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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욥기의 말씀 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것은 그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임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이는 이미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의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섣부른 찬미가>
오늘 욥은 자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제 자신의 재산과 종들과 가족을 다 잃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그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욥의 고통이 한층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층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두 층, 세 층이 더 커진 때문입니다.
어제 얘기에서도 욥의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먼저 소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양과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낙타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다 죽었지요.
이때까지는 하느님이 주셨던 것 하느님이 가져가시니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라고 하느님 찬미를 합니다.
이것만도 사실 하느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소유물에게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탄이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욥은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고통을 실제로 겪게 되면 욥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의 죽음보다 내 몸의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이고, 너의 다리 절단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픕니다.
그러므로 찬미하던 욥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저를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숙제처럼 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번도 저의 출생과 인생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 빼고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한 번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니 이런 제가 고통이니 사랑이니 감사니 찬미니 얘기하는 것이 어쭙잖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나 지병을 앓는 분들 앞에서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인생이 뭔지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제이기 때문에 인생을 운운하고 저보다 더 크고 더 긴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니 격려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주를 볼 때 어제 욥의 찬미는 섣부른 찬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욥처럼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볼 때 저의 사랑 찬가나 하느님 찬미는 욥의 찬미보다 훨씬 더 섣부른 찬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섣부른 찬미가에서 성숙한 찬미가가 될 수 있도록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도 못하는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 비록 이 섣부른 찬미가인 제가 저 스스로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더 큰 고통을 제게 주실 때 잘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품을 키워야 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 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을 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루카 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예수님께서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가 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대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분노는 칼과 같아 쓰는 법에 따라 의사도 되고 강도도 된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 (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피해자의 고통과 그것에 비해 약한 처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가서는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마가 되어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보복하면 딸이 살아날까요?
그리고 그 보복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해 행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식의 분노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어 나중엔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죄 안 지었냐?”
부모가 화가 많으면 자녀도 화가 많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방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금자 씨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다가온 목사님에게 금자 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적할 때 “그러면 너는?”이라고 자동으로 질문합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는 절대 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분노를 터뜨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메스를 들었다고 다 의사가 아닙니다.
마구 휘두르면 강도이며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화를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릅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할 때,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들을 고치려는 의사의 분노였습니다.
성전 전체가 아닌 성전을 더럽히는 탐욕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전체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안의 사탄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그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의사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 수술을 받아들이면 고쳐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의 분노를 터뜨리는지 강도의 분노를 터뜨리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탄에게는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화를 내도 되고 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전체에 대해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분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자에게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그렇게까지 이끈 사탄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우리가 화를 터뜨릴 대상은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사탄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도시와 같아서 사람 전체에 분노하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하느님은 그 안에 살던 롯의 가족은 빼내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좋은 것도 분명 들어있는 사람 전체에 분노하지 맙시다.
그러면 의사가 아닌 강도로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저는 젊은 사제 시절 주로 아동 보육시설에서 담당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넘쳐날 때였습니다.
여기저기 아동 입소 문의가 들어오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니다.
각 집에는 아이들로 넘쳐나고, 더 이상 안 되지, 하다가도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 또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사정사정하면서 아이들을 입소시켰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도 비슷한 일, 아니 몇백, 몇천 배 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던 스산한 겨울밤, 가난한 도시의 뒷골목 쓰레기 더미 위에는 수시로 갓난아기들이 버려졌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신부님은 양심상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숱한 밤, 아이들을 챙기러 밤거리를 헤매 다니셨습니다.
아이들 보육을 담당하던 수녀님은 안 그래도 꽉 찼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시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신부님이 못마땅해 구박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또 주워 오시면 어떡해요?”
심한 흉년과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17세기 초, 신부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습니다.
정부 관계 부처를 수시로 찾아가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던 가난한 형제들을 살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해있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씨앗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집 지을 자재를 구해다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열거해보면 마치 거짓말 같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한 인간이 어떻게 이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토록 훌륭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느님 앞에 늘 되풀이하셨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몸을 주님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한번은 빈첸시오 신부님이 노예선의 지도 신부로 사목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발목과 팔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정신없이 노를 젓는 죄수들의 모습은 빈첸시오 신부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죄수들의 생활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닿은 피부는 벗겨져 항상 피가 흘렀습니다.
