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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욥기의 말씀 9,1-12.14-16>
욥이 친구들의
1 말을 받았다.
2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3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4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리오?
5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분노하시어 그것들을 뒤엎으시는 분.
6 땅을 바닥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
7 해에게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별들을 봉해 버리시는 분.
8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
9 큰곰자리와 오리온자리, 묘성과 남녘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
10 측량할 수 없는 위업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이루시는 분.
11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네.
12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
14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께 답변할 수 있으며 그분께 대꾸할 말을 고를 수 있겠나?
15 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16 내가 불러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해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복음에는 대조되는 세 인물과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세 가지 태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 하는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은 내치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는 가지 못하게 하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이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 역시 당신을 진정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제자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를 더 앞세우는 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는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그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엇보다도 ‘앞서 먼저’,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이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이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일입니다.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주님!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 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서원을 하고 수품을 받는 것은 하느님께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하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항구하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무엇에서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행을 맛보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차마 한 가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매달리다 둘 다를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지만, 신앙에는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한눈 팔지 않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자꾸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더더욱 되씹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일에 묶이면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오늘 순간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최선으로 다하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음에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수품 때의 마음으로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만 그 마음은 꼭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가시밭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고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즐기고 세상 것을 더 달콤해 했습니다.
또 거기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천상의 것을 더 찾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저에게 그래도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두 마음 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는 일,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일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는 제 마음을 당신이 아오시니 부족함을 꾸짖어 주시고 당신께 대한 한결같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십시오.
제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목하시던 시절,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뼛속까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나 이 세상 좋은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눈을 뜨나 감으나 가난한 사람들 생각뿐입니다.
그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낸다거나 휴가를 가는 것을 결코 본적이 없습니다.”
신학교 학장 시절, 여름 방학이 오면, 동료 교수들이며, 직원들이며, 신학생들이 모두 장기 휴가를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서 밀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가장 좋은 휴가라고 했습니다.
3년여 전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한달 간의 휴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내 성지순례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거시기 하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 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시험 - 예수님을 따르려면>
말한마디 천량빛을 갚는다 했습니다.
침묵도 좋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은 더욱 좋습니다.
분위기를 밝게 하는 유머나 청담이나 덕담, 적절한 칭찬은 좋고 감사와 위로, 격려가 되는 말은 치유의 구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밭 농사가 신통치 않아 약간 상심하는 농장 수사님과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수사님, 배밭 농사에 절대 실망하지 마세요!
믿음의 시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의 시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국은 잘 될 것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시험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어제는 배 수확하는 첫날이었습니다.
마침 예수성심자매회 월모임이 있었고 이를 배려해 농장수사님이 배를 보내 주어 미사 후 함께 먹었고 사진과 함께 감사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 배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님들과 미사 후 함께 찍은 사진과 예수성심상 사진, 그리고 메시지도 회장 자매님과 주고 받았습니다.
“모두가 멋지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사랑의 선물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예수님 감사와 축복인사 받으시고 가족 모두가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멘! 신부님! 이제 집에 도착했어요.
요즘은 차가 많이 막히네요.
신부님의 사랑을 듬뿍 담고 와 한달을 잘 지낼수 있을 것 같아요.
신부님의 따뜻한 기운으로 훈훈한 삶을 살아보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수십년동안 공동체를 한결같이 충실히 섬겨온 고마운 자매님입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마음은 그대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이래서 어제 하루 믿음의 시험은 잘 통과한 느낌입니다.
삶은 시험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믿음의 시험입니다.
역시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인내와 공부가 얼마나 믿음의 시험에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미사와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평상시 삶이 미사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수도회 연피정 지도를 하면서도 평상시 삶 자체가 피정 준비임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해 갈 때 앞으로의 시험은 물론 최종 믿음의 시험이자 최종의 봉헌이자 순종인 죽음도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믿음의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욥기는 전체가 욥이 믿음의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참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에 주목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정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대로 우리 믿음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 파스카의 여정에 각오도 새로워야 할 것입니다.
익명의 사람들 셋은 우리 모두일 수 있습니다.
이들 셋의 믿음의 시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결연한 포기를 요구하는지 깨닫습니다.
첫째,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없다.”
