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우 뉴라이트 운동에 격려를 보내면서
“새로운 봄을 위하여”/ 이종섭: 시인(필명 ‘돌’)
우마차에 짐을 싣고 올라 타, 저 마을 아래 냇물이 흘러 물장구 치며 놀던 정든 곳을 떠났다.
구름처럼 떼지어 지나가며 하늘을 뒤덮던 폭격기 소리가 가끔씩 들리는 가운데서도 학교에 다니던
경순이 누나와 서로 손을 흔들어 아쉬운 안녕을 외치면서...
아마도 한국동란 1.4후퇴 때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보니 피난 객을 실은 경부선 완행열차 화물 칸에
콩나물처럼 모여 앉은 사람들에 기대어 졸다가 앞에 앉은 아저씨가 피우시던 담뱃불에
왼손 검지손가락이 데인 것이었다.
졸리운 나는 곧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큰형의 책을 베게 삼아 잠이 들 정도로 대단한 상처가
아니었음에도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음은 그 피난시절을 잊지 말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부산에 도착한 열차의 밑을 가로 질러가며 한참을 걸어 간 후 임시 육군병원 앞 어느 마을에 짐을 풀고 피난살이는 시작되었으나 전쟁을 의식하지 못하던 나의 일상은 즐거웠다.
철모르는 어린아이이기도 했지만 요즘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훈훈하고 따듯한 정이 도처마다 있었기 때문이라 기억된다.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거지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도 내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소리..
"밥 한술만 주이소, 야"
대문 앞에 나가면 궁핍한 피난살이였음에도 집집마다 거지를 위해 한 쪽 구석 따듯한 밥한 술을 내다
놓았었다.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육군병원의 간호원들과 서로 거울을 비치며 장난을 하고,
해가 중천에 이를 무렵 옆집 누나들과 그이를 잡으러 나갔다. 당시 그 곳에서는 게를 "그이"라고 불렀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골목을 지나면 돈을 모르는 어린 내가 마땅히 돈이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노점 좌판에서 빵을 팔던 아주머니는 빵 두 개를 넙죽 손에 쥐어 주며 나와 연년생인 셋째 형과 함께 먹으라 하셨다.
고맙단 인사도 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으므로 버릇이 없어 밉게 볼 수도 있었으련만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 아주머니는 빵을 주셨다.
부산의 국제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였지만 어디서든지 먹을 것을 주었으므로 당시 우리는 굶지 않았다.
초저녁 잠에서 깨어난 어느 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폭격기도 없는데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이따금씩 불기둥이 강하게 치솟아 올랐다. 그 유명했던 부산 국제시장의 대화사건이었으며 그로 인해 또다시 피난 도시는 수많은 이재민을 내었지만 우리는 모두 따듯한 정을 잃지 않았으며 대부분 견뎌 내었다 한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엔 가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곳 곳마다 폐허가 된 마을, 산속, 들판, 철길 할 것없이 군데군데 사람의 뼈와 구멍 뚫린 해골들이
묻히지도 못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날, 참혹했던 전쟁의 후유증과는 관계없는 듯 자가용 행렬이
신촌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앞 까지 수 킬로미터를 늘어져 있었다. 태어나서 나는 그런 별난 광경은 처음 보았다. 그 시대 동교동 우리 마을엔 자가용을 가진 집이 단 한 집도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얼마나 큰 부자들이 몰려왔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입학은 했지만 학교는 너무 멀었다.
마땅히 걸어다녀야 하므로 동교동 집에서 그 곳까지는 한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나 혼자만의 일인가. 내 위의 형들이나 또래의 시골 아이들은 수십 리씩 재를 넘고 내를 건너며 다녔다는데 그래서 그들에게는 책가방이 없었고 대신 책보가 있었다.
책과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감아 뛰고 또 뛰었다 한다.
봄이 되면 보리고개와 싸워야 했고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쓸쓸히 신음하며 죽어갔다.
목재소 앞을 지날 때면 길거리에 쓰러진 통나무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내고 속에든 노란 껍질을 또다시 벗겨 입에 넣고 씹었다.
또다시 찾아온 겨울, 땅거미가 짙게 물들자 어머님께서 땔감 나무를 해 오셨다.
배가 고팠지만 저녁은 하지 않고 갑자기 1원짜리 지폐 몇 장을 주시면서 밀가루를 사오라고 하셨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아, 이젠 칼국수라도 끓여 먹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그 돈을 주고 산 밀가루는 혼자 먹어도 부족할 만큼 양이 적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힐끔힐끔 유심히 어머니의 행동을 훔쳐보는데,
시간이 갈수록 얼어붙는 내 마음 속 가느다란 희망은 그나마 하나 둘 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무에 불을 지펴 솥에 물을 붓고는 이어 금 쪽 같이 아까운 밀가루로 풀을 쑤어 뚫어진 창호 문을 메워 바르는 것이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이제 1학년인 내가 혼자만
울 수는 없었다. 그 날 그렇게 굶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식구들이 깨워 일어나 보니 향긋한 냄새, 칼국수가 상에 올아 와 있었다.
