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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高麗人, 그 슬픈 旅程의 終着地
-연해주 기행 후기-
筆花 黃晋燮(수필가, 시인, 번역가)
조국을 떠나온 사람들
19세기에 들어서 조선조는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패가 세도 정치의 그늘아래 극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함경도는 경지가 좁은데다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로 주민들의 생계는 더욱 핍박 하였다. 굶주린 서민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두만강을 건너갔다. 물길이 좁고 얕아 겨울에 얼면 건너기가 수월했고, 여름에는 뗏목을 띄워 건너갈 수도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진 넓은 땅은 제정러시아의 원동, 연해주(러시아어:프리모프스키/한반도의 약1.6배)였다.
연해주는 원래 19세기 중엽까지 청나라 봉금령(封禁令)으로 무인지경이었고,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소수의 만주족과 토착 유목민인 타즈족, 오로치족이 드문드문 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하여 러시아 령이 된 땅이다.
초목이 욱어졌으나 땅이 기름져 경지로 개간하기만 하면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어 기근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백성을 짓누르던 봉건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보장되는 신천지였다. 그들은 물길을 찾아 강가에 땅을 차지하고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원년은 1863년이 정설로 되어있다.
함경도 국경지방의 조선인 13가구가 도강하여 은밀히 지신허강 유역에 정착하였든 것이다. 이 주장을 처음 내놓은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정치평론가인 B.I 바긴이다.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해조신문(海朝新聞)은 창간사에서 1863년 이주 설을 뒷받침 했고, 최근 국내의 소장 학자들이 이를 인용하면서 정설이 되었다.
1869년, 조선의 관북과 관서지방에 큰 홍수와 강한 서리가 겹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었다. 이른바 기사(己巳)흉년이었다. 함경도 육진지방의 농민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다. 밤사이 한 마을 전체가 이주하여 빈 마을이 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조선 정부는 불법월경을 묵인하는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월경자를 추방하자 조선 병사들은 이들을 잡아 무더기로 처형해, 한동안 두만강 변에는 시체가 즐비했다는 것이다. 월경자가 잡히면 시장 거리에서 공개효수를 하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목숨을 건 백성들의 월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연해주 군무지사 푸루겔름제독은 갖 도착한 이주민 640여 가구가 체재하고 있는 지신허(현, 비노그라드노예)에 가서 이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돌아갈 수 없다며 단호하게 귀국을 거부하였다.
푸루겔름 제독은 결국 이들에게 연해주 체재를 허락하여, 3.500명가량의 조선인이 토지를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척하게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당국은 이주민들에게 식량지원과 조세감면 혜택을 베풀었다. 1869~72년 사이에 수이푼(秋豊)강변에 정착한 7개 조선인 마을에는 군 비축양식 570톤이 지급되었고, 20년간의 인두세(人頭稅)와 3년간의 토지세가 면제되었다. 이 소문이 조선으로 전해지자 이주민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1863년 지신허를 시발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주민 마을은 해가 갈수록 연해주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적응과 극복의 인고(忍苦)
이주민들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카우리(kauli)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러시아 탐험가 N.M푸르제발스키가 1869년 지신허를 방문하고 남긴 기행문)
카우리란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라는 뜻이다.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지칭 한 것이다. 생지옥 같은 고국 땅, 「조선」이라는 이름을 결코 붙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기근으로 죽음에 이르는 지경이 되어도 진휼(賑恤)하거나 보듬어 주는 조정이 없었던 「조선」이었다. 남의 땅에 왔다가 추방당해 다시 월강하여 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릴 뿐인 나라, 그 나라 이름을 자기 조국이라 부르고 싶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조국에서 밀려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월강한 ‘고려인’과 ‘조선족’
을 ‘버려진 사람들(棄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옛날 만주와 연해주에서 호기를 떨쳤던 고구려를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고구려 사람”또는 “고려사람(高麗人)”으로 칭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본다면 고려인들은 처음부터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연해주 땅, 허허벌판 황무지를 바라보면서,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내고 옥토로 개척한 고려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초기에 토지 점유와 조세감면을 허락하고 군대의 비축 양식까지 공급해 주는 등, 러시아 당국의 고마운 호의(好意)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못한 조선 조정과 대비되기도 한다.
1884년 경흥 개시(開市)조약으로 금강(禁江)이 해제됨에 따라 비로소 왕래가 자유로워졌다. 농사뿐만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모여드는 노동자도 늘어 나갔다.
