씩 따와 이름을 붙인 금오대교 교각이 버티고 선 자리였다. 3년 전 홍수 때 교각 둘레가 심하게 패여 1년 넘게 복구공사를 마친 교각 주변은 자갈밭이었다. 그 옆엔 잔디와 강아지풀이 무성한 초원도 있지만 거위는 자갈밭에 드문드문 난 풀만 싹둑싹둑 잘라 삼키고 있었다.
어느 집에서 가출한 거위일까. 하지만 주변엔 아무리 둘러봐도 인가가 없다. 전철역과 컨테이너화물 하치장 그리고 대교 끝엔 국과수국립과학수사본부와 대학병원이 있을 뿐이다. 비둘기나 까치라면 지나던 행인이 배낭을 뒤지기라도 하면 혹시 먹이를 주려나 싶어 주위를 맴도는데 거위는 오로지 풀 뜯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동영상을 찍는 행인이 다가가도 오로지 먹는 일에만 전념하는 거위는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때 “야 인마, 니 또 왔네!”하고 거위에게 아는 체를 하는 중년사내가 나타났다. 길을 가던 사내가 반색을 하며 말을 건넸지만 거위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여전히 먹는데만 집중했다. 머쓱해하는 사내에게 내가 “서로 아는 사인가 봐요?” 했더니 “예, 여기 이 자리서 자주 봅니더.”라고 했다. 몇 마디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는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거위는 나도 빨리 사라지길 바랄 것 같아 그 옆에서 사진 찍는 것도 퍽 조심스러웠다.
하천 수면에서 오르려면 2미터 넘는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는데 거위는 어떻게 이곳에 자주 나타난다는 것일까. 하천엔 수달도 출몰한다는데 밤을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이튿날은 가랑비가 내리는데도 그 시각에 맞춰 현장을 찾았고 또 그 다음날에도…. 하지만 거위는 보이지 않고 하천 수면 위를 왜가리 한 마리만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거위가 풀을 뜯던 자갈밭엔 살진 두꺼비 한 마리가 버티고 앉아 눈을 껌벅였다.
옛사람들이 개리를 잡아다 집에서 길러 식용으로 개량한 거위는 최초의 조류 품종개량으로 꼽힌다. 오리보다 월등히 몸집이 크지만 오리와는 부리 모양으로 구분한다. 오리 부리는 넓적하고 매끄러운데 비해 거위는 부리에 혹이 나있다. 수명이 무려 40~50년이나 되는 거위는 면역력이 강해 조류 인플루엔자 빼고는 웬만해선 질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런 연유로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일찍부터 식용으로 거위를 많이 길렀다.
거위는 헤엄은 치지만 오리보다 몸집이 큰 탓에 날지는 못한다. 어릴 때 잠시 나는 시늉을 하다가 급하면 몸을 물에 띄운다. 하지만 그건 긴 점프이지 비행으로 볼 수는 없다. 성장해서 몸이 커지면 더욱 날 수 없게 되는 거위. 곡물을 먹기 때문에 초식동물로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벌레도 많이 잡아먹고 개구리 같은 작은 양서류도 잡아먹으며 풀도 많이 뜯어 먹고 소화를 돕기 위해서는 작은 돌들도 집어삼키는 그야말로 잡식성이다.
통도사 서운암에 장경각이 막 들어섰을 무렵, 장경각을 둘러보고 암자를 향해 산을 내려서다가 잘 만들어진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 아래 위치한 암자 야생화단지에 쓸 물을 가둘 목적으로 만든 것 같았고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아 연못 주변은 황토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카메라를 든 채 연못 제방을 들어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예닐곱 마리 거위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꽥꽥 소릴 질러대면서 주둥이로 연신 사람을 공격해왔다.
거위는 주인을 잘 따르지만 배타성이 강해 밤에 자다가도 낯선 사람이 오는 기척을 느끼면 깨어나 소릴 지르거나 날개를 활짝 펴고 다가가 위협을 가한다. 그래서 과거 유럽 등지에선 번견 대용으로 거위를 길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을 지키는 동물로 거위를 길렀던 것이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에서는 신전에서 키우던 거위들이 갈리아인의 침입을 울음소리로 알려서 기습에 대처할 수 있었다는 기록까지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집을 지키는 용도로 거위를 키웠는데 특히 개성지방에서 많이 키웠다고 한다. 지능이 높고 경계심이 강해 웬만한 개 못지않게 집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꺼우 꺼우 하는 큰 울음소리로 상대를 경계하는데 마치 “움직이면 쏜다!”라고 위협하는 것 같다. 거위 울음은 시골에 가면 자주 들을 수 있는데 조류가 다 그러하듯 아침이 되면 닭처럼 운다. 그 울음소리가 안 일어나고는 못 배길 정도의 비상경고음 수준인 것이다.
실제로 집 지키는 거위와 마주치면 상당히 무섭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리기 딱 좋은 포스를 자랑한다. 게다가 소리로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가까이 접근하면 먼저 다가가 공격하는데 당하면 무지하게 고통스럽다. 어지간한 덩치의 네발짐승들도 성질이 더러운 거위와 같이 살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다. 집에서 키우는 가금류 중에서 성질 더러운 것으론 거위를 알아준다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는다.
검독수리 같은 맹금류들에겐 잡아먹히겠지만 포스와 공격성은 맹금류 그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부리로 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위협을 주지는 못한다. 부리가 뾰족하지 않아 아프지만 개에 물리는 것처럼 상처가 나게 다칠 일은 없다.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심리적으로 겁을 먹게 만들어 쫓아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집 지키는 용도로 키우는 것이다.
새끼 때는 귀엽기 때문에 거위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경우도 있다. 반려조로 키우면 주인을 알아보며 목줄을 매달면 동행 산책도 가능한데 지나가는 모든 것에 시비를 걸기 때문에 한적한 시골길이 아니라면 함께 걷기는 힘들다. 카이스트 교내 연못에 거위와 오리를 함께 키우는데 평소 같이 다니고 잘 때도 같이 무리를 이룬다. 교내에 너구리도 자주 출몰하고 고양이도 살고 있어서 거위가 오리를 지키는 호위무사역을 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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