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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시인에서 국민시인이 되신 신경림선생님
서홍관
(시인. 국립암센터 원장)
5월 22일 오전 7시 50분경 신경림선생님이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나는 국립암센터에 막 출근한 상태였다. 서둘러 병실로 찾아갔을 때는 의료진이 막 사망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8시 17분이었다. 손자 최헌군이 할아버지 팔을 잡고 울고 있고, 아들과 며느리가 흐느끼고 있었다.
선생님의 손을 잡아보았다. 아직도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가만가만 선생님 손을 만지면서 작별의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저의 문학적 은사이셨지만, 인생의 선배로 친구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참지 못하고 뜨거운 무언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서 신경림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을까? 서울의대 본과 2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의 비극(당시는 광주사태라고 했다)을 겪으면서 마음에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다. 석 달이 넘는 긴 휴교령 기간에 일기장에 나의 좌절과 격정을 쓰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시가 씌여졌다. 그런데 시에 관심을 가지고 시집을 사볼수록 난해한 시들이 너무 많았다. 너무도 답답하여 의대 문예부에 가입했다. 문예부는 해마다 ‘문학의 밤’ 행사를 하는데, 우리가 쓴 시를 각자 낭송한 뒤 초청시인을 모시고 강평을 듣는 방식이었다. 초청받은 신경림시인은 ‘서홍관군은 기성 시인 못지 않게 시를 잘 쓴다’고 칭찬해주시고, 뒷풀이 자리에서 집으로 놀러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1981년 가을 정릉 댁으로 찾아 뵌 것이 43년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의대 졸업 당시 나의 27편 시묶음을 읽어보시더니 갑자기 ‘홍관이도 이제 등단하지’ 하셔서 나는 깜짝 놀랐다. 시인으로 등단해보겠다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창비로 시를 투고해보라고 권해주셔서, 1985년 창비를 통해 등단하게 되었으니, 신경림선생님은 의사로 살려던 생각밖에 없던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주신 셈이다.
선생님은 1935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투기성이 강한 광산 사업을 하셨고 삶의 파란과 기복이 심했다. 선생님은 노은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충주사범병설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해 6월 한국전쟁이 터졌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전쟁 중에 고향 친구들과 양담배 장사를 하기도 했고, 미군 장교의 심부름을 하며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충주고등학교 시절에는 교사였던 유촌선생님으로부터 시를 잘 쓴다는 격려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였고, 공산당선언을 영문으로 읽기도 하는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독서모임인 수요회에 들어갔다. 1956년 스물한 살에 [문학예술]을 통해 <갈대> 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갈대] 중에서 -
당시 우리나라는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청계천 판잣집, 술집, 창녀와 주정뱅이들, 거지들과 상이군인들이 뒤섞여 있였고,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렸다.
서울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기도 하셨지만, 수요회 회원 하나가 조봉암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1957년 낙향했는데 고향도 삭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사업이 실패했고, 남의 빚보증까지 잘못 서서 빈털터리 신세였다. 선생님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고 못할 것이 없다는 심정이었지만, 그 무슨 일도 쉽사리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더구나 다시는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갈대]와 같은 서정시를 쓴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친구들 신세도 지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우연찮게 장사꾼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시골을 돌며 약초나 그밖의 약제를 수거해다가 한약방에 파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의 길 안내를 맡아 충북과 강원도 일대를 상당 기간 돌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멈춰 결국 두집말이라는 언덕마을의 주막에 숙소를 정하고 며칠을 쉬게 되었다. 그때 탄생한 시가 [눈길]이라는 아름다운 시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 [눈길] 중에서 -
이 떠돌이 생활에서 만난 민초들의 삶은 시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실망과 절망과 실의와 체념이 아닌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난했지만 그들은 오로지 역사의 피해자요 체제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시인이 받은 충격은 컸다. 차츰 정신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십년의 방황이야말로 시집 농무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1965년 30세 고향에서 떠돌다 우연히 만난 시인 김관식의 호의로 서울로 올라와 홍은동 무허가촌에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
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서 산다
---- 중략 ----
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오히려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과 더불어 산다
-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중에서 -
1970년부터 7년간 이번에는 안양 산동네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신경림부부, 자녀들, 동생들까지 4대가 모여 살았는데,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웠지만, 생계를 꾸릴 대책이 없던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그 집에서 34세의 젊은 아내가 위암 말기가 되어 세상을 떴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에 이어, 중풍에 걸린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주변에서는 줄초상이 나는 집을 흉가라고 쉬쉬하기도 했다. 50년이 지나도 이때의 주소를 잊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라는 시를 쓰신 것을 보면.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 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절뚝절뚝 산동네 아래 구멍가게까지 걸어내려가
주머니에 사 넣는 한갑 담배를 미워하면서,
-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중에서 -
선생님은 1973년 38세에 시집 [농무(農舞)]를 월간문학사에서 자비로 출간하고, 1975년에는 창비에서 [농무] 증보판을 출간하였다. 이 시집으로 선생님은 문단에 혜성처럼 재등장하신 셈이다. 당시 문학판은 외국의 문예사조를 하루라도 빨리 따라가면 앞서가는 사람으로 대접받던 시대였고, 실존주의와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게 난해하게 써야 폼나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의 시는 기존의 시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소용돌이에서 소외된 시골 민중의 숨소리와 땀냄새를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전해주었다. 문단과 독자들은 새로운 목소리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 [겨울밤] 중에서 -
선생님은 안양에서 1977년 미아리를 거쳐, 다음해 정릉으로 이사를 간다. 내가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갔던 곳이 바로 정릉이었고, 어머님과 자녀들과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단독주택에 살고 계셨다.