탄광, 부두건설현장, 철도공사장, 벌목장, 어로, 미역체취 등 일터는 다양했다.
고려인들의 임금은 높지 않았다. 아마도 기아와 빈곤을 벗어나려는 헝그리 정신으로 버티고 극복하였을 것이다.
고려인 이주민은 계속 증가하여 1882년 연해주의 인구는 러시아인(8.385명) 보다 고려인(10.137명)이 더 많았다. 1904년 연해주의 고려인촌은 32개 마을에 달하게 되었다. 증가되어 가는 고려인에 대한 러시아당국의 시각은 양면성을 띄었다. 고려인의 우수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원동지역을 개발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고려인의 과도한 유입으로 국경지방 안보에 위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상반되는 두 가지 시각은 이후, 원동지역의 국제 정세와 러시아의 국익에 민감하게 반영되었다.
고려인의 성실성과 영농실적 및 노동성과는 러시아인 및 당국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족하였다. 1870년대 고려인들의 곡물 과잉생산으로 러시아 군은 중국 훈춘으로부터 군량미(귀리, 보리 등)수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러시아인 지주들은 값싼 고려인 노동력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였으며 소유전답을 경작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교통 통신수단 건설과 군수물자 수송에 고려인 노동력을 광범하게 활용하였다. 드넓은 연해주 땅에 고려인의 피와 땀이 깊이 배어들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본거지(本據地)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했고,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일제(日帝)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동양척식회사를 앞장세워 불쌍한 농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빼앗았다. 생계의 터전을 수탈당한 농민들은 화전민으로, 또는 소작인과 머슴살이로 전전하다가 그래도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신천지를 찾아 갔다. 연해주에는 고려인 이주여건이 한층 증폭되었으며,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가와 열혈 망명이주민들도 모여 들었다. 연해주는 한민족의 독립운동 본거지가 된 것이다. 의병운동이 일어나고, 권업회가 창립 되였으며 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 양성되고, 준비되고, 지원되는 다방면적인 독립투사들이 만주로 중국으로 또는 국내로 파견되어 조국광복을 위한 피의 역사를 기록해 나갔다.
고려인 사회도, 모험적인 개척정신과 억척같은 근면성으로 차차 자리가 잡혀갔다. 고려인들은 잠재력을 지닌 성숙한 민족공동체를 영위하고 있었다. 안정을 찾아가는 고려인 사회는 독립운동을 전반적으로 지원하고, 이에 참여하는 기지가 되고 있었다.
혁명의 와중에서
1917년 가을, 러시아는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하여 소비에트 연방이 된다. 제정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레닌의 선언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식민지 피압박민족들에게 복음이었다. 지도계층에 있었던 고려인들이 독립운동의 우군으로 믿고, 투쟁의 거점으로 볼셰비키에 관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음모와 공포의 독재자 스탈린 집권 하에, 1930년대는 정치적인 대 숙청과 이에 따른 혼란기였다. 급격한 농업체제 개편의 와중에서 1.0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다. 공산주의 소연방의 계획에 따라 3.000만 명이상이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이주자 반 이상이 질병 사 또는 아사했다고 한다. 스탈린 독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400~500만 명을 숙청하였으며, 그 중에 약10%는 사형에 처하였다. 그 와중에 고려인 지도자 및 지식인도 희생되었다. 황제를 넘어 신의 반열에 속했다는 KGB의 독살스러운 감시의 눈초리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았다. 1931년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소련 당국의 고려인에 대한 적대적 경계심이 더욱 거세졌다. 고려인 지도자들은 ‘일본첩자’ ‘반역행위’ ‘사보타지’ ‘테러활동준비’ ‘반혁명활동’ 등의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소비에트 화에 적극 참여했던 고려인 사회의 엘리트들이 이때 대거 희생되었다. 상해 파, 국민의회 파, 이르쿠츠크 파, 엠엘 파 등 가릴 것 없이 모두 분파분자라는 죄목으로 출당, 체포, 투옥, 사형 등으로 처형 되었다.
