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곡 탐방기
현재 임곡동에는 1,314가구,2.11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초등학생 숫자를 보니 교직원 30명에 전교 학생수는 35명 이다.인구감소가 심각한 느낌이다.임곡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9월에 설립되었다. 작년이 창립 100주년인 셈이다.임곡중학교는 해방 다음해인 1946년6월에 설립되었는데,교직원 10명에 전교생이 30명 이다.중학교와 같은 자리에 광일고등학교가 1983년 3월에 설립되었는데,교원수 23명에 전교생 147명 이다. 도시로의 인구 집중화와 출생율 감소가 지방발전에도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가수가 광일고 졸업생 이다. 아우디 국내 총판을 하는 위본모터스 그룹의 '기 세도' 회장이 임곡초/중 졸업생이고, 대우건설 '정 원주' 회장이 광일고 졸업생이다. 이들 두 기업인이 동창회장을 맡아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지만, 임곡 출신 졸업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해 보인다.
임곡은 1970년대 2만 명 인구가 현재 2천명대로 감소하였고, 임곡초등학교의 1300명이 넘던 학생이 이제는 수십명대로 감소했다.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유적지를 가지고 있지만 수십년동안 그린벨트로 묶여있어 개발되지 못한 결과다. 임곡초등학교 명예회장과 대한노인회 광주회장을 맡고 있는 오병채 회장은, 100주년 축사를 하면서 “92년 동안 임곡을 떠나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으로 낙후된 지역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계기로 미래 100년을 위해 도약하는 임곡 발전의 청사진이 필요하다. 임곡의 87%가 그린벨트 지역이다. 미래를 위한 도시계획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스마트팜 특구를 만들어 도시형 농업중심지로 발전시키고, 광주의 부족한 산업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산단개발도 필요하다. 자연을 활용한 스포츠 특화지구로 개발하고, 파크골프장과 같은 생활체육시설도 늘리면 새로운 인구도 많이 늘어날 것이다. 임곡의 새로운 100년을 응원한다..
임곡동 전경▲
임곡국민학교 100주년 기념사진(2023)▲
오병채 대한노인회 광주지회장▲
임곡중/광일고 풍경↓
학교 얘기가 나온 김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에 대해서도 좀 살펴보겠다. 조선시대 때는 요즈음 초등학교/중학교에 갈 나이에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 소학,명심보감 등 기초 학문을 배웠다 .
각 고을마다 국립 지방대와 같은 '향교'를 두었고 ,사립대 격인 '서원'이 있었다.향교와 서원에서 우수한 학생은 한양에 있는 국립대학인 성균관 유생이 되었는데 그 숫자는 200명으로 제한했고, 기숙사와 생필품을 지원받고
대과시험 준비도 지원을 받았다.성균관 유생이 되면 조선시대에는 출세가 보장되는 셈이었다.
서원은 전국에 650개소기 있었는데,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문을 닫고 47개소만 살아남았다.이 중 하나가 현재 장성에 있는 하서 김 인후의 '필암서원'이다 .또 임곡에는 고봉 기 대승의 '월봉서원'이 있다.김 인후와 기 대승 두 분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또 당시에는 담양의 정 철, 광주의 고 경명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학자였고,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 정 약용과 해남의 고산 윤 선도 등도 호남을 빛낸 인물들이었다.
서당풍경↓
월봉서원↓
1578년(선조 11)에 김계휘(金繼輝)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러다가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인 너브실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윤상원 열사 생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공간이다. 그는 들불야학을 열어 가난한 청년들과 노동자들에게 배움을 나누던 스승이자, 최후까지 도청에 남아 계엄군과 싸우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산화한 광주의 대표적 민주열사다. 생가 내부는 자료전시관으로 사용 중인데, 윤상원 열사뿐 아니라 그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던 박기순 열사의 고귀한 삶과 정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1970년대 후반 들불야학에서 만나 인연을 쌓았던 이들은 민주항쟁과 불의의 사고로 인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가족과 친지들이 영혼결혼식을 올리게 됐고, 이때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헌정됐다고 한다. 노래뿐 아니라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던 윤상원 열사의 말은 지금도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터뷰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윤상원의 생가▼
'해파'는 고 윤상원의 호▲
<임곡 천주교 성당>
<임곡동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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