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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4일(부활 후 여섯 번째 주일)
요한복음 2:1~11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네 페이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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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의 길로 들어선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집에 초대받으셨습니다. 갈릴리 가나는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북쪽으로 약 13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혼인집 잔칫집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노랫가락이 있고 웃음소리가 넘쳐납니다.
젊은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어려움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앞으로 겪게 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겠노라고 서약합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부부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노라고 서약합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자리예요? 일륜지 대사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우리나라는 보통 결혼식 당일만 피로연을 합니다만, 유대인들은 보통 일주일간 매일 피로연을 엽니다. 혼주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했어요. 이 자리에 예수님만 초대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까지도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축의금이라도 제대로 했겠어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그들이 가진 것이 무엇이 있어서 손님의 의무를 다했겠어요?
그런데 흥겨워야 할 잔칫집에 흥을 돋우어 줄 포도주가 떨어지게 됐습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혼주의 책임이었습니다. 혼주에게는 일주일간 손님들에게 충분한 양의 포도주를 공급할 책임이 있었던 거지요.
이 사실을 먼저 안 사람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 전에 조용히 처리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예수를 찾아간 것입니다.
“얘야, 큰일 났구나! 내가 방금 뒤뜰에 들어가 보니까 포도주가 바닥났더라. 지금 어디서 포도주를 구해 올 수도 없고 이 일을 어떡하면 좋겠니?”
아마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그 아들 예수가 이 일에 어떤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적잖이 실망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 모친 마리아에게 그런 모진 대답을 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자기 모친을 가리켜 “어머니” 대신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도 좀 그렇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자여’라는 표현이 더 애정 어린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우리 문화에서는 좀 냉혹한 표현처럼 들립니다. 더군다나 도움을 요청하는 어머니에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대답하신 것도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예수님은 자기 모친 마리아에게 공손하지만, 정서적인 거리감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오직 “그때”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그것을 인식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마리아 앞에 육신의 아들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로 서 있는 거지요. 그러니 예수의 모친 마리아도 사실은 예수님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죄인으로 서 있는 겁니다.
흥겨워야 할 자리에, 축복받아야 할 자리에, 결핍이 존재한다는 것이 낯설지만,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치러야 하는 당사자들과 부모님들이 손님 접대하는 일에 소홀했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몇 달 전부터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아마 한두 가지는 아니었을 거예요. 꼼꼼히 챙기고, 확인해도 예상치 못한 일에 누구나 속수무책일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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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빈곤!” 지금의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먹을거리가 풍성해요. 웃음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요. 결혼식장에 가서 인생 고민하는 사람 봤어요? 아니지요. 인생 고민은 장례식 분위기에나 어울리는 말이에요. 결혼식장에 가서는 그저 기뻐하고, 행복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도 문제가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결핍의 문제가 존재해요. 그리고 이 문제로 인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결핍은 어떤 종류인가요?
먼저는 물질적인 결핍이 있을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단어 앞에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가 ‘웬수같은’이라는 말이에요. 얼마나 미웠으면 돈을 웬수 같다고 했겠어요? 그 돈 때문에 사람이 울고, 그 돈 때문에 살인이 나요.
수십 년간의 우정도 ‘웬수 같은 돈’ 때문에 하루아침에 서로 웬수가 되고 말아요. 존경받던 인격자도 ‘웬수 같은 돈’ 때문에 하루아침에 ‘이중인격자’로 추락하고 말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맞고 싶어 하는 벼락은 ‘돈벼락’이에요. 사람들이 가장 앉아보고 싶어 하는 방석은 ‘돈방석’이에요. 돈돈하다 돌아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노총각에게 소원이 있었지요. 돈 많은 여자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대요. 그런데 어느 날, 실제로 산신령이 눈앞에 나타나서 네 소원이 무엇인지 세 가지만 말해보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이 노총각은 너무 급한 마음에 다음과 같이 소리쳤지요. “돈, 여자, 결혼”
그랬더니 잠시 후에 실제로 소원이 이루어졌답니다. 정신이 돈 여자하고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돈의 위력이 상당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젊음의 행복을 만끽해야 할 나이에 건강이 결핍되어 어려움을 겪습니다. 제가 어느 날 책을 읽다가 한 자매 이야기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인 혜옥 자매란 분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교회 홈페이지에 ‘날마다 두레박을 내리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다고 그래요. 그녀가 올린 글 중에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변을 누어야 할 신호가 올 때마다 제 몸 깊숙이 두레박을 내리며 살아가는 여자, 바로 제 모습입니다. 일찍 받아 놓은 퇴원 날짜를 하루 이틀 미루면서 배워야 했던 소변 빼내는 연습.”
“같은 여자인 간호사에게 받는 교육이었지만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그 시간만 되면 마치 제가 지옥의 고통 속에 나뒹구는 벌레가 된 심정이었습니다. 결코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인체의 가장 깊은 곳을 동네북이 되어 이 간호사, 저 간호사에게 내보여 주며 맡길 수밖에 없었던 처절함…”
“하지만 저는 퇴원하기 위해서 열심히 배워야 했습니다. 하루빨리 어떻게든 스스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그것이 이 지옥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수술 후 인공 장루를 참지 못해 구토하며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더라면’ 하는 탄식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홀로 울면 울었지 결코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입 밖으로 그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않았던 저였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지 몰라요. 가장 행복해야 할 나이에 가장 수치스러운 일들을 견뎌내야만 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클까요? 이 세상에는 혜옥 자매가 겪은 것처럼 혼인 자리에 포도주가 모자란 사람들 이야기가 많아요.
무엇보다 영적인 결핍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인생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야 해요. 그런데 오히려 예수를 믿어도 기쁨이 없고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옛 죄의 습관들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영적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당연히 이런 분들에게 기도의 응답이니, 성령의 열매니 하는 것들은 남의 이야기겠지요.