인쇄소에 다니시던 둘째 형이 월급을 타 밀가루를 샀지만 야간학교에 다녀오느라 이제야 돌아왔던 것이었다. 몇 시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앞에 놓인 칼국수만이 문제였다.
너무 적은 양이었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할머님은 입맛이 없으시다며 국물만 조금 드셨을 뿐 그대로 남기시었다. 나중에 커가면서 알았지만 나이드신 할머님이시라고 굶주린 후 입맛이 없으실 리 없다.
남기셔야 우리들이 먹을 텐데 아들인 아버지께서 뭐라 하시니 핑계 삼아 입맛이 없다 하셨다.
당시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남은 칼국수를 염치없이 다 먹었고 그래도 별로 풍족하지 못했지만
또다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 날 꿈속에서 나는 아주 즐거웠다. 무척이나 개를 좋아하던 나에게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신 큰형께서 커다란 훈련 견 한 마리를 데리고 오신 것이었다.
나는 함께 뛰고 또 뛰었다. 개도 나를 좋아하여 즐거운 표정이 역력하였다.
아침, 꿈에서 깨어난 나는 아버지께 물었다.
"큰형 언제 오시나요?"
멍청한 나는 개를 기다리며 물었지만, 아버지는 형을 걱정하는 것으로 아시고 대견하다는 듯 빙그레
웃으셨다.
우리는 이렇게 라도 지내면서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러나 당시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가는 국민들이 부지기수였고 어떤 이는 배가고파
쓰레기통을 뒤져 남이 버린 복어 알을 끓여 먹고 일가족이 모두 죽어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였다.
비록 전쟁이 끝났다지만 우리 사회는 결코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갈 곳 없는 수 많은 상이군인들은 거리를 난무하며 활개치고 다녔지만
나라에서는 어찌할 방법조차도 강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맹서"를 계속 외워야 했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두만강 수에 전승의 칼을 씻자.
그러면서도 부패한 공무원들은 권세를 누리며 양민을 괴롭혔고 미미한 인권조차도 허용되지 않던
군대에서는 맞아 죽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으며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혼란만 가중시켰다.
떠드는 말과는 달리 굶어 죽는 국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권싸움에 난리를 치더니
결국 4.19가 터졌다.
그러나 정치깡패는 날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으며, 장면 총리는 새로운 국가재건과 경제계획을
추진했지만 무능한 정부를 따를 자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데모만능주의는 국민들 스스로 까지 의욕을 잃고 타락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1961년 5.16 군사혁명 또는 쿠테타.
우리 이전 세대들은 5.16을 혁명이라 불렀고 지금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대다수의 국민들이 군사
쿠테타를 환영하였다. 바로 혁명공약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어른들의 대화내용은 어디를 가나 내 기억으로 그랬었다.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 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다.
물론 반대론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대개 부패한 공무원, 정치인, 돈 많은 부정축재자들과 그의 가족 또는 친척들이었다. 항상 그러하듯이 그 외 학생과 일부의 지식인들도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었음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누군가가 나서서 진저리나는 혼란을 잠재워 주고 서민이 아부하지 않고 살 수 있게끔 부정부패를 때려부수고 경제를 부흥시켜 기아선상에서 해방되기를 무엇보다도 원했던 것이다.
지금의 전후세대들은 결코 전쟁의 참상과 그 후유증, 그리고 기아선상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궁핍한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러한 시대적 사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라, 세계 최빈국이었으므로 필리핀을 동경하고 아르헨티나를
부러워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선언했다.
"북, 남의 경쟁은 끝났다. 북조선의 국민소득은 남조선의 몇 곱절, 이제 붉은 통일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북한 헌법은 "4대 군사노선"을 국가적 수행과제로 명문화하였다.
1. 전 군의 간부화
2. 장비의 현대화
3. 전 인민의 무장화
4. 전 국토의 요새화
김일성의 붉은 통일은 두말 필요없이 군사력에 의해 남한을 피바다로 만드는 통일이였다.
드디어 미국마저 우방 한국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국민은 자의적으로 민주주의를 시행할 수 없는 국민으로서 경제회생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5.16은 쿠테타이면서도 혁명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청치깡패를 처형했으며, 행형법(行刑法)에서 형무소는 교도소로 바뀌어 갱생을 강력
추진하였다. 모든 생활양식과 개념들이 뒤바뀌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신념, 수 많은 어려움을 우리는 극복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뉴딜정책과
TVA 댐 사업을 연구하였고, 한강의 둑에 리어카로 흙을 퍼 날라 가며 고질적인 홍수를 막았으며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심지어 여성이 빗고 남은 머리카락까지 모아서 수출하였다.
