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람스 교향곡 제1번 4악장, 맨 밑에는 보너스로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브람스의 고향 함부르크
[ 고독한 완벽주의자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
요하네스 브람스는 교향곡을 4곡밖에 안 남겼지만 베토벤 이후 최고의 교향곡 작곡자로 일컬어집니다. 브람스의 교향곡 가운데서도 제1번은 유명한 지휘자 한스 뷜로가 베토벤의 '제9번'에 이어 '제10교향곡'이라 부른 걸작입니다.
팀파니가 연타하는 독주, 베토벤 '제9번'의 환희의 동기를 연상시키는 제4악장의 주제...,전체적으로 작곡가의 고향인 北獨의 침침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안개처럼 가라앉은 곡입니다. 악상이 너무 풍부하여 변화가 무쌍하므로 베토벤 풍의 형식에만 익은 사람에게는 거북한 감을 주지만 조금만 길게 들어보면 인생을 깊이 맛본 사람에게 주는 커다란 위안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곡은 마른 오징어처럼 자꾸 씹어야 제맛이 안다고들 합니다.
* 함부르크에 있는 브람스 기념 조각상
브람스가 교향곡 제1번을 착상한 것은 22세 때인 1855년 고향인 함부르크에서였습니다. 그 후 이 곡에 다시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873년 무렵입니다. 이때부터 이 곡의 악상을 들고 다닌 장소는 여러 곳이 됩니다.
1873년 부람스는 뮌헨 아래쪽에 있는 슈타른버거 湖畔의 마을 투친에 머물며 이 곡을 진전시켰습니다. 1874년에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가까운 취리히 湖 기슭의 뤼슐리콘에서 언덕 위의 한 집을 빌려 여름을 보내면서도 이 곡에 손을 댔습니다.
1875년 5월에는 하이델베르크 부근 네커 강변의 小村인 치겔하우젠에서,1876년 여름에는 발트 海의 섬 뤼겐 島의 사스니츠에서 각각 이 곡의 완성을 서둘렀습니다. 사스니츠에서 함부르크로 돌아온 브람스는 다시 이 해의 9월과 10월을 바덴바덴의 교외인 리히텐탈에서 지내며 마침내 이 곡을 끝냈습니다. 실로 21년이라는 오랜 吟味의 소산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브람스가 그의 첫 교향곡에 얼마나 신중을 기했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의 땅인 리히텐탈을 찾아갑니다. 바덴바덴하면 우리나라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의 결정이 내련진 곳으로 잘 알려진 도시지만 본시부터 독일에서 손꼽는 온천장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드나들던 카지노도 유명한 곳이죠.
* 리히덴탈
기차에서 내리면 역전의 버스 정류장에서 리히텐탈 쪽으로 가는 버스가 떠납니다. 리히텐탈은 바덴바덴 교외라지만 지금은 시가지가 연결되어 바덴바덴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버스를 브람스 플라츠(광장)라는 네거리에서 내립니다. 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조그만 광장이 나오고 그 이름이 클라라 슈만 플라츠입니다. 클라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 슈만의 아내 이름이죠. 나란히 두 광장의 이름만으로도 리히텐탈에서의 브람스와 클라라의 親交를 알 만합니다.
클라라 슈만 광장에 서면 브람스가 살던 집이 바로 길 건너에 보입니다. 막시밀리안슈트라세 85번지. 높직한 암벽 위에 외따로 선 하얀 집입니다. 나무에 가려 길에서는 건물이 지붕 쪽만 보입니다.
건물까지는 브람스가 딛던 나무 사이 돌계단으로 한참 올라가야 합니다. 이 건물 맨 위층의 좁다란 다락방 3개가 브람스 기념실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 벽에 푸른 벽걸이가 걸려 있었다고 하여 '푸른 방'이라 불리던 작업실이 교향곡 제1번의 終譜를 쓴 방입니다.
* 브람스 기념실
나무 마룻바닥 등 방 모습은 당시대로지만 진열된 것은 브람스와 슈만 부처의 사진들,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 정도입니다. 너무 외진 탓인지 다른 기념관들과는 달리 찾아오는 사람이 뜸하여, 大曲의 비밀을 감춘 밀실에 들어선 듯 마음이 설레입니다.
