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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28회
잠시 후, 멀리서 병거 한 대가 달려오고 있는데, 가죽 관을 쓰고 명주 전포를 입은 장수의 모습이 아주 흉맹하였다. 난영(欒榮)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가 비표(斐豹)로서 독융(督戎) 장군을 죽인 자입니다. 저놈을 쏘십시오!”
난악(欒樂)이 말했다.
“백보까지 접근해 오면 쏘겠다. 그때 너는 박수나 쳐라.”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또 다른 한 대의 병거가 곁을 지나갔는데, 난악은 그 병거를 탄 자가 범앙(范鞅)임을 알아보고 생각했다.
“범앙을 쏘아 죽이는 것이 비표를 죽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난악은 병거를 몰아 범앙을 추격하며 화살을 날렸다. 난악의 화살은 지금까지 백발백중이었는데, 이번의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범앙이 고개를 돌려 난악을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꾸짖었다.
“반적(反賊)아! 죽음이 네놈 머리 위에 다가왔는데, 감히 나에게 활을 쏘느냐!”
난악은 병거를 돌려 달아났다. 범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쏜 화살이 범앙을 맞히지 못했기 때문에, 범앙이 추격해 오도록 유인하여 활을 쏠 기회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난악이 활을 잘 쏘아 성공할 것을 염려하고 있던 식작(殖綽)과 곽최(郭最)가 난악이 달아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난악이 패했다!”
난악의 병거를 몰고 있던 어자가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아군 부대가 패했다는 말인 줄 잘못 알아듣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말고삐를 놓치는 바람에 병거바퀴가 길 위에 뻗어 나온 큰 홰나무 뿌리에 걸려 전복되고 말았다. 난악이 병거 밑에서 막 기어 나왔을 때, 비표가 달려들어 화극으로 내리쳐 그의 팔꿈치를 끊어 버렸다. 가련하게도 난씨 종족 제일의 맹장이었던 난악이 홰나무 아래에서 이렇게 전사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猿臂將軍射不空 원비(猿臂)장군의 화살은 한 발도 빗나간 적이 없었는데
偏教一矢誤英雄 그 화살 하나만 빗나가 영웅을 그르치게 만들었네.
老天已絕欒家祀 하늘이 이미 난씨의 제사를 끊으려고 하였으니
肯許軍中建大功 어찌 군중에서 큰 공을 세우도록 용납할 수 있겠는가?
[‘원비(猿臂)’는 ‘원숭이의 팔’이라는 뜻으로, 팔이 길고 힘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난영(欒榮)은 병거가 전복되기 전에 뛰어내렸는데, 감히 난악을 구하지 못하고 급히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식작과 곽최는 齊나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곽최는 秦나라로 달아나고 식작은 衛나라로 달아났다.
난영(欒盈)은 난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 군사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난방(欒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병력을 거두어 난영을 보호하면서 남쪽으로 달아났다. 순오(荀吳)와 범앙이 병력을 합쳐 추격하였다.
난방은 곡옥(曲沃)의 병사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晉軍을 무수히 죽였다. 晉軍은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난영과 난방 역시 중상을 입고 남문에 당도했는데, 위서(魏舒)가 병력을 거느리고 가로막았다. 난영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위백(魏伯)은 예전에 하군(下軍)에서 함께 일했던 날을 기억하지 못하시오? 난영이 필시 죽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위백의 손에 죽을 줄은 몰랐소이다!”
위서는 차마 난영을 죽일 수 없어, 군사들을 좌우로 비키게 하여 난영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난영과 난방은 패잔병을 이끌고 급히 곡옥을 향해 달아났다.
잠시 후, 조무(趙武)가 당도하여 위서에게 물었다.
“난영이 이곳을 지나갔을 텐데, 왜 추격하지 않았소?”
위서가 말했다.
“그는 부중지어(釜中之魚)와 같고 옹중지별(甕中之鱉)과 같아 그 목숨이 요리사의 손에 달렸지만, 저는 선대의 동료 간 정을 생각해서 차마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습니다.”
[‘부중지어(釜中之魚)’는 ‘솥 안에 든 물고기’라는 뜻이고, ‘웅중지별(甕中之鱉)’은 ‘독 안에 든 자라’라는 뜻인데, 목숨이 궁지에 몰린 것을 말한다.]