볼셰비키의 주요 간부였던 루쉬코프가 일본으로 망명하여 폭로한 바에 의하면 1935년부터 1937년까지 고려인 2.500명을 구금하였고, 대부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10월 혁명 후, 원동지역 적위군에 가담하여 반혁명 간섭군인 일본군 및 백위군과 싸웠던 빨치산 원로들 까지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볼셰비키혁명에 적극 협력하고, 지식인 또는 의식분자라는 이유로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한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에 의해 하바롭스크 시에서 처형된 4,302명의 고인(故人)을 추도하는 공동묘지가 옛 칼 마르크스 거리 입구에 위치해 있다.스탈린은 강제이주에 반대하는 수많은 고려인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2003년 10월에 하바로브스크 시민들에 의해 세워진 추도비석에는 조명희 등 다수의 한인들 이름도 새겨져 있다.이곳에는 1937년 학살당한 한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90년 10월에 건축한 ‘기억 사원’이라는 자그마한 러시아 사원이 있다. 여기에는 작가 조명희, 박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비치, 강고간 등 세 사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묘비에는 「여기에 잠깐 서서 스탈린 시대에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 인사드려라.」는 문구가 각인되어있다. 혁명의 와중에서 고려인은 이렇게 죽어가서, 그 원혼이 연해주 하늘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디아스포라
1937년은 볼셰비키혁명 20주년과 함께 스탈린 헌법으로 기억되는 해다. 지도계층을 대거 처형한 공포가 극도로 고조되어 있을 무렵 반인도적인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조치가 취해졌다. 고려인들은 이주 3~7일전에 일방적으로 통보받아 기차역으로 집결하였다. 두려움 속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시커먼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린 것이다. 이주 1진이 9월9일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한 이래 12월까지 총 124편의 이주열차가 시베리아 설풍(雪風)을 가르면서 중앙아시아로 달려갔다. 30일 내지 40일이나 걸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불모지로 끌려가 내 동댕이쳐진 것이다. 이는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그때 끌려간 강제이주자는 연해주 고려인의 대부분인 17만2.000명이었고, 이동 중에 노약자 1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강제이주의 근거는 소련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이주 이유는 첫째, 점차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Spy예방대책이라는 명분 아래,
둘째, 고려인 자치주 요구의 사전봉쇄였다. 유태인의 자치주 설치 선례가 있고, 고려인들의 자치지구 요구가 비등한 적이 있었다(포시에트군 공산당 제1서기 김 아파나시는 극동 주를 소련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셋째, 소련의 농업 집단화 정책상 인구가 희박한 중앙아시아에 인구공급 및 노동력 수요충족과 농업생산력 증대였다.
넷째, 고려인의 성실성과 우수성 및 농업기술 인정 등이다.
이주지역과 이주규모는 1937.12.5.일자 소련문서자료에 남아있다. 카자흐공화국 20.141가구 95.427명, 우즈베크공화국 16.079가구 73.990명, 키르기즈 공화국 215가구 421명, 타지크공화국 13가구 89명 등 총 36.448가구 169.83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인들은 이주지에서 초기에, 토굴을 파고 그 첫겨울을 났다고 한다.
이주 후 3년 동안에 20.00명이 추위와 기근, 그리고 풍토병으로 죽어갔다.
중앙아시아의 소 연방 각국에 배치된 고려인에게 거주이전의 자유는 물론 여행의 자유도 없었다.
조국에서 밀려나 소련으로 망명한 비극의 시인 조명희(趙明熙)의 시「별 밑으로」를 되뇌어보면서 고려인들의 암울하고 막막했던 처지를 상상해 본다.
냉가슴을 안고 가자
저 저문 사막의 길로 저 별 밑으로
그 별에게 말을 청하다가 말이 없거든
그때 홀로 쓰러지자 홀로 사라지자
재기(再起)의 DNA
황무지는 반사막이었고, 황야의 나무뿌리 풀뿌리가 깊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 세기적인 비극을 인고하면서 적응해 나간다.
초기 연해주에서 발휘했던 극복의 DNA가 다시한번 재기의 DNA로 용트림한다. 세월이 가면서 성실성과 근면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점차 정착되고 생계에 안정이 이루어져 갔다. 그때 여러 소수민족 가운데 거지가 없는 민족은 단연 고려인뿐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다고 하드라도, 집단농장인 콜호스(kolkhoz) 에서 부(富)의 축적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고 다만 굶지 않는 노예생활일 뿐이었다.