그들의 어깨와 등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채찍 자국들이 굵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마에는 죄수임을 표시하는 쇠도장이 찍혀있었습니다.
자신도 직접 몸으로 노예 생활을 체험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셨기에 그런 죄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잔인무도한 간수들을 타일러 매질을 못하게 했었고,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어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치료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의 내면에 자비의 목자 빈첸시오 신부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그들과 함께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십시오.
그들의 비참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그러면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분을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정의와 자비>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심부름꾼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임무는 예수님과 일행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잠을 잘 곳을 미리 정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심하게 모욕하고 박해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폭력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사마리아인들의 반감과 적대감이 종교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생활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관계였는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박해를 받는 쪽의 적대감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을까? 몰랐을까?
몰랐다면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거부한 것이고, 반대로 알았다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한 셈이 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을 믿은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요한 4,39-41)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도 있었으니 ‘모든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모든 마을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한 일이 더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추면,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이냐, 유대인들의 마을이냐?’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 됩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는 바로 뒤에 나오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라는 말씀이 ‘실제 상황’을 나타내는 말씀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두 사도의 말은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라는 뜻입니다.
두 사도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두 사도의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과 복수심이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또 ‘천벌’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지 사람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천벌을 내리자고 건의하는 두 사도를 꾸짖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냥 다른 마을로 가신 것은 그 마을 사람들도 언젠가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또는 회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태 26,51-54)
예수님의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 아닙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힘이 없어서’ 참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악’을 참기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선’을 실현할 수 있는가?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렵고,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악에 맞서 싸우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도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많고, 하느님께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리시기를 바랄 때도 많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은 정의의 주님이시면서 동시에 자비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정의’와 ‘자비’가 모순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하느님 안에서 정의와 자비는 모순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자비는 정의를 통해서 실현되고, 정의는 자비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무자비한(자비 없는) 정의는 복수가 될 뿐이고, 폭력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정의 없는 자비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의와 자비가 모두 완전히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승리의 삶 - 우리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 시 평범한 응송과 마리아의 노래 첫구절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내 영혼을 고쳐 주소서,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참으로 육신에 앞서 우선적으로 건강해야 할 영혼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지 영혼이 육신의 욕망에 끌려가선 안됩니다.
죄로 인해 영혼이 상처입었을 때 즉각적인 회개를 통한 주님의 용서가 영혼 건강에 필수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영혼 건강을 위해 평소 하느님 찬송, 찬미, 찬양을 위한 자발적 항구한 노력과 실천이 제일입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혼란한 시대, 많은 영혼들이 죄로 인해 병든 시대입니다.
요즘 정치권에는 지록위마謂鹿爲馬 고사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뜻인즉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남을 속이려 할 때 쓰는 말이며, 윗사람을 속이고 권세를 휘두르는 자들을 비판할 때 쓰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진실의 승리가 아닌 거짓이,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진실의 승리입니다.
지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카차흐스탄 사도적 방문 후 귀국 중 기내에서의 인터뷰 중 다음 정치에 관한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예술입니다.
정치는 고귀한 직업입니다.
저는 교황 비오 12세인지 성 바오로 6세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정치는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의 하나’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낮은 수준의 정치가 아닌, 높은 수준의 정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정치는 국가를 무너뜨리고 궁핍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참으로 각계 각층 영적으로 뛰어난 진리의 사람들이 많이 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 말로 진리의 사도, 빛나는 영적승리의 상징입니다.
87세 고령에도 날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전사로서의 영적승리의 삶을 배웁니다.
“성가정이 너희에게 영감을 불어 넣도록 하라”, 여자 카푸친회 수녀님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샬롬(평화) 공동체의 젊은이들이여, 계속 창조적이 되십시오.” 로마 베드로 광장에 모인 샬롬(평화) 공동체 형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 뉴스에 식상하다가도 교황님 홈페이지의 뉴스에서 신선한 활력을 얻습니다.