70년대 중엽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선생님에게 즐거움이 있었다면 오직, 뜻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었다. 당시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려 술판을 벌이던 친구들이 이호철, 한남규, 염무웅, 구중서, 조태일, 황석영 등이었다.
1979년 박정희가 죽고, 5공화국이 들어서고 공포정치가 뒤덮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1980년 7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다. 이문구선생님 회고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인 몇이 신선생님 노모를 위로하러 댁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막상 어머니를 마주하니 위로를 드릴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신경림선생이 체구는 작아도 단단한 데가 있어서 잘 견딜 겁니다.” 그랬단다. 그랬더니 어머님이 대뜸 “갸가 겁이 얼매나 많은디요. 아, 전등이 나가도 의자에 올라가 전등 하나를 못 가는 얘요.” 그래서 본전도 못 찾고 돌아왔다고 한다. 겁도 많으신 선생님이 고문과 구타가 난무하던 그곳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80년대 엄혹한 시절에는 당국이 여권도 발급 안해 주어 외국 문학단체에서 초청해도 외국에 나가지도 못하셨고, 아예 담당형사가 댁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매일 형사의 방문을 받는 민주화 운동의 거물이 되셨을까? 선생님의 (겸손한!) 설명에 의하면, 당시에 문단이나 재야에서 김지하를 석방하라든지, 시국관련 성명서 발표가 있으면 언제나 명망이 높은 고은, 신경림, 백낙청이 주동했다고 보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선생님은 기실 온건파인데도 과격분자로 분류돼서 요시찰 인물이 됐다는 것이다. 담당형사도 매일 찾아오다 보면 친해지기도 했다. 한번은 조상들 산소를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동향 보고를 해야 하는 형사가 못 미더워서 그랬는지 자기가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형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마을로 가서 선영 산소를 한바퀴 돌았더니 그뒤 고향 마을에 신경림이 출세해서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나타났더라는 소문이 돌았단다.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민요와 민담에 주목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장시 새재를 쓰기 위해 약 4년 동안 소백산맥과 접해있는 여러 고을, 새재 부근 남한강 상류 등을 여러 차례 돌아다니시면서 그 고장의 지리와 풍속을 익히고, 민담과 민요를 모으셨다. 80년대에도 장시 남한강을 쓰기 위해, 몇 해 동안 남한강 일대를 돌아다니셨다. 선생님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발로 국토를 떠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셨고, 떠돌이, 장돌뱅이로 사셨다.
이런 노력을 통해 민요의 가락은 시의 운율로 살아났고 이때 만난 사람들은 시의 주인공으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1984년에는 본격적으로 민요연구회를 결성하여 혼자만의 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으로 변모시키기도 하셨다. 민요 부흥운동은 옛 민요가 불리지않게 된 이후 민중 사이에서 생겨난 대중가요까지 받아들이면서, 외세와 자본에 의해 왜곡된 우리 문화와 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문인들 모임에 가면 우리는 신경림선생님 농담때문에 다들 깔깔대고 웃어야 했고, 나는 속으로 저런 빛나는 유머를 누가 적어두면 그대로 책이 될텐데 아까워 하면서 웃고 나면 다 까먹곤 했다.