조무도 측은한 생각이 들어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범개(范匄)는 난영이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고, 위서가 인정을 베푼 줄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개가 범앙에게 말했다.
“난영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곡옥의 군사들이니, 필시 곡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저들의 발톱과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려야 한다. 너는 일군을 거느리고 가서 곡옥을 점령해라.”
순오가 함께 가겠다고 청하자, 범개가 허락하였다. 범앙과 순오는 병거 3백승을 거느리고 가서 곡옥을 포위하였다.
범개는 진평공(晉平公)을 모시고 공궁(公宮)을 돌아가, 관노(官奴) 명부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하여 비표 덕분에 20여 집안이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범개는 비표를 아장(牙將)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제장공(齊莊公)은 난영을 晉나라로 보낸 후, 대군을 일으켰다. 왕손 휘(揮)를 대장, 신선우(申鮮虞)를 부장, 주작(州綽)과 형괴(邢蒯)를 선봉, 안리(晏氂)를 합후(合後)로 삼았다. 가거(賈舉)와 병사(邴師) 등은 어가를 호위하여, 길일을 택해 출병하였다.
齊軍은 먼저 衛나라를 침공하였다. 衛나라는 도성인 제구성(帝邱城)을 굳게 지키면서 감히 출전하지 않았다. 齊軍은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제구성 북쪽으로 돌아 晉나라 국경을 침범하였다. 조가(朝歌)를 포위한 지 사흘 만에 함락하였다.
[제46회에, 제환공이 위문공(衛文公) 때 북적의 침략을 받은 위나라를 구원하고 초구(楚邱)에 도성을 쌓아 주었는데, 앞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위성공(衛成公) 때 제구로 천도하였다.]
제장공은 조양산(朝陽山)에 올라가 군사들을 호궤하고,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왕손 휘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전대가 되어 왼쪽 길을 취하여 맹문애(孟門隘)로 진격하고, 제장공은 용작(龍爵)과 호작(虎爵)을 거느리고 후대가 되어 오른쪽 길을 취하여 공산(共山)으로 진격하여, 태항산(太行山)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齊軍은 가는 길에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제125회에, 제장공은 용사들로 구성된 용작(勇爵)이라는 계급을 만들었는데, 제126회에, 난영을 따라 제나라로 온 주작과 형괴를 영입하면서 용작(龍爵)과 호작(虎爵)으로 나누었다.]
형괴는 공산 아래에서 노숙하던 중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제장공은 몹시 애석해 하였다. 며칠 후 齊나라 양군은 태항산에서 만났다. 제장공은 산에 올라가 晉나라 도성 강성(絳城)을 내려다보며 기습할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난영이 패전하여 곡옥으로 달아나고 晉侯가 대군을 일으켜 곧 당도할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장공이 말했다.
“내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구나!”
장공은 소수(少水)에서 군사를 열병한 다음 齊나라로 귀국하였다. 그때 한단(邯鄲)을 지키던 晉나라 대부 조승(趙勝)이 군사를 거느리고 齊軍을 추격하였다. 장공은 晉나라 대군이 곧 당도할 것을 염려하여 전대를 거느리고 서둘러 회군하면서 안리만 남겨 뒤를 끊도록 하였다. 안리는 조승에게 패전하여 참수 당하고 말았다.
[제114회에, 조삭이 도안가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조승은 자신의 식읍인 한단에 있다가 송나라로 달아났었는데, 제118회에 진도공(晉悼公)이 조승을 불러들여 한단 땅을 돌려주었었다.]
한편, 범앙과 순오는 곡옥을 한 달 넘게 포위하고 있었다. 난영은 여러 번 출전하여 싸웠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성중의 군사들은 태반이 전사하였고, 힘이 다하여 더 이상 성을 지킬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곡옥성이 함락되자, 곡옥의 수장(守將) 서오(胥午)는 자결하고 난영(欒盈)과 난영(欒榮)은 사로잡혔다.
난영(欒盈)이 말했다.
“내가 신유(辛俞)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제126회에, 가신 신유가 난영에게 晉나라로 쳐들어가지 말라고 간하다가, 난영이 듣지 않자 자결하였다.]
