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碑木)’ 독창기(獨唱記)
이원우
83 『한국수필』 여름호 천료‧ 97 『한글문학』 소설 신인상,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소설가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 역임,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 저서 수필집 15권‧ 소설집 6권‧ 기타 3권, KNN문화대상‧ 화쟁포럼문화대상‧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문예시대』 문학대상· 경기PEN 문학대상· 부산PEN문학대상· 부산수필대상· 경기문학인회 문학대상· 표암문학 대상‧ 한국전쟁문학상‧ 부산북구문학대상 등
팔순(八旬)을 넘기고 한 해가 후딱 지나갔다. 내일모레면 여든한 살이 되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이 모두가 꿈이었나? 경망스럽게 들릴 표현을 쓰고 보니 겸연쩍다.
노래와 더불어 지낸 한평생이었다. 그 노래는 기어코 내 삶의 끝자락에까지 따라와, 마감의 의미를 같이하는 반려(伴侶)로 자리매김을 하려 든다. 어찌 끈질긴 인연이 아니라 하랴! 노래는 숱하디숱한 일화(逸話)들을 내 주변에서 엮어냈었다. 몇 가지만 들먹여 보자.
밀양 시내에서 교사로 근무할 당시 교원예능경진대회라는 게 있었다. ‘시대회(市大會)’에서 최우수로 입상한다 치자. ‘도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주고 그 결과에 따라 승진에 필요한 점수까지 부여하는 매력적인 행사였다. 나는 거기 단골이었다. 그때마다 국악 성악으로 시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마산(馬山)의 어느 초등학교 강당에선(도 대회) 번번이 낙루를 삼켰다. 그런데 그게 평생 민요로 큰소리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세월이 흐른 뒤, 나는 21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무료 노인학교를 매주 토요일 운영하며 민요를 가르쳐 왔으니 말이다.
나아가 그로 말미암아 속악(俗樂)인 민요와 어긋난 개념일지 모르는, 정악(正樂) 시조창과 가까워졌으니 세상사 참으로 종잡을 수 없다 하겠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시조창 감상’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게 내게서 비롯되었음은 알 사람은 안다. 고인이 된 YS의 결심이 한몫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양산시 교원예능경진대회를 어찌 아니 들먹이랴. 초 중등 교사 교감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거기서도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출사표를 또 던졌다. 이번엔 가곡 성악…. 호랑이 앞에 웃통을 벗거나, 누구 상대로든 겁 없이 덤비는 무뢰한을 닮아서였을까?
아무튼 거기서도 입상은 했다. 최우수는 중학교 음악 교사였고, 우수상 없는 장려상을 나와 내 선배가 받은 거다.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는 사실, 출전자가 단 3명이었다는 점. 그래도 인사기록 카드에 버젓이 기록하고 다녔으니, 허풍쟁이의 정체성은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나는 군부대에 출입하게 된다. 거기서도 노래를 가르쳤다. 특히 군가를 계명창으로 선보인 게 돋보였다면 돋보였으리라. 3년 동안 마흔 시간여…. 물론 노래만 아니고 『명심보감』이나 등을 해설하기도 했지만, 가곡과 대중가요로도 그들과 어울렸다는 뜻이다.
노래 모두가 내게는 감격의 역사 자체인지 모른다. 특히 근래에 현충원에서 영령(英靈)들과 함께 떼창(-唱)을 쏘아 올릴 때는,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자책(?) 혹은 착각에 빠질 만큼 숙연한 느낌도 든다. ‘전선야곡’이나 ‘현충일 노래’, ‘전우야 잘 자라’, 가고파‘ 등등을 녹화하여 유튜브에 올렸으니,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장담하자. 거기에서의 노래엔 장르가 없다. 해서 ‘아리랑’을 필두로 ‘밀양아리랑’, ‘신고산타령’ 등도 머지않아 목청에 실을 계획이다. 통일되면 영령들과 부를 남북민요 셋, 내가 선곡한 거다.
눈물을 뿌리지 않고 배길 수 없음을 고백한다. 거기에 남다른 흔적을 남기는 중인 나는 이번 현충일에는 ‘6·25 노래’, ‘전선을 간다’, ‘육군가’ 등을 들고 간다. ‘공군가’, ‘해군가’, ‘해병대가’는 내 기준으로선 불합격(?)이다. 가사에 ‘죽는다’가 ‘싸워 이긴다’보다 많으니, 경악한다는 뜻이다. ‘죽어도 또 죽어도’,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 ‘넋을 저 하늘에 뿌린다’? 얼토당토않다! 해서 ‘안 죽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로 고칠 걸 요로에 진정 중이다.
그러던 중 나는 일생일대의 은인을 만난다.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 선생님이다. 서로 스마트폰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3년 됐다. 첫마디로 내가 건넨 건, 그 국민 가곡을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한번 독창해 보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한갓 장삼이사인 내가 드리는 말씀을 그분은 진지하게 듣는 눈치였다. 나는 양해를 얻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거두절미하고 ‘비목’의 몇 마디를 불렀다.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그러고 또 아는 척, 4/4박자니까 ‘강 ‧ 약 ‧ 중강 ‧ 약’을 염두에 두고 밤낮으로 ‘비목’을 부르며 산다고 덧붙였다. 이윽고 오케이 사인을 그분이 보내 주었다.
한데 코로나가 번번이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그런 중에서도 전쟁문학회 H 회장이 사정을 알아보고 일정을 조율하여 녹화를 주선해 줬다. 덕분에 바로 난 며칠 전 그분을 찾아뵙고 손을 잡은 채 문자 그대로 ‘독창’을 할 수 있었던 거다. 경상도 사람 특유의 오류-‘어’와 ‘으’ 발성 시 구형(口形)이 잘 잡히지 않음-를 눈치채고 적이 당황했다. 그래도 강행군했다. 끝나자 그분은 분에 넘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나흘 지나서 만든 영상을 내 유튜브 <돌아온 李 下士>에 싣고 내보낸다. 조회 수 확인에 바쁘겠지. 하사 계급 군복 차림인 가수(歌手)인 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십 년이 흘렀구나.
창작 후기/
한명희 교수님과 홍중기 회장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을 거다. 본문에 서술할 수 없어 섭섭하다. 두 분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문학과 음악이 접목되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 새 식구인 내 유튜브 <돌아온 李 下士>를 활용하여 겨레와 나라 위해 살다가 ( )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소릴 들어야 한다. ( ) 속에 들어갈 말로는 '현충원' 혹은 '군부대'가 되리라.
*수필 전문지에 곧 발표할 拙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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