순수할 것 같은 문단도 알고 보면 시기와 질투도 있고 명예와 권력욕도 있고 파벌들도 있었던 것 같다. 1998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고 물러나신 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이사장을 하고 싶어 나선 문인이 있었는데, 그 분은 안 된다고 비토하는 그룹이 있어 서로 간에 갈등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도저히 해법이 없으니 누가 신경림선생님을 다시 추대하자고 하니 아무도 반대를 안 해서, 다시 이사장이 되셨다. 그때 만났더니 "아, 폐품 재활용하자는 거야"하면서 웃으셨다. 선생님은 회장이니 이사장이니 많은 감투를 쓰셨지만, 그것으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잇속을 차리거나, 자리를 욕심내지 않으시니 문단이건 어디건 신경림선생님을 욕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는 80년대 엄혹한 시절부터 선생님의 주옥같은 시가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를 바라면서 혼자 어떤 시가 좋을까 꼽아보곤 했다. 농무, 목계장터, 파장, 시골 큰집, 겨울밤 등등 너무나 많았다. 당시는 나의 상상력의 한계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금은 선생님 시가 온갖 국어교과서에 가득하고 수능시험에도 자주 등장한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암기식 국어 교육을 비판하면서 내가 쓴 시가 수능에 출제됐는데 나도 답을 모르겠더라고 일침을 놓는 글을 쓰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나를 의사로 믿으셨기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나에게 물으셨다. 어머님이 건강이 악화되어서 돌아가실 때도 내가 근무하던 병원으로 모셨다. 그러던 중인데 2017년 선생님 몸에서 대장암이 발견되어서 국립암센터로 오셨는데 아뿔싸, 폐에 전이가 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수술을 꿋꿋하게 받고 회복하셨다. 그 당시 틈날 때마다 병실에 들르면 재미있었던 옛날 일들 얘기하시면서 편안한 표정으로 웃곤 하셨다. 아무리 힘들던 시절을 얘기해도 선생님은 언제나 재미있게 말씀하셔서 우리는 자주 웃었다. 하루는 병문안하고 나오는데 따님이 따라 나오면서 "바쁘시겠지만 가끔 와주세요. 선생님 오실 때만 웃으시거든요." 하였다.
선생님은 폐에 전이된 암 덩어리를 없애기 위해 항암치료, 방사선치료까지 다 받으셔야 했는데 초인적 의지로 이겨내셨고 결국 건강을 회복하셨다. 퇴원해서도 지난 7년간 매일 5천보씩 걸으셔서 나도 깜짝 놀랐다. 치료받으시던 중 내가 국립암센터의 원장이 되자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지난 가을에도 댁 근처에서 식사를 사시겠다고 후배들 여럿을 부르셨다. 그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선생님을 따르는 여성 문인들은 오빠부대처럼 선생님을 에워싸고 사진을 찍어댔고 선생님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하셨고, 우리는 그게 재밌어서 더 웃었다.
7년이나 되어 암이 완치된 줄 알았는데, 5월초에 암이 폐에 재발된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치료를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7년 뒤에 재발하는 암은 지독한 놈이어서 웬만한 항암치료에도 듣지 않게 된다. 어느새 연세도 89세가 되셨고, 이제 완치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지 자꾸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지만, 가족들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태여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셨다. 사랑하는 손자 헌이와 손녀 가윤이를 보고 싶어하셔서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찾아 뵙고 기쁘게 해드렸다. 선생님은 평생동안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셔서 병문안을 못 오게 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알리지도 못하게 하셨다.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몇 분은 못 뵈어도 좋으니 병원 밑에라도 왔다가고 싶다고 오셨다. 그 말씀을 들으시더니, 왔으면 얼굴은 봐야지 하고 특별히 허락하셨다. 서로 얼굴을 보고 손을 잡았다. 수십년간 동지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말이 필요없는 분들이었다. 염무웅, 안종관, 현기영선생님이셨다.
5월 22일 아침 8시 17분 가족이 다들 모인 가운데 선생님은 편안하게 세상을 뜨셨다. 문인들은 이미 돌아가실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박경리선생님 전례에 따라 [대한민국 문인장]을 지내겠다고 준비를 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이었고, 5월 24일 금요일 저녁 추모제 행사를 했고, 5월 25일 발인을 했다. 고향 충주시 노은면의 모교인 노은초등학교에 서 있는 [농무] 시비를 들렀다. 충주 시장이 인사말을 하면서 시비를 세울 당시에 선생님이 반대하시는데 막무가내로 세웠다는 건립 비화를 들려주었다. 그랬을 것이다. 선생님은 의당 그러실 분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페이스북에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들이 수백개가 올라왔다. 나도 선생님과 각별하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의 편안한 미소와 따스한 격려를 받은 각별한 사람들은 나말고도 넘쳐났던 것이다.
1983년 내가 의대를 졸업하고, 군산 앞바다 선유도에서 군 복무 대신 무의촌 의사로 일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선생님은 당시 마당이라는 잡지에 매달 민요기행을 연재하고 계셨다. 이번에는 서해바다 도서지역을 답사하기로 하고, 선유도까지 오셨다. 선유도 백사장을 같이 걷는 모습이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마흔여덟 살 선생님의 편안한 미소가 빛나고, 그 앞에 스물다섯 살 젊은 내가 웃고 있는 사진이다.
그 자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선생님과 함께 걷던 그 길을 홀로 걸으면서 선생님을 추모하고 싶다. 그러나 울지 않고, 따뜻하게 웃으면서 걸으리라. 겨울 햇살이 환하게 빛나던 그날처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