순오가 난영을 함거에 가두어 강성으로 압송하려 하자, 범앙이 말했다.
“주공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 만일 난영이 애걸하면 살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원수를 놓아주게 됩니다.”
범앙은 밤중에 사람을 시켜 난영(欒盈)을 목 졸라 죽이게 하고, 난영(欒榮)도 죽였다. 그리고 난씨 종족을 몰살했는데, 난방만 밧줄을 타고 성을 탈출하여 宋나라로 달아났다.
범앙과 순오가 회군하여 승전을 아뢰자, 평공은 난씨의 반역을 평정한 일을 제후들에게 널리 알렸다. 제후들은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賓傅桓叔 난빈(欒賓)은 환숙(桓叔)의 스승이었고
枝佐文君 난지(欒枝)는 문공을 보좌하였다.
傳盾及書 난돈(欒盾)과 난서(欒書)에 이르기까지
世為國楨 대대로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黶一汰侈 난염(欒黶)에 이르러 사치가 극심하여
遂墜厥勳 훈신(勳臣)의 반열에서 빠지게 되었다.
盈雖好土 난영(欒盈)이 비록 선비를 좋아했지만
適殞其身 운이 다하여 목숨을 잃었도다.
保家有道 집안을 지키려면 법도가 있어야 함을
以誡子孫 자손들에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범개는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조무가 대신하여 중군원수가 되었다.
한편, 제장공은 晉나라를 정벌하려다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그 뜻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齊나라 국경에 당도하자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면서 말했다.
“평음(平陰) 전쟁 때, 거(莒)나라는 晉軍의 향도(嚮導)가 되어 우리 齊軍을 기습했었다. 그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제123회에, 제영공(齊靈公)이 평음에서 晉軍과 싸워 패전했는데, 그때 거나라뿐만 아니라11개국이 晉軍에 가담했었다.]
제장공은 국경에 머물면서 병거를 모두 모았다. 주작과 가거 등에게 각각 병거 5승을 하사하여, ‘오승지빈(五乘之賓)’이라 불렀다. 가거가 임치(臨淄) 사람 화주(華周)와 기량(杞梁)의 용맹을 칭찬하자, 장공은 그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장공은 두 사람을 만나본 뒤, 병거 1승을 하사하며 함께 타고 나가서 공을 세우라고 분부하였다.
화주는 물러나오며 기분이 좋지 않아, 기량에게 말했다.
“주군이 오승지빈이란 것을 만든 것은 그들의 용맹 때문이고, 우리 두 사람을 부른 것도 역시 용맹 때문이었소. 그런데 저들에게는 한 사람에게 병거 5승을 주면서 우리 두 사람에게는 1승을 주니, 이는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오. 차라리 사퇴하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어떻겠소?”
기량이 말했다.
“나에게는 노모(老母)가 계시니, 반드시 아뢴 다음에 행해야 하오.”
기량이 집에 돌아가 어머니께 아뢰자, 그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살아서 의로운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죽어도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네가 비록 오승지빈이라 하더라도, 누가 너를 비웃지 않겠느냐? 너는 근면해야 한다. 군명을 어겨서는 안 된다.”
기량이 어머니의 말을 화주에게 전하자, 화주가 말했다.
“아녀자도 군명을 잊지 않거늘, 내가 어찌 군명을 잊을 수 있겠는가!”
화주는 병거 한 대에 기량과 같이 타고 장공을 호위하였다.
제장공은 며칠 간 휴식을 취한 후, 왕손 휘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하게 하고, 제장공 자신은 오승지빈과 정예병 3천을 선발하여 함매하고 북을 울리지 않고 진군하여 거나라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화주와 기량이 선봉이 되기를 청하자, 장공이 물었다.
“그대들은 병거가 얼마나 필요한가?”
“신들은 홀몸으로 주군을 알현하였으니, 또한 홀몸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주군께서 하사하신 병거 한 대면 족합니다.”
장공은 그들의 용맹을 시험하고자 웃으며 허락하였다.
화주와 기량은 번갈아 가며 병거를 몰기로 하고, 출발에 임하여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만 더 있어서 차우(車右)가 되어 주면, 적의 일대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소졸이 나서며 말했다.
“소인이 두 분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화주가 물었다.
“너의 이름이 뭐냐?”
