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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사랑이다.
마가복음 14:10~16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아이러니컬(irenical)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가룟 유다의 배신입니다.
가룟은 그의 출신지를 뜻합니다. 본래의 뜻은 ‘그리욧 사람’입니다. 그리욧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삼사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유다가 나옵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구분해서 가룟 유다라고 부릅니다. 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마리아를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나 베다니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가룟 유다는 가룟 시몬의 아들이며 예수님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셨을 때 무척 신중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우셨으니’ 라는 단어는 ‘appoint’ 를 사용했고, 헬라어에서는 ‘포이에오 ποιέω’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의 의미에는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열둘이라는 한정된 숫자의 제자를 세울 때는 분명한 계획과 더불어 선하신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의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은, 그가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면서 제자를 세우신 것이 실수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가룟 유다를 예수님께서 제자로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신뢰하는 의미로 제자들의 재정을 맡도록 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지난 삼년 동안 예수님과 늘 함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병마가 물러나고, 귀신들도 떨며 내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도 보았고, 여러 명의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잇따라 시험했지만,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지 못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막 14: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 익명의 여인이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며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주께 드렸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어치의 향유를 한 번에 깨뜨려 예수님께 드리기는 쉽지 않은 결단적 행동입니다. 한번 붓고 나면 없어질 기름을 부어버린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보다 더 큰 낭비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 어떤 사람은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라고 꾸짖듯이 불평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 12:5)고 말한 사람이 가룟 유다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인과 가룟 유다는 같은 장소에 있었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의 것을 모두 바쳐 주님께 드렸지만, 그는 탐욕에 사로잡혀 오히려 예수를 팔아 이득을 챙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를 처형하는 일에 한몫을 담당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주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갔고, 계신 곳에 그도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주님을 배반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던 열두 명의 제자 중 그것도 신임과 인정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주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왜 가룟 유다는 주님 곁에 있으면서 주님을 배반했을까요? 가룟 유다가 배반했다면 나는 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고 뒤로 돌아설 가능성은 짙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행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건에서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신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변함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드리면서 결론으론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며칠 전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이를 지켜보았던 그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했다고 말하면서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이 밀접하게 결부되었다는 생각과 더불어 두려움이 밀물처럼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길을 곰곰이 찾던 중 대제사장들 편에 서서, 그들에게 협력하여 예수님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람이 담겨 있지 않음을 여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또한, 그가 예수님을 넘겨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고 배반하는 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막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맡았고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이 돈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백성들이 헌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돈으로 모든 섬김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본능적으로 사랑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의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이ㅇ에 대하여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의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철학에 몰두하여 세상의 보이는 것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기간 말씀을 듣고 배워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내 안에 담기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에게 그분의 사랑을 두루 비치시며 알게 하셨습니다.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것을 내 양심에서 알게 하셨고, 모든 환경과 사건에서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일부러 밀어 버리려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만과 겸손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분임을 인정하는 순간 진리의 영 성령께서 내게 복음을 맏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전해지면 사랑이 담긴 사람은 성령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선재적 은총>이라고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선재적 은총’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말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선재적 은총이요, 이에 대하여 내 의지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 때 비로소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매는 어떻게 맺혀지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드디어 유월절 날이 이르렀지만, 유월절 음식을 나눌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소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막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음식은 예루살렘 성내에서만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집 밖에서는 먹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먹어야 했습니다. 유월절이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 중에,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들 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막 14: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쉬운 말 성경에서는 ‘ 물동이를 들고 걸어오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새번역성경에서는 ‘물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당시의 여자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녔습니다. 이로 살펴보건대 이 사람은 남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보통 남자는 가죽 부대에 물을 넣어서 다녔기 때문입니다.
막 14: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여기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선생님이란 칭호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당신이 유일하게 선생님으로 여기는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분명 그 집 주인도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가 아니라 “선생님의 말씀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도 드러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집주인에게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엿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원문을 보면, 선생님이란 칭호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당신이 유일하게 선생님으로 여기는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분명 그 집 주인도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집 주인에게 바라신 것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실 객실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순례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기꺼이 자기들의 객실을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을 하나님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一擧手一投足)알고 계시고 그의 순종을 기쁘시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내 안에 품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적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외적으로는 천사를 보내셔서 철저하게 보호하여 주셔서 구원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으로 멈추게 할 수 없고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믿어 보십시오! 때로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거짓의 영 사탄이 숨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을 돌이켜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럴 때 성령께서 내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주시고 그로 인하여 내 믿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을 때 믿음이 생기고 순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