어디로 가시든지 스승님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준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과연 정처없는 예수님을 홀가분하게 결연히 모두를 포기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오직 하느님께 정처定處를 둔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르는 무소유의 삶,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 쉽지 않은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오늘 이 믿음의 시험이자 과제를 마음에 담고 내 삶의 자리에서 힘껏 주님을 따라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의 시험문제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사 청하는 이에게 참 몰인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죽은 이들보다 산 이들의 일이,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믿음의 시험 문제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처신할지 오늘 잘 생각하면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또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깊이 깨닫기만 한다면 실제 상황에서는 각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해 자유로이 처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 조문이 아니며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의 시험 문제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이에게 하신 주님의 답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과 비전의 실현에 전념해야할 사람이 세상일에 너무 관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일에 전념해야 할 제자가 무분별하게 세상의 잡다한 일에 매어 있음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저런일 할 일 다하고 언제 주님을 따르며, 하느님 나라의 꿈을 펼칠 수 있겠는지요!
이 또한 분별의 문제요, 늘 결단해야 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 최대의 유일한 과제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목표와 꿈이 선명할수록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도 충실할 것이며 믿음의 시험도 잘 통과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역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화두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욥의 둘째 담론입니다.
욥의 하느님 공부와 인내가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공부하여 깨닫는 욥이요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깊이하는 욥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절대 승복하는 욥이요 반역이나 저주의 성향은 전무합니다.
너무나 하느님을 잘 알고 인간인 자기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 무사하리오.”
욥이 얼마나 깊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지, 하느님의 영역을 존중하는지, 또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깊이와 인간의 깊이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 공부 없이 인간은 절대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참으로 혹독한 믿음의 시험을 잘 치러내는 욥의 인내가 참 장하고 놀랍습니다.
평소 하느님 공부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그의 깊은 하느님 공부의 내공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거인 욥이요, 이에 비하면 우리 자신의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빈약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시험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믿음의 시험입니다.
평상시 꾸준하고 한결같은 하느님 공부가, 하느님 나라 공부가, 예수님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한결같이 잘 따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려시대 학자인 길재(吉再: 1353∼1419) 이런 시조를 남겼습니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원천석도 비슷한 시조를 남겼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두 시조의 공통점은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국가도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비슷한 감정을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느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정성을 기울여서 세웠던 교회는 이제는 돌무더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탐불에 있던 성 소피아 성당의 성화는 회칠로 덮여 있었습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성 소피아 성당은 이제 무슬림들의 회당이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욥기도 비슷한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헛되고 헛될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사목하던 선배 사제가 시를 한편 보내왔습니다.
“상실이 잉태한 것은 다 잃어버릴 수 없어서
남은 것을 헤아려 본다.
일생을 헌신한 하늘 뜻 하나 붙든
삶의 끝에 Natus* Ingressus* Obiit* 새긴
묘비 베고 누운 그대 숫자들 사이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이름자 넘쳐 새 Cemetery로 모여든 사명 마친 이들
수도원은 비워지고 묘지는 넘친다.
슬픔 과해서 은퇴했노라는 파킨슨스 노 사제
간혹 정지된 생각 속에 길 잃어버린 회로 망각 속에는
영혼구령이라는 구호 하나 남았을 것이다.
애썼던 옛 시간에게 묻는다.
그 열정의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문 닫은 수도원, 비워져 가는 성당, 임종 앞둔 사제들
우리의 수고는 불신의 세대를 낳아
공허한 메아리 차지한 빈 성전을 물려주고 있다.
그래 기쁜 소식은 빈 무덤에서 시작했었지
대답 없는 답변
내일의 그대에게 양도해버린 봉인된 입”
(*Natus, *Ingressus, *Obiit 은 태어난 해, 입회한 해, 입적한 해의 라틴어 표기로 수도자들 묘비에 기록된 세 가지이다.
족적 남기신 분들이나 무명의 수도자들 차별 없이 받는 세 가지 숫자이다.)
묘지에 묻힌 형제들은 늘어가고 있는데, 수도원은 비워가고 있음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죽비’와 같습니다.
무상한 인생이라도,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짜 고쳐 쓸 수 없을까요?
맞다고 하면 반대의 의견을 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인간은 변화 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고쳐 써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 순간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매우 활발하게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3,300억 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집니다.
이는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는 주기가 약 7년쯤 된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과학적으로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 ‘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삶은 고쳐 쓰는 삶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된 변화를 내 안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났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열정적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기존의 것을 모두 간직한 채 따를 수 있을까요?
약간의 변화를 통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니겠다고 청원합니다.
그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사제 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생을 배우는 사제 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따르는 완벽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말에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말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에 대해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셨으며, 엘리야 예언자도 허락했었던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에 대해서는 “쟁기에 손을 대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로지 달려야 할 길만을 꾸준히 달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고침으로 충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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