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1절 – 4절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하듯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나라의 말씀 즉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그 십자가의 복음위에 교회가 세워지길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하신 하나님나라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걸려넘어지는 것과 거치는 것이 된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마음의 중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외적인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들이나 또는 이사야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정성이 가득한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거치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리새화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은 듣는 자나 전하는 자 모두에게 거치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듣고자 하는 즉 교회의 회복을 바라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부드러운 설교 즉 귀에 듣기 좋은 설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고통이 수반되어도 십자가의 복음을 향한 갈증과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의 신앙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 세상의 권세들이 이기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때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에서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설교가 예비군정신교육장에서 해도 전혀 문제없이 웃으면서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도덕훈화수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의 복음은 주께 받은 것으로서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들 즉 외양의 경건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헬라인 즉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일행은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하고 마게도니아의 다른 지역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떠납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도착하게 된 지역이 마게도니아의 교통의 요충지이며 큰 도시 데살로니가입니다. 그곳에서 사도바울일행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양육합니다. 바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유대인들이 듣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을 듣자 분노하며 핍박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지역에 십자가의 복음의 씨를 뿌립니다. 씨가 뿌려졌을 때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인식되지 않습니다. 육개월 후 사도바울일행은 이 데살로니가교회를 떠납니다. 평신도들만 남은 그 교회가 없어지거나 무능력화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 싹이 나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는 자들과 받은 자들의 자세 즉 태도를 말하여 줍니다. 사도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교회에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부드러운 말이나 기교있는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이 세상적인 판단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 데살로니가교회에 역사하셔서 교회가 성장하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