브람스가 제1교향곡을 만진 여러 집들, 투칭 마을이나 뤼슐리콘,치켈하우젠,사스니츠 등에 머물 때의 집들은 모두 없어지거나 달라져 버려, 이집은 제1교향곡을 쓴 곳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산실일 뿐 아니라 브람스가 독일 내에 살던 집으로서도 단 하나 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방은 너무 작아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지만 창문을 열면 바깥은 딴 세상입니다. 시야에는 푸른 숲과 숲 사이 언덕의 하얀 집들이 눈부신 색깔로 가득 들어옵니다. 브람스가 악상을 그리며 거닐던 숲이요 길입니다. 브람스는 생전에 이 창 밖 경치를 "비길 데 없다"고 자랑하곤 했다고 합니다.
* 리히덴탈의 브람스 집
브람스는 30세 때인 1863년 여름 이미 휴양지로 이름 높던 이곳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그 풍광에 매력을 느낀 브람스는 1865년 5월 언덕 위의 이 외딴집 다락방을 세내어 1874년까지 10년 간 여름이면 거의 빠짐없이 찾아와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완성한 작품 중에는 교향곡 제1번 말고도 유면한 <독일 진혼곡>과 교향곡 제2번이 있습니다.
제2번은 오스트리아의 뵈르터 湖畔의 마을 푀르차흐에서 주로 쓴 것이지만, 브람스의 <田園>이라 불릴 정도로 제1번과 대조적인 이곡의 목가적인 분위기는 리히텐탈의 아름다운 풍경이 작용한 것입니다.
브람스와 클라라의 우정은 음악사에 유명합니다. 젊은 브람스를 장래가 있는 음악가로 세상에 처음 소개한 것은 클라라의 남편 슈만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이던 클라라는 남편을 잃은 후 연주 여행을 다녔고 여름 휴가 때만이라도 조용한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1862년 바덴바덴에 집을 구했습니다. 브람스가 뒤따라 여기 온 것은 클라라의 조언에 의해서였습니다.
리히텐탈의 하우프트슈트라세 8번지. 브람스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클라라가 1862년에 사 들어와 1873년까지 머물던 집이 있고 문에는 기념판이 걸려있습니다. 클라라 때문에 단층 집이던 것이 3층 건물이 되는 등 집 모양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브람스는 교향곡 제1번을 완성하던 해 가을 이 집을 찾아와 클라라에게 이 곡의 2개의 악장을 피아노로 들려 주었습니다. 2주일 후 다시 와서는 전곡을 쳤습니다. 大尾의 종지부를 이렇게 클라라와 함께 끝낸 것입니다.
브람스가 태어난 북독일의 함부르크 항은 독일 어느 항구들 보다도 밤의 환락가가 요란하기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부둣가를 거닐면 13세 때부터 가계를 돕기 위해 항구의 술집, 댄스 홀에서 선원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다니던 어린 브람스가 아른거립니다. 소년 시절의 이런 생활과 태양의 혜택을 받지 못한 기후 풍토, 北獨人들의 개성 등이 무겁고 깊은 브람스의 음악을 길러 냈습니다.
* 함부르크의 브람스 생가(오른쪽)
고향 함부르크는 브람스의 생가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위대한 음악가의 출생지임을 자랑할 것이 없게 되자 따로 기념관을 하나 차렸습니다. 생가에서 약 1km 덜어진 페터슈트라세 39번지.브람스의 생가와 겉모습이 비슷하다 하여 이 집을 택하고 <독일 진혼곡>,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육필 악보 등을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브람스는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했지만 생활의 기반은 양친이 사는 함부르크였고, 1862년 29세 때 비엔나로 나가 정주하고 나서도 자주 고향 땅을 찾아왔습니다.
브람스는 비엔나에서 3곳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현재 비엔나에서는 하이든가세에 있는 하이든 기념관의 방 하나가 브람스 기념실로 할애되어 있을 뿐입니다.
* 비엔나의 하이든 기념관 옆방의 브람스 기념관의 초상화
오스트리아의 푀르차흐는 브람스가 제2교향곡의 대부분을 쓴 곳입니다. 이 곡에는 브람스가 여기 머물 때의 즐거운 생활이 반영되어 있고 어떤 음악가는 이 곡을 듣고 "푀르차흐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라고가지 말했습니다.