2차 대전 중 고려인 집단거주지인 타슈켄트에서 시작된 고본질(股本질/임차 계절농)로 부를 축적하는 예가 많아졌다. 고본질은 토지가 없는 소수민족 고려인들의 독특한 삶의 한 방식이 되었다. 집단농장으로부터 농경지를 임대하여 경작하는 고본질은 고려인들의 자생적이고 독창적인 생존전략이었다. 토지소유자인 콜호스 또는 소프호스 와 고려인이 경작지 임대차계약을 체결, 종자, 비료, 농기계까지 제공받아 임차 농을 경영하며, 임차료는 수확량의 무려 50%를 납부해야 하고 나머지 50%는 고본자가 임의로 시장에 판매할 수 있다. 고려인 상호간의 끈질긴 유대와 일체감에 바탕을 둔 협동방식은 고본질의 성공에 기여하였다. 고본질의 수확량은 집단농장의 그것을 단연 상회하였다. 어떤 경우, 콜호스에서 1ha당 양파 10~15톤을 생산하는 것이 상례인데, 고본질로는 70톤을 생산했다고 한다. 고려인의 영농기술과 성실성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본질은 소비에트체제의 집단적 영농체계에서 이단적인 영농체계였다. 그러나 콜호스의 고질적으로 어려운 목표달성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확인하고 고본자의 활동을 묵인, 공생하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진행된 고본질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에 대한 교육과 경험까지 앞당겨주었다.
고본자들은 일 년 중 봄부터 가을까지, 또는 수확된 농작물 판매가 끝나는 겨울까지 집을 떠나 고본현장에서 천막을 쳐놓고 일에 혼신 전력하는 고난을 담보해야 되었다.
고본질로 부를 축적하는 이들이 늘어나갔다. 고본질로 매년 5만~6만 루블을 벌었다는 예가 있다. 자동차 10대나 집 10채에 해당되는 거액을 매년 벌었다는 이야기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고려인에게 여행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고본질에 성공한 고려인들은 그 자녀들을 도시로 진출시켜 대학교육을 받게 했고 고급인력으로 키웠다. 부를 축적하여 사업을 경영하고 지도계층으로 신분상승에 성공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도시에서의 교육과 입신(立身)에 성공한 고려인은 콜호스에 거주하는 가족과 친지를 도시로 불러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인은 점차 도시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떠나는 사람들과 남는 사람들
역사의 국면이 바뀌어 1991년8월, 74년의 공산주의 실험을 실패로 끝내고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었다. 과거 소련정부의 역할을 인수, 계승하여 러시아연방이 새 출발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연방에 속해있던 중앙아시아 각국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신생 독립국들은 정치공동체 및 경제협력체로서 CIS(독립국가연합)를 결성하였다.
독립국들에서는 토착민이 득세하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또다시 소수이민족으로서 소외와 억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대부분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 고려인은 각국이 토착어를 공용어로 바꾸어 가므로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취업에도 결정적인 불이익을 받는다. 고려인들은 상당수가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원, 집단농장관리자 등 사무직이나 관리직으로 종사하고 있었는데 대거 현지인으로 교체되어 나갔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혼란과 신생공화국들의 산업공동화현상은 모든 기업들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1994년을 전후하여 각국은 러시아 루블 화폐를 폐기하고 자국화폐를 새로 도입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루블화는 크게 평가절하 되었다. 이에 따라 현금보유를 우선시해온 고려인들에게 많은 금전적 손해를 가져왔다. 물적 재산에 대한 달러화 대비 가격하락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 고려인은 이중으로 재산상 큰 손실을 입었으며, 게다가 인플레는 천정부지여서 막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살던 그 땅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다시한번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태어나고 자란 중앙아시아에 남아야 할지, 말과 문화가 익숙한 러시아 땅으로 가야 할지 결단해야 했다. 고려인 3,4대들에게 토착민족주의 대두와 공용어의 변경은 사회적 차별이 아닐 수 없었다. 재류와 이주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피땀으로 가꾼 삶의 터전을 버리고 국외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고본질을 계속하기 위해 이웃나라로 향하는 사람, 조상의 땅 연해주에 뿌리를 내리겠다며 러시아로 떠나는 사람, 제3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땅에 그대로 남는 사람들로 고려인 사회는 어수선 하였다.
소련 붕괴를 전후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고려인들의 국외이주는 1992년에 일어난 타지키스탄 내전으로 본격화 되었다. 타지키스탄을 떠난 고려인 1만 여명은 인접국인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옮겨갔다. 1994년에 일어난 체첸전쟁도 그 땅에 살고 있던 25.000명~30.000명의 고려인들에게 이동을 가속화 시켰다. 이번의 고려인 이주민은, 체제전환과 민족분규의 희생자들이다. 강제이주 후 천신만고로 정착한 지역에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떠나는 ‘강요된 이주민’이자 전쟁난민들이다. 이때 중앙아시아를 떠난 고려인 이주민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고려인은 19세기 중엽부터 4번의 이주를 겪는 것이다.