“저는 습후중(隰侯重)이라고 합니다. 두 분 장군의 의용(義勇)을 사모하여 기꺼이 따르고자 합니다.”
세 사람은 병거 한 대에 함께 타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매달고서 바람처럼 달려가, 거나라 교외에 도착하여 하룻밤 노숙하였다.
다음 날 아침, 거나라 여비공(黎比公)은 齊軍이 곧 당도한다는 보고를 받고,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친히 교외를 순시하다가, 화주와 기량이 탄 병거와 마주쳤다. 여비공이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화주와 기량은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쳤다.
“우리 두 사람은 齊나라의 장수다! 누가 우리와 결투하겠는가?”
여비공은 깜짝 놀랐으나 병거가 한 대뿐인데다 후속부대도 없는지라, 겹겹이 포위하였다. 화주와 기량이 습후중에게 말했다.
“너는 쉬지 말고 북을 계속 쳐라.”
두 사람은 창을 들고 병거에서 뛰어내려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면서 싸웠다. 거나라 군사 3백 명 중에 거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여비공이 말했다.
“과인은 이미 두 장군의 용맹을 잘 알았으니,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소. 장군들과 함께 거나라를 나누어 갖고자 하오.”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국을 떠나 적국에 귀순하는 것은 충(忠)이 아니며, 군명을 받고서도 어기는 것은 신의가 아니오. 적진에 깊이 쳐들어와서 많이 죽이는 것은 장수가 해야 할 일이니, 거나라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오!”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더욱 힘을 내 싸웠다. 여비공은 마침내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제장공이 도착하여 화주와 기량이 승전했다는 보고를 받고, 사자를 보내 말했다.
“과인은 이미 두 장군의 용맹을 알았으니, 다시 싸울 필요가 없소. 장군들과 齊나라를 나누어 가지겠소.”
화주와 기량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께서 오승지빈을 만드시고 우리를 거기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우리의 용맹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하신 것이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익을 말씀하심은, 우리의 행동을 모욕하는 것이오. 적진에 깊이 들어가 적군을 많이 죽이는 것만이 장수가 해야 할 일일 뿐, 齊나라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신들이 알 바 아니오.”
화주와 기량은 사자에게 읍을 한 뒤 병거를 버리고 도보로 거나라 도성의 차우문(且于門)을 향해 걸어갔다.
여비공은 좁은 길목에 도랑을 파고 숯불을 피우게 하였다.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니, 두 사람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습후중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고대의 용사들은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목숨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두 분이 도랑을 건너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습후중은 숯불 위에 방패를 깔고 그 위에 엎드려 두 사람이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화주와 기량이 도랑을 넘어가 뒤돌아보니, 습후중은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뒤였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소리 높여 울었다. 기량이 눈물을 거두고 보니, 화주는 계속 울고 있었다. 기량이 물었다.
“그대는 죽음이 두려운가? 왜 울음을 그치지 않는 것이오?”
화주가 말했다.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소? 저 사람의 용맹이 우리와 마찬가지인데, 그가 우리보다 먼저 죽었으니,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오.”
여비공은 두 장수가 도랑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사수(射手) 백 명을 문 좌우에 매복시키고,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 일제히 쏘도록 하였다. 화주와 기량이 성문으로 달려들자, 백 대의 화살이 동시에 쏟아졌다. 두 장수는 화살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워 27명을 죽였다.
성 위에 있던 군사들도 마구 화살을 쏘아댔다. 결국 기량은 화살을 맞고 죽었으며, 화주도 수십 대의 화살을 맞고 기력이 다하여 사로잡혔다. 여비공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화주를 성중으로 끌고 오게 하였다.
爭羨赳赳五乘賓 용맹한 오승지빈을 다투어 부러워했으니
形如熊虎力千鈞 그 형상이 천균을 드는 곰과 호랑이 같았다.
誰知陷陣捐軀者 누가 알았으랴,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친 자는
卻是單車殉義人 단지 병거 한 대로 달려가 순국한 의인(義人)들이었다네!
한편, 사자에게 보고를 받은 제장공은 화주와 기량이 죽을 작정으로 간 것을 알고,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차우문에 당도하여, 세 사람이 이미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장공은 크게 노하여 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때 여비공이 보낸 사자가 齊軍 진영으로 와서 사죄하며 말했다.