오랜 시간 말씀 묵상하던 중 떠오른 강론 주제는 '영적승리의 삶-우리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였습니다.
가까이 두고 한참 찾다 발견한 느낌에 참 반가웠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의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단조롭고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놀라운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생각하면 수차례 인용했던 24년전 자작시 담쟁이가 생각납니다.
24년 후 오늘 강론에 인용하리라곤 당시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정주의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
- 1998.6.3.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는 해마다 하늘 향해 담벼락 타오르는 담쟁이들은 여전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영적전쟁의 삶도 이러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진리의 전사, 지혜의 전사 등 끝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의 욥의 영적전쟁 중 자기와의 싸움이 참 치열합니다.
어제 욥의 첫째 시련에 이어 설상가상 새로운 시련의 연속입니다.
오늘 말씀전에 나오는 욥의 아내와 욥과의 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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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흠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 2,9-10)
-
욥을 방문한 세 친구들 역시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욥의 넋두리를 통해 그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말 실감나는 욥의 독백의 탄식이요 기도처럼 들립니다.
생일을 저주하는 욥이요, 차라리 죽기를 소망하는 욥이요, 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가 토로하는 욥입니다.
“이제 탄식이 내 음식이 되고, 신음이 물처럼 쏟아지는구나.”
고백에서 보다시피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정말 자기 불행과의 처절하고 치열한 영적전투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끝까지 마지막 선은 넘지 않았으니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34년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욥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 대한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은 전혀 없었음에 감사합니다.
다만 답답하고 막막할 때는 하느님을 바라보듯 늘 거기 그 자리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마 요셉 수도원에서 저처럼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을 많이 바라본 수도형제도 없을 것입니다.
34년 하루하루 날마다 수없이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을 새로이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다음 복음의 장면에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의 씩씩하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파스카의 구원이 이뤄질 궁극의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하기 전 영적 전의를 새로이 하는 주님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이러한 원대한, 확실한 목표가 그대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본말전도의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성급한 다혈질의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길을 막는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시냐고 주님께 물었고, 주님의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영적전투의 현장에서 지도자의 신속한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습니다.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충돌을 야기하지 않고 지혜롭게 피해 가는 주님의 평화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성인들보다 더 좋은 하느님에 대한 증거는, 파스카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똑같은 하느님은, 파스카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성인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를 통하여 살아 활동하십니다.
주님은 날마다 새벽부터 제게 넘치는 은총을 베푸시어 강론을 쓰게 하십니다.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입니다.
16-17세기에 걸쳐 79세 천수를 누리며, 참으로 치열한 영적승리의 삶으로 주님께 월계관을 받은 프랑스 출신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성 빈첸시오입니다.
성인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위대합니다.
성인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와 ‘선교사제회’를 창설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그대로 온몸으로 실천했습니다.
성인의 영성은 ‘활동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로 요약되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성인은 어린이,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등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1660년에 선종한 성인은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의 의해 모든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성인의 영성을 이어 받은 사랑의 딸회, 사랑의 시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결론과 같은 물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답은 하나, 주님의 전사, 즉 평화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욥이, 성 빈첸시오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형제들과 함께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영적 전우들과 더불어,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으로서의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사제 모임에서 강사 신부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용서와 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신부님 한 분이 손을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용서와 화해가 둘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함으로써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먹구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용서함으로써 내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70년이 넘게 분단된 상태도 있는 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말다툼 끝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저의 목을 잡고 있었고,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혀서 울었고, 친구는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울던 우리는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저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고, 친구도 기가 풀려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화해는 이렇게 서로가 잡았던 것을 놓아야 시작됩니다.
어제 욥 성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용서함으로써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화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은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의 이치일지 모릅니다.
그래야 사회가 질서가 잡히고, 제대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분노와 심판은 잠시 평화를 줄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하여,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면 사람의 기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던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을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보내서 숙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사마리아 지역에서 환영받아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지내는 곳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은 그리짐산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가는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전례적인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격분해 못 참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함께 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비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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