첫 번째는,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간 이주다. 그것은 기아와 봉건적 탐학으로 부터의 탈주라고 함이 맞을 것이다.
두 번째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다. 고국 언저리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지역으로 추방해 20세기의 디아스포라로 전락한 민족사의 통한이다.
세 번째는, 1953년 스탈린 사후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여행의 자유가 허용되어 개별적으로 옮겨 간 분산이주다. 슬라브(slave) 문화권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밸라루스, 등지로 옮겨간 것이다. 이후 고려인 생존무대가 서부 러시아까지 확산되었다.
네 번째는, 1990년대 민족주의 선풍에 밀려 다시 유랑의 길로 접어든, 최 근년의 이주다. 민족주의에 밀린 이 대이동은 1990년대에 주로 러시아로 옮겨가는 것이 주류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취업과 서방세계를 향한 이민이 시작되면서 러시아행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처럼 끝나지 않은 유랑의 역사 때문인지 고려인들은 스스로 나그네의식에 젖어있는 경향이다. 정서적 방황으로 러시아나 거주국은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일체감, 소속감으로 밀착하지 못하고 있다. 1937년 강제이주로 뿌리가 뽑힌 이후 끊이지 않는 떠돌이 생활 때문일 것이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어느 고려인 지도자의 한탄은 유라시아 대륙을 150년간이나 떠돌고 있는 고려인의 슬픈 역사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나의 부친은 원동의 하바롭스크 시에 묻혀 있다. 어머니는 러시아 크림주 엡파트라시에, 외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미르자 촌에, 친 할아버지는 연해주 수하놉카 촌에, 외할머니는 타슈켄트주 사마르스코예 촌에, 그리고 친할머니는 카자흐스탄의 침켄트 시에, 형님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촌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니 이 고인들을 누가 모셔서 성묘할 것인가. 기가 막힐 일이다. 악마의 나라에서만 이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고려인들에 대한 어느 자료에서 발견한 한탄이다.
‘악마의 나라’라는 말에 가슴이 움츠려 든다. 백성을 버린 나라 조선조 말과, 나라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대한제국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필자도 악마의 나라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섬찟 해 진다.
한 가족의 무덤이 광활한 유라시아대륙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려인들의 수난의 역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연해주, 고려인의 고향
러시아이주의 한 갈레는 고려인들이 고본질을 다녔던 남부 러시아 캅카스 지역으로의 농업이민이다. 중앙아시아와 기후풍토가 비슷하고 농업활동이 활발한 곳을 찾아간 것이다. 러시아 남부의 고려인은 6만~1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어 고려인의 새로운 집거지로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로 귀환한 사람의 상당수는 그들 선조들의 고향인 연해주로 이주했다. 러시아의 국적취득지원과 주택건설 지원, 및 토지분배와 융자알선 등에 힘입은 바 컸다.
연해주는 고려인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동심이 싹텄고, 추억과 그리움과 애착이 있는 땅이다. 지친 고려인들에게 정신적으로 끌리는 동경의 땅이기도 하다.
1920년 봄,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연재된 아령실기에서 고려인 이주사(移住史)에 관하여, 연해주 개척사는 고려인의 “눈물과 땀과 피가 쌓여 이룩된 것”이라고 기록했다. 연해주는 고려인의 선조들이 개척한 고려인의 땅이다.
근면한 고려인이 연해주에 정착함으로써 부족한 러시아의 식량증산과 야채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걸 수 있다. 한국의 원동지역 투자 및 개발과정에 고려인의 합류도 묵인하고 있는 추세다. 한국의 투자활성화와 연계되기를 바라는 측면도 있다.
연해주 중에서도 남부도시지역에 중점적으로 이주 했다. 역사적인 조국인 한반도와 한 발작이라도 가까운 곳을 찾는 민족적인 귀소본능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외무부의 2013년 자료에 따르면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은 약 29.000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의 비공식 추계는 약 50.000으로 되어 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귀환한 사람들이다.