“과군은 다만 병거 한 대가 온 것을 보았을 뿐, 대국에서 보낸 장수인 줄 모르고서 잘못 죽였습니다. 대국의 전사자는 세 명뿐이지만, 폐읍의 사상자는 백 명이 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죽으러 온 것이지, 폐읍이 공격하여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과군은 군후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신을 보내 백배사죄(百拜謝罪)하게 하고, 대대로 齊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장공은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화평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비공은 다시 사자를 보내 화평을 구하면서, 화주와 기량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많은 황금과 비단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장공은 그래도 화평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홀연 왕손 휘로부터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晉侯가 宋·魯·衛·鄭 등 각국 제후들과 이의(夷儀)에서 회맹하여, 齊나라를 정벌할 모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공께서는 빨리 회군하십시오.”
장공은 급보를 받고, 거나라와의 화평을 허락하였다. 여비공은 많은 황금과 비단을 바치고 화주와 기량의 시신을 수레에 태워 돌려보냈다. 하지만 습후중의 시신은 다 타버렸기 때문에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장공은 그날로 회군하였다.
장공은 齊나라 교외에서 기량의 시신을 염하고 빈소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때 기량의 아내 맹강(孟姜)이 남편의 시신을 맞이하러 나왔다. 장공이 사자를 보내 맹강에게 조문하자, 맹강이 사자에게 재배하고 말했다.
“저의 남편이 만약 죄가 있다면 감히 주군의 조문을 받을 수 없으며, 만약 죄가 없다면 고인(故人)의 집이 있는데 어찌 교외에서 조문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장공은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과인의 잘못이다!”
장공은 위패를 기량의 집으로 옮기게 하고 다시 사자를 보내 조문하였다. 맹강은 성 밖에서 장례를 지내고 사흘간을 노숙하였는데, 관을 어루만지며 크게 통곡하니 나중엔 눈물이 모두 마르고 대신 피가 흘러내렸다. 홀연 齊나라 성이 몇 자나 무너져 내렸다.
후세에 秦나라 사람 범기량(范杞梁)이 장성(長城)을 쌓다가 죽었는데, 그 아내 맹강녀(孟姜女)가 겨울옷을 가지고 왔다가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통곡하여 성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齊나라 장수 기량의 이야기가 와전(訛傳)된 것이다.
화주도 상처가 심하여 齊나라로 돌아온 지 얼마 못 되어 죽었다. 그 아내의 애통함도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더했다.
훗날, 맹자(孟子)는 “기량과 화주의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너무나 슬피 통곡하였기에, 나라의 풍속까지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사관이 시를 읊었다.
忠勇千秋想杞梁 천추에 충용(忠勇)한 자는 기량이지만
頹城悲慟亦非常 성을 무너뜨린 비통함도 범상치는 않았네.
至今齊國成風俗 지금까지 齊나라의 풍속이 되었으니
嫠婦哀哀學孟姜 과부들의 슬픔은 맹강에게서 배웠도다.
때는 주영왕(周靈王) 22년이었는데, 그 해에 곡수(穀水)와 낙수(洛水) 일대에 큰비가 내려 황하가 범람하여 평지의 수심이 한 자가 넘었다. 그리하여 晉侯가 齊나라를 정벌하려던 모의는 중지되었다.
한편, 齊나라 우경(右卿) 최저(崔杼)는 제장공의 음란함을 미워하여, 晉軍이 齊나라를 정벌하러 오면 거사하여 齊나라를 나누기로 좌경(左卿) 경봉(慶封)과 날짜까지 정해 놓고 있었는데, 홍수 때문에 일이 틀어지자 실망하였다.
[제126회에, 제장공이 최저의 후처 당강과 몰래 정을 통했었다.]
장공의 근시(近侍) 가운데 가수(賈豎)라는 자가 있었는데,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 장공에게 채찍 백 대를 맞은 적이 있었다. 최저는 가수가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많은 뇌물을 주고 결탁하였다. 그리하여 장공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모두 최저에게 보고되었다.
첫댓글 "모든 변란은 프로이드'가 말한
리비도가 발동하여 타인의 여자를
소유하려는 데서 나온다."
라는 명제를 제시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