푀르차흐는 뵈르터 湖의 北岸에 위치한 휴양지입니다. 여름 한 철 많은 피서객이 모여듭니다. 브람스가 1877년 여름 여기 와서 묵던 집은 지금 슐로스 레온슈타인 호텔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고풍스러운 건물입니다. 호텔의 식당이 고급이고 그 식당이 있는 안뜰에 브람스의 흉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브람스가 발병을 한 것은 바트 이슐에 머물 때였습니다. 바트 이슐은 오스트리아의 경치 좋은 湖沼 지대인 잘츠캄머구트의 작은 마을입니다. 여기도 온천장이라 예부터 많은 보양객들이 모여 들었고 지금도 거리에는 사람들로 득실댑니다. 브람스는 죽기 전 해인 1896년 이 집에서 클라라 슈만의 訃音을 들었습니다. 그 충격 이후로 병색이 완연해져 이 마을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가 비엔나로 돌아갔습니다.
* 브람스가 마지막을 보냈던 잘츠캄머쿠트의 바트 이슐 마을
비엔나에서 브람스가 1871년부터 26년 동안 살다가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집은 지금 그 자리가 공과 대학의 일부가 되어있습니다. 운명하던 날 새벽 병석의 브람스는 아무 부축도 없이 혼자 일어나더니 의사가 주는 백포도주 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천천히 비우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참 맛있다"고 말했습니다. 음악적으로 승리한 일생의 마지막 自祝杯였습니다.
브람스의 訃報가 전해지자 고향 함부르크에서는 정박중인 배들이 모두 弔旗를 달았습니다. 이 萬國船들의 조의는 곧 세계인들의 경의였습니다.
브람스의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진 곳은 비엔나의 그가 죽은 집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카를 교회입니다. 교회 앞은 분수대가 있는 넓은 광장이고 광장 한쪽 끝, 러셀 공원이라 불리는 녹지대의 나무 그늘에 브람스의 호화로운 기념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 카를 교회
브람스는 비엔나 중앙 묘지의 樂聖들 묘역에 묻혔습니다. 무덤은 바덴바덴에서 처음 만나 생시에 절친하게 지냈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옆입니다. 두 젊은이가 하프를 들고 비탄하는 조각의 묘비는 1903년 브람스의 70회 생일 때 제막된 것입니다.
* 브람스 기념상
[ 교향곡 제1번 C단조 ]
감미로운 분위기! 명징하고도 로맨틱한 선율!
참으로 고독하게 살았던 북독일 출신의 브람스, 그는 독일 음악사에 흔히 3B(바흐,베토벤,브람스)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집니다. 그가 서양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대단하지요.
브람스는 낭만주의가 한창 꽃피우던 시절에 활약했지만 고전주의 음악의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탄탄한 구성과 묵직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그의 교향곡 4곡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 젊은 시절의 브람스
그는 성격이 내성적인데다가 극도로 신중해서 교향곡 작곡도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이는 그가 참으로 존경해 마지않던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을 너무나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브람스가 40세가 넘어서야 교향곡 작곡에 착수한 것은 자신의 기량이 점더 원숙해진 다음이라야 하겠다는 그의 결심에 의한 것이지요. 아마도 등뒤에서 베토벤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브람스는 22세때 그의 고향 함브르크에서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을 듣고 깊은 감동을 하고 교향곡에 착수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21년 후인 43세가 돼서야 제1번 교향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 브람스 묘지
이 곡의 연주를 들은 명지휘자 한스 폰 뵐로는 “우리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제10번 교향곡을 얻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말은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에 이어 <제10번>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또한 브람스를 베토벤의 대를 이을 만한 대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브람스는 브람스였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대체로 영웅적이고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반면에 브람스는 중후한 울림과 안개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사색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브람스는 70년 전의 베토벤의 음악에서 벗어나 새로운 낭만주의를 표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곡의 전 악장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4악장이야말로 최고의 압권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윽한 선율과 민요풍으로 흘러가면서 승리의 찬가를 뿜어내는 부분은 참으로 대가의 작품임을 증명하고 있지요.
그윽한 호른의 선율이 지극히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4악장은 이 곡의 절정을 이룰 뿐만 아니라 베토벤 이후 관현악의 최고봉을 이룬 악장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