그저 가정의 평안을 위해, 그동안의 형식과 습관에 의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당에는 나오지만, 그 안에 기쁨의 포도주가 모자랍니다. 잔칫집에 으레 있어야 할 포도주가 없는 거예요.
자신 안에서 기쁨의 포도주가 없으니 당연히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되지요. 교회가 어떠하니, 목사가 어떠하니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 안에 기쁨의 포도주를 잃어버려서 그런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워요?
저는 이런 분들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지 않아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겠어요? 계획하고, 준비하고, 점검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겠노라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겠어요? 마치 혼인집 혼주가 피로연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닥친 결핍의 문제를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고, 누군가 해결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여러분에게는 그런 분이 계시나요? 여러분의 결핍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 계시는가요? 만약 그런 분이 계신다면, 그런 분을 만나셨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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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한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이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비록 예수께 호의적인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마리아는 분명 예수님께서 결핍의 문제를 모른 채 지나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인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너희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고 그대로 해야 한다.”
마침 그곳에는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 돌 항아리는 평상시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결 예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손을 잘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목욕하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지요. 그들은 이것들 외에도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것처럼 여러 가지를 지켜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몇 명이 손을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비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돌 항아리 여섯은 순전히 유대인들이 자신을 정결하기 위해 준비된 물이었습니다. 한 통이 약 40리터 정도니까, 이것은 약 600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용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을 시켜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좀 더 다른 명령은 없었겠습니까? 아마 제가 하인이라면 이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급히 이웃 동네로 가서 포도주를 사 오라고 명령한다거나, 아니면 잘 익은 포도를 구해오라고 말씀했다면 순종하기가 좀 더 쉬웠을 거예요. 그러나 하인들은 마리아의 분부를 기억하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왕 순종할 바에는 아귀까지 차도록 물을 채웠던 거지요.
그다음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물론 아직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하인들 앞에는 항아리에 가득 부은 물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그때 일어났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것을) “갖다 주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실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을 보고 하인들만 놀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회를 주관하던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는 어디서 이런 극상품 포도주가 나왔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다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취한 후에는 낮은 것을 내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습니다.”
아마 뒤늦게 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이 일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고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기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과연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과연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인생의 결핍을 당할 때 자기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기 행복을 위해 투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모든 노력은 허망한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힘으로 웅덩이를 파는 자들을 악하다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파는 웅덩이는 결코 물을 가두지 못한 터진 웅덩이일 뿐입니다. 죄악 된 인간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 말고도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때”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중 한 구절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때’는 ‘예수의 죽음의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은 무덤에 장사 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예수님은 율법과 전통을 상징하는 돌 항아리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인간은 법과 전통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기쁨과 내용은 상실한 채 공허한 틀과 형식만 붙들고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틀 안에 새로운 것이 담겨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담기고 새로운 영이 부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넘치게 됩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상징합니다. 또한 혼인 잔치는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얻게 될 구원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결핍과 고독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1절).
여러분은 비록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던 하인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귀까지 물을 채우는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칫집에서 혼자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무명의 하인들을 통해서 극상품 포도주를 잔칫집에 공급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면, 우리는 기쁨을 잃고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의 포도주를 날라주는 행복의 유통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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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앞에서 이야기한 혜옥 자매 이야기를 좀 더 해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에스겔서를 묵상할 때 눈물이 제 가슴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난 3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가슴으로 통곡하며 울었던 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그가 안으로 들어가서…(겔 41:1-3)”
에스겔이 듣고 보았던 하나님, 그분의 영광이 거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험난하고 좁았던 것처럼, 저 역시 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고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육체를 내 맘대로 다스리며 지낼 때는 한 번도 수치스럽다거나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체를 드러내며 음행한 자처럼 스스로 더럽히는 일을 즐겨 했지요. 범죄 안에 거할 때, 온통 육의 영으로 가득 차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은의 찌끼처럼 스스로를 땅에 떨어뜨리기를 주저하지 않던 저를, 하나님은 엎드러뜨리고 또 엎드러뜨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내부 깊숙한 곳의 치부를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두레박을 들어 올리는 지금이 제 모습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수치가 아님을 보게 하십니다.
항문을 막고 소변 줄을 막으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저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드나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던 에스겔처럼, 저 또한 허물어진 성전의 돌무더기들을 끌어안으며 다시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성전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두레박을 내리는 일, 고단하고 힘들지만, 그날이 이를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리라 굳게 다짐해 봅니다. 나의 수치를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 감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신 하나님, 평안이 넘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 당신을 감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혜옥 자매가 인공 장루를 달고 간증을 시작했고, 퇴원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홈페이지에 큐티 나눔을 올리기 시작했답니다. 혜옥 자매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날마다 자신의 가식을 벗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응답해 주셨답니다.
인공 장루를 달고 여자로서 수치를 느끼며 간증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배뇨 기능이 돌아왔답니다. 병원에서는 모두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입을 모았다는 거지요. 이제 혜옥 자매는 기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볼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인생의 결핍을 가지고 계십니다. 흥겨워야만 하는 혼례 집 연회장에서 뜻하지 않게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만나고 있지는 않나요? 기쁨의 포도주를 잃어버리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지는 않나요?
기억하세요! 지금 예수님께서 그 문제의 현장에 함께 와 계세요. 언제든지 여러분이 도와달라고만 하면 예수님은 여러분을 도와주실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이 있으세요! 여러분을 사랑하신 예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지 않으시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주변에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져 근심하고 있는 분들이 있나요? 여러분이 그들에게 찾아가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드리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듣고 경험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웃들에게 전해 주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행해야 하는 이유는 기쁨의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아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