수출 드라이브정책은 보기 좋게 성공하였으며 농촌에 비닐하우스가 들어서면서 농촌의 겨울이
노는 것으로 알려졌던 사고는 변하기 시작하더니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자신감을 얻은 국민들은
집집마다 희망가가 마을마다 풍년가가 울려 퍼졌다.
한편 1967년, 중동에서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전운이 감돌았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분쟁...
당시의 군사형세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약세였다.
아랍은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이 흔들리는가 싶었지만,
당시의 해외 나가 있던 이스라엘 국민은 귀국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었고,
반대로 아랍국의 국민들은 해외로 도망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이스라엘에서는 악명 높던 외 눈의 다얀이 전격적으로 국방상에 올랐다. 며칠 후 새벽녘, 돌처럼
단결된 이스라엘은 기습적으로 단행된 군사작전개시로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초토화 시켰으며
불과 일주일 만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채 전쟁은 끝나 버렸다.
이것은 오로지 이스라엘 국민의 단결이 만든 작품이었지만,
우리 나라의 실정도 당시로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감히 장담하거니와, 당시 우리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해외의 우리의 젊은 이들은 귀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용감한 우리의 젊은이들은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는 자유월남을 돕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흘린 피의 댓가는 국부를 튼튼히 하였고,
기업의 기술자들은 사나운 열사의 바람을 맞으며 중동의 모래밭을 개척했으며,
국내에서는 "차 없는 나라에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가는 길을 뚫다가 망한다."며 선동만 일삼던
몰지각한 정치인과 일부 지식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를 설치하여 산업을 뒷바침하였다.
동맥이 뚫린 국토에는 1973년, 1978년의 두 차례에 걸친 아랍국의 석유무기화로 인해 위기를
맞았지만 우리는 더욱 단결하여 위기를 기회로 활용함으로써 북한과의 경쟁에서 경제에 관한 한
까꾸로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우리가 부러워하던 필리핀, 아르헨티나는 우리를 부러워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옛날이 언제였느냐는 식으로 그들을 멸시하였고, 이제는 가정부로,
공장 노동자로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합심 단결하여 열심히 일한 결과 우리 숙원의 하나인 산림녹화사업에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단기간 내에 성공하기 시작했으며 날로 국력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나라나 산림녹화 등 자연의 복구사업성공은 국력의 성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바탕이 되는 사업이며 수익이 현금으로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순수한 투자사업일 뿐 아니라 국민들의 이기주의 포기 등
국민화합없이는 불가능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여러 곡절이 있어 다시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너무나도 빨리 달려온 세월,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곳 곳마다 자연은 흉칙하게 파괴되고있으며
독재라 일컫던 6, 70년대 시절 급격히 줄어들던 부정부패는 갈수록 지능적으로 진화하면서
확장일로에 있으며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관계는 반목을 넘어 전투적
감정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지역과 단체의 이기주의는 극에 달하여 노인복지시설이나 장애인 수용시설이 혐오시설로 인식 된지
오래다.
사회적 분위기는 냉정하기만 하고 도처에 붉은 깃발이 펄럭이며 붉은 띠가 난무하고 있으며 기업은
해외로의 탈출을 사업목표에 우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노숙자 등의 갱생대책은 찾아볼 수도 없고
사회의 온정은 형식적 입막음으로 변하고 있다.
만약 지금 어떤 전쟁이 발발한다면 아마도 국외로 빠져나가는 비행기표는 순식간에 동이나 버리고
말 것이라는 예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외국인은 우리를 비꼬왔다. "민주화는 정치에 뜻을 둔 사람, 정권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따라서 이 시대의 겨울은 어느 때 보다도 추울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이겠지만 결코 그것이 먼저는 아니다.
과거의 예로 볼 때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일치된 단결력과 따듯한 온정의 회복이었다.
1970년대 초,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어느 나환자 촌에 들러 진물이 줄줄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려 산도 울고 바다도 울었다 한다.
이는 죽음의 나날을 달리던 환자들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재활의 힘이 되었다.
지도급 인사나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뿌린다 해도 효과가 없다.
우리는 추운 겨울, 한 번쯤 우리의 지난날을 왜곡없이 돌아보는 것도 새로운 봄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려웠지만 나누어 먹고, 입고, 쓰던 부산의 피난시절, 재건의 깃발아래 땀 흘리던 시절들, 그것은 또 하나의 되돌아가고 싶은 향수인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이종섭(필명: 돌)
월간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월간 문학세계 수필 부문 신인상 수상/월간 모던포엠작가회원, 문학넷(문학세계<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내용이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