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삶 이야기 / 홍속렬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매우불행한 일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것에 대한 반발로 니힐리즘에 깊이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청년시절 군대상활을 하면서 제도에 묶여 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니힐리스트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난생활이 끝나고 초등학교에 입학 했습니다.
교회에서 세운 학교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찬스가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 줬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25시를 읽었으니까요. 당시 책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그 어려운 중에도 책을 구해 많이 읽었습니다. 당시엔 학원이란 학생 잡지가 있었는데 참 좋은 읽을 꺼리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꿈을 가질 수 있게 해 줬으니 까요. 그때 읽었던 책들이 내 독서에 불을 부처 타 오르기 시작해서 오늘날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청년시절 1주 1권의 책을 읽는다는 목표를 세워 꾸준히 시행 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 독서량은 대단합니다. 군대에서 만난 목사님(지금은 소천 하셨지만) 흥규 형님이 체계적인 독서 지도를 해 주셨습니다.
책 속엔 꿈도 희망도 눈으로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다 들어 있어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고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피난 나가 산 위에 올라 나무를 하고 있는데 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신작로 길로 머리가(대가리) 나온 버스가 신작로 길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여 덜 살 소년이 가질 희망 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 버스가 실어다 내 맘속에 심어줬습니다. 현 상황은 도저히 그러한 꿈과 희망을 가질 조금의 여유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저 버스를 타고 미지의 세계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나라에 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안 되겠다 결심 했습니다.
남과는 달랐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얼토당토 않는 꿈이었지요.
남들은 유행가를 불러대고 놀이도 어른 흉내를 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이 좋았고 다음 그 곡을 들으면 곡명과 멜로디를 기억 해 냈습니다. 평생 이 나이가 되도록 담배를 피워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매우 엄격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중학교만 졸업을 하고 18세에 자원입대 소년병으로 군대에 입대 했습니다.
그리고 30년 군대에서 성장을 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통신 고등학교를 3년 동안 다녔고 밤마다 방송을 들으며 공부를 했습니다. 롯시니의 시그널 음악은 심장에 박혀 꿈에서도 가슴에 울려옵니다. 3년 동안 들으며 공부를 했기에 롯니시의 시그널 음악은 내 영혼 깊은 곳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졸업하고 상무 축구감독 시절 대학에 입학해 체육학을 전공 했습니다. 그래 체육에 대한 자격증이 5개나 됩니다. 40이 넘어 대학을 다녔습니다. 전공인 체육학은 내가 가르치고 있는 축구에 밑바탕이 돼 줘 잘 가르치는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집념의 소유자 정신력이 강한 리더이기에 내 밑의 선수들을 잘 조련해 무명 선수를 국가 대표 선수로 만들어 냈습니다. 잠재돼 있는 능력을 끄집어 내 집대성화 시키므로 인해 그 능력이 꽃을 피우며 만발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 인물이 김병지 입니다. 그 친구는 날 만나지 못 했다면 그냥 공장의 기계공으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겠지요. 또 한 사람 현재 유럽에서 한 창 이름을 날리며 대한민국 아니 한 민족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이도 내 눈에 띠여 오늘의 훌륭한 아들을 키워 낼 수 있었던 겁니다.
기량이 뛰어나 국가 대표가 되어 기량을 인정받은 선수보다는 가능성이 있어 장차 큰 선수가 될 수 있는 재목들을 찾아 국가 대표로 만들어 내는 나의 비전이 통 했던 겁니다. 그렇게 키워 대표 선수로 만들어 낸 선수들이 여자 선수를 비 롯 50여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시방 그들은 각계각층 축구계에서 유능한 지도자로 축구발전에 기여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날 믿고 내 뜻과 비전을 아는 군대의 지휘관들이 인정해 주고 응원 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적어도 군대에서는 인정받은 모범 군인이었습니다. 하사관으로 대 육군 감독과 상무 축구 감독의 직무를 수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피난민 수용소 원주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대 했습니다.
조그만 고무공을 따라 뛰고 달리는 놀이가 여간 재미가 있는 겁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춥고 배고픔도 다 잊을 수 있는 좋은 놀이었습니다.
뛰고 달리다 보면 한 팀 친구들이 더 다정하고 가족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휴전이 되고 고향 철원으로 고향을 찾아들어갔습니다. 전쟁의 잔혹한 상처가 깊이 남아있는 고향 철원 수복 지구. 학교도 병원도 없고 오직 남아있는 건 산과들에 너부 러 저 있는 불발 탄 들과 썩어진 사람들의 뼈 그리고 찬란한 태양이었습니다.
그때도 태양은 유월의 태양은 여전히 밝고 아름답고 힘이 찼습니다.
철모르는 나에겐 태양이 매우 아름다웠고 희망을 안겨주는 힘이었습니다.
절망의 늪에 깊이 빠져 피난살이를 했던 열 살 소년 에게는 태양이 가져다주는 세계가 다 내 것이었습니다.
그 절망의 땅에서 희망으로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그리고 찬란한 오늘이 있는 것은 끊임없는 꿈을 꿔 대고 비전을 갖고 책을 읽고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해서 자신을 달련하는 힘? 다시 말해 쉬지 않는 열정 삶에 대한 열정 때문 일겁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엘살바도르에서 방학기간을 이용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 하려는 노력으로 시간을 할애 두 주 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땟국 자국이 역력한 얼굴 대 해진 운동화 그리고 빛나는 운동자 . . . 나는 이 아이들을 볼 때마다 6,25가 막 끝나 절망가운데 있던 내가 조그마한 고무공을 좇아 뛰어 다니며 꿈을 키워, 대 육군대표 축구감독이 됐고 오늘날 먼 나라 지구 반대편 중미 땅에 복음과 축구공을 들고 복음을 전하며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축구선교사로의 삶을 살게 해준 동기 조그마한 공, 희망을 찾아 이들에게 비전과 꿈을 심어주는 일을 하게 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이일을 맡겨주신 하나님 앞에 충성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새벽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오늘의 분량만큼 받을 은혜와 또한 내가 수행할 일 축구 가르치는 일에 하나님 동행 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 하는 오늘입니다.
첫댓글 많을 일을 하시며 축구로 선교를 하시고 계시니 대단하십니다.
작품은 일단 자유 계시판으로 옮기겠습니다. 앞으로 자유 계시판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 이론, 수필이론 등 회원들이 창작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올리는 게시판입니다.
자유게시판에는 시, 수필등 카페 회원들이 자유자재로 드나들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이 공유할 수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속렬 선생님...
참 귀하고 대단한 사역을 하시고 계시네요!
주님이 기뻐 하시겠습니다.
이곳 문학 카페를 찾아 주셔서 감사드리고 귀한 글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다작입니다
쓸만한것이 없어 그렇지
한편의 작품을 집중해 쓰면 성취감과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잊을 수 있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