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금강 가에서
봄이여!
하고 부르거나 생각만 해도 얼굴에 먼저 홍조가 피어 오르며 가슴이 훈훈해지는
그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데우면서 오고
그리고 남녘의 꽃 소식으로 오고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로 온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오겠지,
임이 안 오면 편지야 오겠지.’
노랫소리가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들려오는 어느 날
누군가가 그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봄날 아침이었네.
그가 와서 가자고 했네.
이마에는 해와 달이 부딪쳐 울고
안개 사이로
나무들의 연한 발목이 끊어질 것 같았네.
그가 가자고, 가자고 졸랐네.’
「봄날 아침」이라는 이성복 시인의 시 구절처럼
누군가 그대에게 봄이 오는 새벽 강가로 나가자고 하면
“어디로 가느냐” 묻지 말고 그냥 따라 나서라.
이윽고 도착한 강가에 다시는 새벽이 오지 않을 것처럼 칠흑같이 어둠이 짙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문득 그 어둠이 걷히면서 새벽은 어김없이 열리고,
모든 사물들이 하나하나 제 나름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그 시간을 강가에서 맞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풀잎들이 모두 이슬을 머금고, 나무들마다 싱싱하게 모든 사물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그리고 다음 순간 강에서 물씬물씬 피어 오르는 물안개가
마치 고여 있던 그리움의 강둑이 한꺼번에 터져서
여울져 흐르는 듯한 눈부신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아침 강변에 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면
강물은 쉬지 않고 서둘러 흘러서 가고
“시냇물엔 멈춰선 물길이 없다”는 옛말처럼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물어도 대답조차 없이 유유히 흘러서 갈 것이다.
그대도 그 강물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라.
어서 빨리 흐르라고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바다를 향해 아래로만 흐르는 그 강물은
그대가 유년시절 보았던 그 강물이 아니고
또 어제 보았던 그 강물 역시 아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흐르고 또 흘러가는 그 강물이
유장하게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망연히 앉아서
스스로를 돌아다보아도 좋으리라.
‘강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가
강물에 마음이 팔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흐른다’는 의미를 지닌 유流라고 하고,
강물에 마음이 홀린 사람이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잇닿는다’는 뜻을 지닌 연連이라고 한다.’ 는
『맹자』의 한 구절이 그 순간 가슴을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인간은 모두 유流이고 연連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실지도 모른다.
다시 발길을 옮기면 남녘의 강변에는 이미 만개한 버들강아지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눈부시게 피어난 매화꽃과 산수유꽃이 강산江山을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온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을 보지 못하고
아득한 좁은 길로 언덕 위 구름 있는 곳까지 두루 헤맨 끝에
돌아와 마침 매화나무 밑을 지나노라니
봄은 가지 머리에 벌써 와 있은 지 오래였다.’
간절히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잊어버렸을 때에도 온다는 봄을
온몸으로 느끼고 서 있는 그 시간에
이덕무의 글 한 편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소시부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을 적에는
사람들의 얼굴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지만,
해마다 화창한 봄날이 되면 문득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먼데를 관망하고 시와 술(詩酒)을 즐기게 된다.
이곳저곳을 거의 날마다 탐방探訪을 계속한 뒤에 말하기를,
‘일 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이 모춘暮春 10여 일에 불과하므로
이때는 헛되이 보낼 수 없다’ 고 하였으니,
그 활발하고 호매한 기상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지나고 나니 그때가 꽃 시절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어디 모춘 10여 일이라는 봄날만 그러할까?
소동파蘇東坡가 노래한
‘봄밤의 한 시간은 천금을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春宵一刻値千金, 춘소일각치천금]’
라는 시구의 의미나,
사람의 일생 중에 활짝 피어난 봄꽃 같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무르익은 봄 산천을 돌아다니다 보면
‘돌아보니 봄바람에 하나같이 꽃[回看春風一面花, 회간춘풍일면화]’이라는 시 구절이
왜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도 하고 시리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은 우수수 지는 꽃잎들을 모아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강 물결에 띄울 것이다.
두 뺨을 간지럽게도 하고 가슴을 후련하게도 하면서 스치고 지나가는 봄바람 결에
‘바람아, 바람아, 네 앞에서 나는 늘 눈앞이 캄캄해진다’
라고 노래한 박재삼 시인의 「바람 앞에서」라는 시가 살며시 눈앞을 가로막고
이 땅의 산천에 다시 어둠이 내릴 것이다.
흐르는 이 점차 커져가는 시간에, 조선시대의 혁명가이자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이여인이라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편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어젯밤 달빛은 낮처럼 밝아서 문 밖으로 산보散步를 나갔더니 안개 낀 버들이 무성히 우거졌고,
흩날리는 꽃이 옷에 닿아 유연히 봄의 정취가 사람을 요동시켰네.
늙은 중이 아니고서야 어찌 외롭게 혼자 앉아서 그냥 지낼 수 있겠는가.
자네의 집을 내려다보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라고는 없었네.
향기 그윽한 난방蘭房에서 원앙 이불에 꿈이 감미로울 것을 상상하니, 이때 이러한 즐거움도 역시 지극했을 걸세.’
별빛과 은하수의 하얀 포말이 강물에 부서져 내리는 어둔 강변을 저녁 내내 걸어도 좋지만
휘영청 달 밝은 밤, 시누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문풍지를 흔드는 깊은 한밤중에
왕안석의 「한밤중」이라는 시를 읊으면 긴긴 봄밤이 꽃향기와 그리움으로 넘쳐나 오래도록 잠을 못 이룰 것이다.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고 있네.
모래시계 또한 멈췄네.
하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네.
그건 달빛에 그림자를 벽에 드리운
떨고 있는 봄날의 꽃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라네.’
이백의 시 한편은 또 어떤지,
그대와 내가 만나자
산꽃들도 반가와 피네.
한 잔 들게, 한 잔 주게
또 한 잔 해지는 줄 모르고
나는 이미 취해서
풀밭에서 한 잠 자려고 하니
그대는 마음대로 갔다가
내일 아침 거문고나 안고 오게.
2024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