중러 국경물류도시인 우수리스크와 그 인근에 약 20.000명, 블라디보스토크 및 그 인근 5.000내지 6.000명, 파르티잔스크(빨치산스크)지역 약 3.000명, 나홋카(두만강 대안) 약3.000명, 스파스크 1.000명 등이다. 그밖에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북한송출 노동자(러시아정부의 1년짜리 노동 허가증 소지자)가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약 3.000내지 5.000명, 중국인 불법체류자 중 수천 명의 조선족, 한국교민 약 300명 등이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은 다시 재기를 위한 발돋움을 하고 있다. 그들의 재기의욕을 격려하고 도와야 한다.
돌아온 고려인
1.5세기 이상 단절되었던 한국으로의 이주가 크게 늘어난 것은 경이적이다. 냉전 시대에 고려인들의 남북한 인식은 상대적이었다. 북조선을 살기 좋은 사회주의 형제국으로 생각했으며, 남한은 미제(美帝)의 지배로 고통 받는 저주의 땅으로 알려졌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고려인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소국교가 정상화되자 남한 땅을 직접 밟아본 후부터 대한민국이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는 중진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로의 쉽지 않은 전환기를 맞아 자본주의에 대한 멘토(mentor)가 필요했던 고려인들에게 한국은 선망의 땅으로 떠올랐다. 취업, 비즈니스, 유학, 친지방문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잦는 고려인은 해마다 늘어나났다.
지금 국내에 70.000명의 고려인들이 들어와 있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달라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규모기업의 단순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업노동에도 투입되고 있다. 고려인들은 광주광역시와 경기도 파주시, 안산시, 서울 동대문 등에 집단적으로 거주 하고 있다.
2018년6월말 현재 법무부 통계가 보여주는 국내 체류 고려인들의 국적별 분포는 러시아 국적자 23.267명, 우즈베키스탄 32.201명, 카자흐스탄 10.870명, 키르키즈스탄 2,577명, 총계 68.915명으로 되어있다.
2015년 이후부터 고려인 체류자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는데, 이는 러시아 국적자에 대
한 전면적인 재외동포 체류자격을 부여 해주었기 때문이다
국내 거주 고려인들은 고조부 대에 떠났다가 150여년 만에 후손들이 돌아온 것이다. 150년의 격차는 짧지 않고 그 질적인 내용과 양적인 규모는 크다. 그들은 조상들의 고토(故土)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다시 만만찮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언어소통, 비자, 취업, 급여, 복지, 의료보험 등, 문제에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고려인들은 한국인들이 고려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고려인 동포3세가 2017년 3.1절 98주년과, 고려인 강제이주80주년을 맞아 고국에 대한 애정과 소망을 담은 시집을 냈다. 광주광역시 월곡동 고려인 마을에 사는 김 블라디미르(61)씨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문학대학에서 33년 동안 교수로 재직한 학자였고,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김 씨는 그의 시 ‘추석, 의 한 구절을 통해 고려인들의 간절한 바람과 생각을 전하고 있다.
“나는 외국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듣거나 알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고려인,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2011년 3월에 한국에 왔으며, 지금도 생계를 위해 일당 60.000을 받는 농업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국내거주 고려인들의 갈등과 비감(悲感)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17년은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의 해였다. 경기도 안산의 고려인 80명이 발표한 고려인 선언문은 그들의 기구한 역사와 유랑에 대한 긴 설명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밝히면서 끝을 맺었다.
첫째, 우리는 무너진 우리의 삶을 스스로, 그리고 협력하여 새롭게 복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인이라는 자아의식과 정체성을 공고히 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이를 공부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살 것이며, 대한민국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이 될 것이다.
임 이고리 외 고려사람(79인)
김 블라디미르 교수의 시구(詩句)나, 고려인 80명의 결의는, 내국인들의 따뜻한 입김을 뜨겁게 바라고 있는 고려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을 담고 있다. 필자는 연해주 여행을 통해 고려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채무의식을 느꼈다.
망국의 한을 품고 고국을 떠나 북풍한설 몰아치는 연해주를 떠돌던 독립운동가들 의 삶과 죽음을 확인하는 곳곳마다에서, 산과 강과 마을과 넓은 평원을 바라보았다.
피 흘린 독립투사들의 대지(大志)와 그 생애를 다시 생각하고 그들의 자손들은 우리의 피붙이, 우리의 살붙이라는 것을 거듭 느꼈다.
그들의 바람에 대하여 이제는 답을 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고려인 150년의 그 슬픈 여정과 인고의 역사는 이제 여기 조국이 종착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믿는다.
민족웅비의 뜀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막한 지역에 150년 동안 표류해온 고려인은, 53만 명에 이른다.
기아와 빈곤선상에 있는 백성을 포용해 주지도 못한 조국, 간악한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지도 못한 그 조국이지만, 그래도 그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젊음과 생애를 바친 연해주의병들이었고, 독립투사들이었다. 세대(世代)를 이어오고, 세기(世紀)를 넘기면서 떠도는 동안 언어와 습성과 사고가 상당부분 조국과 유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CIS지역에 살든, 러시아에 살든, 또는 한국에 들어와 있든지, 이주 1세대인 증조부 고조부세대에서 지켰던 설, 한식, 단오, 추석 등 세시풍속(歲時風俗)과 어린아이의 백날이나 돌잔치를 지켜나가는 등 희미하나마 민족문화와 뿌리의식을 지켜 나가고 있는 사실을 가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1910년대에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도강하여 국내로 진군, 일제관헌을 쳐부순 연재주 의병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53만 고려인 중 상당비율은 그때 의병의 자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50년의 표류(漂流)를 종결하고, 잊혀 진체 외롭게 이어온 역사의 지류를 이제는 당당하게 민족사의 본류로 유입시켜, 그들에게도 민족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연해주 의병과 독립투사들에 대한 보답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려인 50여만 명을 4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중앙아시아 각국이나 러시아각지에서 기반이 잡혀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다.
2011년7월 현재의 중앙아시아 고려인 인구통계에 관한 외교부 자료에 의하면, 우즈베키스탄 173.000명, 카자흐스탄 107.130명, 키르기스스탄 18.230명, 타지키스탄 1.740명, 투르크메니스탄 884명 총계30만1584명으로 되어 있다. 고려인의 대부분이 CIS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거주지역에서 누대에 걸쳐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실적이 현실화, 생활화 되어있다.
알마아타에는 주 3회(수, 금, 일)방송되는 「한국어 방송」이 있다. 그곳에 불행한 만년을 살다가 76세로 영면한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홍범도 거리」가 있다. 그는 국내에서부터 의병으로 맹활약했으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다.
역시 알마아타에는 강제이주 이전에 연해주에서 창설하여 80여년을 이어온 조선극장이 있다. 창설 50주년을 맞은 1982년에 소련정부 명예훈장까지 받았으며, 창설이후 200여 편의 작품을 공연했다. 연간 집단농장 순회공연이 250회 이상이었다.
농장 타작마당에 횃불을 밝혀놓고 한 모든 공연은 한국어로 했다고 하며, 공연이 끝난 다음 출연진과 관객들이 횃불 밑에서 서로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자도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진한 민족감정을 지키면서 발산해온 예술단체가 지금도 건재 한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 한국어로 12.000부나 발행되는 고려일보가 있어 민족의식의 네트워크 역할을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2번이나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김병화 농장이 있고, 김병화 거리와 김병화 박물관도 있다. 김병화(1905~1974)는 고려인 1세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황만금(1921~1997)은 포리트오트젤 콜호스를 맡아 소련에서 유일한 관광농장으로 육성하여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관광공사에 등록하게 되었다. 외국에서 농업관계 손님이 오면 황만금의 농장으로 안내 되었다. 황만금은 소련 해체 후 타슈켄트에서 거대한 온실제배로 큰 재력가가 되었고, 그 아들 중 한사람은 한국으로 진출하여 거부가 되었다고도 한다. 김병화와 황만금 두 사람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거주하는 각국에서 정치적으로 입신하여 대의원이 된 이들이 여럿이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은행장이 된 사람도 있었다. 군 장성이 있고, 언론계의 방송앵커도 있다.
세계적인 예술가로 명성을 높인 경우도 있고 스포츠맨으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사례도 여럿 있다.
고려인들이 쌓아온 업적이다. 그들의 입신과 성공은 보통의 경우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인간승리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불멸의 생명력을 세계 사람들에게 입증한 것이다. 그들의 성공과 업적이 곧 고려인 문화이다. 독특하고 고유한 고려인 문화를 인정하고 포용하면서, 문화적, 정서적인 유대를 지속적으로 강화하여, 그들의 뿌리가 한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고무(鼓舞)와 격려를 보내어 사기를 진작시켜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장차 대륙으로 뻗어나갈 국세(國勢)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연해주의 고려인 또는 고려인 사회다. 이들에 대해서는 조국이 그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진출 기업을 통한 취업의 확충이나 비즈니스를 통한 인센티브를 부여함으로써 러시아 전역의 고려인들이 집중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여러 기업과 단체가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계획단계인 대규모 기업농에 고려인들을 접속시키는 것은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유라시아 고려인의 오랜 이상과 희망은 고려인 자치지구를 이루는 것이다. 한러 간의 외교적인 양해가 뒷받침 되어야 하고, 러시아적 질서에 순응한다는 고려인의 자세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고려인의 지역적 집결이 요청되는 사항이라고 하겠다. 일본이 러시아 진출을 시도하나 러일 전쟁 이래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다. 중국인의 연해주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으나 청나라의 고토에 대한 미련과 야심을 러시아는 경계하고 있다.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시각은 매우 호의적이다. 한국기업의 투자진흥과 한국인의 진출을 어느 나라보다 환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해주는 장차 통일조국의 남한인과 북한인, 고려인과 조선족, 그리고 경위와 계통은 다르지만 사할린 고려인까지 같이 어울려 번영을 추구해 나갈 한민족공동체의 새로운 실험지대, 새로운 생존권역으로 부상될 기대를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연해주는 우리 민족의 대륙을 향한 비상(飛翔)의 거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셋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무국적자로 전전하는 고려인이 5만 명쯤 된다고 전해진다. 여권을 분실했거나, 신생국 국적 신청 정보에 어두웠거나, 이동 중에 국적신고의 서류를 분실한 사람들, 또는 국적신고절차가 복잡하고 어려워 신고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들이 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당대의 취업이나 의료 보건 등에 불이익은 물론, 그 후대에 까지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없어 비극은 대물림 된다. 우리 정부는 외교적인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 무국적자 전원을 구제하고, 국내로 귀환토록 하는 조치를 제안한다. 무국적자 5만 명 가운데 가구주가 2만 명 쯤 될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총 고용인원 2.700만 명에, 외국인 근로자가 100만 명을 넘는 규모다. 이와 같은 국내 노동시장은 무국적자 고려인 가구주 2만 명쯤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988~1993년 간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독일인200만 명 중 81만 명을 귀국시켰고, 통독 후 재외동포 귀국이 용이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한 선례가 있다.
1988~1992년에 소련 또는 러시아연방에 거주하던 유태인48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실도 참고할 만하다.
고려인은 “조국이 둘이라도 오라는 곳이 없다. 나라 없는 민족보다 못한 것이 고려 사람들의 처지”라고 한탄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바 있다. 이 한탄을 풀어줘야 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넷째, 국내에 취업을 위해 들어와 있는 고려인과 고려인 사회다. 이들 중 상당부분은영구적인 귀환을 원하고 있음은 앞에서 본 고려인의 결의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국회는 입법조치로, 정부는 정책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이들의 정착과 안정을 도와야 한다. 시민단체도 적극성을 보여, 언어, 습관, 문화 등에 관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 지원하여 하루빨리 내국인과 정서가 접근되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150여년의 세월을 극복하는데 국민들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한다. 고려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공존할 동포들이다. 고려인은 고려인 특유의 문화가 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포용하여 민족문화 본류로 흡입 동화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유라시아대륙에 산재하는 고려인들은 한민족 네트워크에 연결된 매듭들이다. 조만간 통일과업을 이룩하고 세계를 향해 웅비할 때 그 국가 그 지역에서 민족비상(民族飛翔)의 뜀틀이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긍지와 사명을 부여하는 일은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고려인, 그 슬픈 여정의 종착지는 바로 조국이라고 굳게 믿는다.
후기:
귀국 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과 주무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앞마당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비에 기단 설치가 긴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민원을 제기하였다. 주무관은 긍정적으로 응대하면서 곧 직원이 출장하여 현장을 확인하겠다고 언급했다. 그의 즉각적이고 전향적인 반응에 감사하면서 추이를 지켜보고자 한다.
(2018.9.12.)
첫댓글 이 긴 글을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려인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한 편린입니다. 그 동안 잃었던 역사편린을 본류에 합류시키는 것은 역사 본연의 책무이며 민족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취업, 친지방문, 유학... 갖가지 이유로 국내에 들어와 있는 고려인은 이미 10만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때로는 갈등이 없지도 않습니다. 오는 3.17.15:00 경기도 안산 땟골 사거리에서 열리는 고려인 독립운동기념비 건립 선언식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로 그 행사에 관한 안내를 싣겠사오니 고려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참여와 배려를 권해 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